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캘리피아

by 련빛Lotus Gleam
동네에는 고수가 산다.
간판은 낡고, 주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손끝과 마음으로 브랜드를 빚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철학은 메뉴판보다 깊고, 인스타그램보다 오래 간다.
우리는 그들을 ‘숨은 고수’라 부른다.
이 시리즈는 골목과 골목을 걸어 찾아낸,
각자의 브랜드와 철학을 가진 장인들의 이야기다.



인트로 – 세운상가 속의 잉크 향기

우연히 지나가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공간이 있다.

오늘은 마침, 그곳에서 캘리그라피 회원들의 글 전시 오프닝이 열리고 있었다.

그 이름은 캘리피아(Callipia).
세운상가 속, 유난히 고요하고 깊은 공기가 감도는 작업실이다.

“영문 캘리그라피 아틀리에, 캘리피아(Callipia).”


홍콩에서 돌아온 영어 캘리그래퍼

캘리피아의 주인장은 승무원 시절,

어느 날 패트릭 릉(Patrick Leung)의 캘리그라피 작품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그 길로 그녀는 홍콩에서 패트릭 릉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30년간 홍콩에 머물며 글씨와 함께한 삶을 이어왔다.

패트릭 릉이 직접 쓴 글씨를 보여주었는데, 일정한 획과 완벽한 균형감은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작년 9월,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두 권의 영어 캘리그라피 교본을 집필했다.
이 교본은 현재 캘리피아 공식 홈페이지에서 구매할 수 있다.


신기했던 건, 한국의 서예대전은 한글 작품만 출품되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영어 캘리그라피 작품을 출품했고, ‘특선’을 수상했다는 점이다.
“영어지만 서예, 즉 ‘글 예술’로 봐준 것 같아요.”




두 개의 장면


작품 제목은 <There Is No Other Land>.

“지금, 여기. 다른 땅은 없다. 현재에 발 딛고 서라는 강렬한 선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을 바탕으로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배경에 차분히 쓰인 회색 글씨는 소로의 구절,

“현재에 살고, 매 순간 영원을 발견하라.”

그 위를 가로지르는 힘찬 흰 글씨,

“There is no other land but this”

이 단호한 문장은 깊은 성찰 끝에 도달한 하나의 깨달음을 보여준다.
차분한 글씨와 격정적인 글씨의 대비는 ‘사유의 과정’과 ‘확신의 순간’을 시각적으로 대비시키며,
흩뿌려진 먹 자국과 작은 붉은 점은 그 깨달음이 폭발하는 에너지와 찰나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결국 이 작품은 우리 삶의 기회와 행복이 먼 미래나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재에 있다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품, <eloquence>.

“진정한 열정 속에 깃든 웅변. 꾸며진 말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선.”

워싱턴 어빙의 문장,

“Indeed, there is an eloquence in true enthusiasm that is not to be doubted.”

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작업이다.
화면 중앙의 ‘eloquence’라는 단어는 힘 있고 유려한 필치로,
계산된 기교가 아닌 내면의 순수한 열정과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그 아래 정갈히 적힌 어빙의 문장은 감성과 이성이 만나는 지점을 제시하며,
작품 전체가 곧 ‘열정의 웅변’이 된다.





브랜드로서의 가능성

캘리피아는 단순한 취미 공간이 아니다.

그녀의 글씨는 간판, 앨범 재킷, 매거진 타이틀, 상품 패키지로 확장될 수 있다.
실제로 디자인 업체에서 의뢰가 들어오고 있고, 출판물과 상품화 작업도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 마음을 끈 건, 간판의 글씨까지 직접 쓴다는 점이다.
“밖에서 이 글씨를 본 순간, ‘아, 이런 공간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글씨.”
그게 바로 캘리피아의 힘이다.


에필로그 – 한지 위의 글씨를 꿈꾸다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떠올랐다.
내가 쓴 한지에 이 영문 캘리를 입히면 어떨까?
그 위로 빛이 스미면, 등 하나도 하나의 작품이 될 것이다.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아틀리에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곳이다.
세운상가의 오래된 기계음 속에서, 잉크 향기와 종이의 질감이 은밀하게 번져 나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12편. 호치민 시티의 하루 — 코코넛 향이 남은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