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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Writes May 24. 2020

RTFM 아이 설명서가 있었으면

호주 시골에서 3년

                              

시골의 하드웨어 샵에서 일하다 보면 모든 업무를 다 섭렵하게 된다. 주인 내외를 제외하곤 직원은 나뿐이었으니 말이다.  고객 응대는 물론이요, 페인트도 섞고 가스통에 가스도 충전하고, 고객의 집 사이즈에 맞추어 쿡탑, 가스히터도 주문해야 하고, 세탁기 티브이 페인트 주문 진열... 수리 환불 접수 및 온갖 잡다한  일이 내 차지다. 그리고 판매하는 식물들도 항상 싱싱하게 보이게 물 주기를 빼먹으면 안 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윌 배로우, 개라지 작업대, 선반 등을 조립하는 일이다. 조립이 안된 상자째로 팔 수도 있지만, 어떤 모양인지 고객들이 알 수가 없으니 판매가 시원찮다.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기는 해도 조립을 해서 팔면 조립비 $20달러를 추가할 수 있고, 판매도 촉진되니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가게에서 시간이 나면 박스에 든 상품들을 조립하곤 했다. 작은 체구의 동양 여자가 커다란 전동 드릴을 잡고 자기보다 큰 윌배로우니 캐비닛을 조립하고 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손님들은

"Women can do anything, aye? "

"Who needs a man when you can put together your own furniture."

라고 한 마디씩을 건네고, 어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격려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윌배로우 손잡이를 안팎을 바뀌어 달고도 알아채지 못해 그대로 진열을 해 놨다. 한 손님이 보고 왜 이건 글자가 거꾸로 되어 있냐고 물어 다시 재조립을 해야 했던 적이 있다. '아, 그래서 나사가 끼우기에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구나!' 모든 재료가 딱 제자리에 있을 때 조립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다들 비슷한 모습이라 눈으로 보면 헷갈리기도 하고, 방향이라도 바뀐다면 필요 이상의 힘이 든다. 또 모든 걸 제대로 했는데도 제조상의 실수로 완조립이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래서 매뉴얼을 꼼꼼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매뉴얼과 내용물이 다를 경우 제조사에 환불이나 교환 또는 부품을 신청할 수 있다.


나는 늘 별이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 세상을 받아들일까?

"독특한 아이네요!"

못 마땅한 표정 뒤로 애써 예의로 포장한 말.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체카와 알고 난 후, 그녀의 집을 스스럼없이 드나들게 된 후 어느 날, 체카의 파트너 존과 내가 새로 산 고프로를 들고는 사용법을 알아내느라 끙끙 대고 있었다. 이리저리 버튼을 마구 눌러대며 'not this, not this' 를 연발하던 우리를 보고 웃으며 체카는 말했다.


"우리 오빠가 늘 하는 말이 있지.

RTFM. Read the fxxking manual."


너무나 당연할 말이 왜 그렇게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새롭게 느껴졌을까? 존과 나는 멋쩍은 미소를 나눴다.


수수께끼 같은 별이의 마음속이, 그 머릿속이 궁금한 나에게 체카는 논문을 읽어 보라고 했다.

"내가 논문을 어떻게 읽어요? 영어도 그렇게 잘하지 못하고, 한글로도 논문 같은 건 읽어 본 적이 없다고요!"

"넌 똑똑한 아이야, 너는 아직 젊어. 원한다면 너는 나같이 박사도 될 수 있을 거야. 나를 봐, 15년이나 공부했다고.  Persevere darling. 진짜 정보는 어렵고 비싼 거란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정보에 현혹되지 마."


어쩌면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매뉴얼이 있지 않을까? 너의 조각들을 내가 그 매뉴얼을 보고 꼭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최소한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 엄마 만은 너를 온전히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너의 서투르고 어색한 표현 뒤로, 사실은 아직도 저녁에 자러 가기 전에 엄마를 꼭 안아주는, 소설가 김영하의 팟 캐스트를 좋아하고, 영화를 즐겨보며, 영화감독들의 에피소드를 엄마한테 설명해 주는 것을 즐기는, Lauv의 노래를 즐겨 부르는, 역사책과 과학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멋진 아이가 숨어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너의 그 소통의 문을 열어 주는 설명서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요즘 심리학이나 뇌과학 쪽을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든다. 하지만 공부에 뜻이 있었던 적은 없었던 지라, 내가 어떻게 대학원을 갈 것이며, 대학을 또 가? 싶은 마음이 단칼에 잘라버린다. 체카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한다. 논문을 찾아서 하나씩 읽어 보기로. 아마 나는 대부분을 이해 못 할 것이다. Persevere darling. 언젠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때는 도전할 용기가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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