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더치페이
나는 요즘 드라마 작가 교육원을 다니고 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교육생들의 나이를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학생부터 40대 후반까지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중 제일 많은 건 아무래도 20대 후반~30대인 것 같다. 교육 과정도 이제 한 달 밖에 안 남은 시점. 나는 총 2명의 친구를 사귀었다.
한 명은 나보다 3살 어린 여자 동생이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고, 첫날 서슴없이 다가와준 덕분에 친해졌다. 다른 한 명은 40대 후반 남자 삼촌(?) 오빠(?)이다. 그리고 나는 스물여덟. 이 와중에도 호칭 정리가 어렵다. 역시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OO님. 이게 제일 깔끔한가?
첫 회식 때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가볍게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이후 교육 때마다 마주치면 "언제 한번 저녁 먹어요" "대본 잘 읽었어요" 몇 마디 정도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셋이 저녁을 먹게 된 일도 있었고 종종 카톡도 주고받는다. 며칠 전에는 40대 후반 남자분과 단 둘이 고깃집에서 식사를 하게 됐다. 가볍게 카톡을 주고받던 중,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저녁 식사 자리였다.
우연히 갖게 된 두 번의 저녁 식사 겸 술자리. 나이 차이가 무색할 정도의 티키타카 그리고 말이 잘 통함. 이런 건 아무래도 어려웠다. 가뜩이나 내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나로서는 대부분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빴고 오랜 세월 훈련된 리액션도 그날의 대화를 재밌게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색하고 잘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런 관계는 첫 만남부터 정말 잘 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는 적어도 그랬다. “오늘 처음 봤는데 되게 오래 본 사람 같아요!”“처음 만난 사람 같지 않아요” 이런 멘트을 이끌어내는 감정은 미팅, 게하파티, 가벼운 마음으로 나간 소개팅과 같은 일회성 친목모임..? 에서나 가능했다.
이야기가 자꾸 산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날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계산 문제다!
첫 번째, 두 번째 저녁을 모두 얻어먹었다. 한 번 얻어먹은 전적이 있어 두 번째 식사는 기필코 더치페이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계산대 앞에서 약간의 실랑이를 벌였지만 계산을 위해 계속 기다리는 점원, 계산하려고 일어나는 다른 손님 무리, 어른이 계속 받으라고 하면 일단 받는 게 예의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아른거려 일단 지게 됐다. 그렇게 7만 원 상당의 고기를 얻어먹어 '버렸다'. 비싼 삼겹살 집이었고.. 더치페이할 생각에 내가 음식점 & 메뉴도 편하게 다 골랐단 말이다..! ;;
그래도 마지막 발악(?)으로 고깃집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카카오페이로 35,000원을 바로 송금했다. 계속 사주시면 죄송해서 안되니 오늘은 꼭 받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근데 그분도 절대 안 받을 거라며 이런 말까지 하더라.
이러면 우리 세대는 OO씨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아요.
그래 뭐.. 수긍은 간다. 그냥 좋은 마음으로 맛있는 저녁 사주고 싶은 건데 내가 송금까지 하면서 거절을 하니..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게 최후의 멘트를 날리신 거겠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시니 '나중에 내가 한번 사야지' 다짐하며 말씨름은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우리 엄마만 봐도 그렇다. 친구들이랑 만나면 회비로 N빵을 하지만 대학교 동기(*엄마가 삼수를 해서 나이는 두 살 어린 동생)를 만날 때는 꼭 본인이 계산을 한다고 한다.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그래도 동기인데 그럴 땐 그냥 N빵 해도 되지 않아?"라고 계속 되물었더니 "내가 언닌데 당연히 계산을 해야지"라는 말만 돌아올 뿐 엄청난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엄마 세대는 그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 40대 후반 남자분과 나의 생각 차이는 세대차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고기를 배부르게 얻어먹고 집 가는 버스 안에서 마음이 내내 불편했던 건 맞다. 앞으로 어떡하지? 왜 자꾸 이러시는 거야? 이런 마음보다는 지금 이 기분을 주제로 글 한 편 쓰고 싶다는 영감적 DNA가 떠다니는 불편함이랄까?
그리고 이내 <경계인의 시선> (김민섭 저)에 나오는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 자리의 식비를 계산한다든가 하는 행위는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것인데 그 자체가 이미 권력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특히 계산을 하면서 그 자리의 권력을 자신이 그만큼 독점하겠다는 의미도 되고, 이후에도 자신이 그만큼의 지분을 가져가겠다는 의미가 된다.
이 책은 대학원생 조교부터 청년, 학생, 예술가 등 사회의 어떤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 '세대 갈등' 챕터에서 작가가 겪은 한 20대 후배와의 (*작가는 30대 중반 남자이다) 에피소드 결론 중 하나였다.
당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어 '바로 이거지!!' 하며 기록을 안 해둘 수 없었는데..!
진짜 친구가 되기 위해
오히려 더치페이를 해야 한다고요!
조금만 과장해서 진짜 친구 = 더치페이해야 한다.
인간관계 유형을 1) 친구 2) 비즈니스 관계. 둘로 나눠 더치페이를 하느냐 마느냐를 단순하게 결정한다. 생일이니 결혼이니 하는 예외적인 상황은 당연히 제외하고 말이다. 친구 사이라면 더치페이를 하는 것이 깔끔하고, 비즈니스 관계는 오히려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게 깔끔하다. 오히려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각자 계산하는 것이 더 이상해진다. 예를 들어, 갑을 관계가 확실한 두 회사의 직원이 만나 식사를 했는데 굳이 굳이 더치페이를 하지는 않는다. 이럴 때는 그냥 비즈니스 측면에서 얻어가야 할 것이 많은 회사 or 개인이 계산하는 게 명쾌하다.
내가 이날 마음이 불편했던 건 가치관 충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친구 관계에 대한 가치관과 어긋난 상황이 발생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도 진짜 친구들이랑은 월 회비까지 걷어가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더치페이를 하고 있다. 그보다 덜 친한 대학교 동생에게는 100% 밥을 사주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칼 같은 규칙이 때로는 두 사람 사이를 친구 사이로 규정짓는, 강력한 도구가 되어준다는 일반화를 해본다.
더치페이, 주고받음에 대한 생각을 적고 있으니 나의 성격 자체의 문제인가?라는 생각도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나 스스로가 받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뭔가를 베풀 때 경계심을 갖고 살피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똑같은 마음을 주는 것이 너무 어렵다. 오히려 GIVE에 대한 압박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종종 "너 너무 거절하는 것도 실례야"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 기저에는 나도 이 사람에게 비슷한 수준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강제성이 싫다는 마음이 있다. 돌려줘야 한다는 그 자체보다는 '비슷한 수준'이 나에겐 너무 어렵다. 아직 나에게는 그 정도로 가까워진 우리 사이가 아닌데, 나에게 무언가를 표현해 주었으니 인간 된 도리로 ‘비슷하게 줘야 한다’는 마음 말이다. 앞으로 내가 곧 수행해야 할 연기(performance)과제가 주어진 느낌이다. 언젠가 월요일 아침이 되면, 일하는 그 친구를 위해 “월요병 파이팅!”하고 커피 한 잔을 선물해주어야 할 것 같은..?
그래서 결론은!
똑같은 나이로도 되기 어려운 것이 [친구]인데 20대와 40대가 친구가 되려면... 정말 정말 더 더 많은 시간과 노력, 무엇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생각?
단순히 마주 앉아 밥을 먹었기 때문에 우린 친구야! 서로 같은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잖아?! 우린 친구야! 이렇게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본질적인 [통함]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기다림]이 필요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날 더치페이를 했다면
뭐가 좀 달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