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지 정확히 한 달. 그동안 정말 밀린 일을 하느라 바빴다. 한국에서는 특별히 운동을 하지않아도 하루 평균 7000보는 걸었는데, 집에 와서는 1000보조차 걷지 못할 정도로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했다. 시차 적응은 사치였다. 한동안 지금 내가 먹는 게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추석만큼은 애들이랑 무언가를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간을 내기 위해 밤을 새우다시피 일한 덕에, 드디어 추석 당일 저녁, 아이들과 만두 만들기에 돌입했다. 간 돼지고기와 으깬 두부, 숙주, 파, 양념을 털어낸 김치가 들어간 이북식 만두. 두부와 숙주, 김치를 베보자기에 넣고 수분을 짜내느라 손목을 있는 대로 틀다 보니 추석의 '추' 자도 모르는 동네에서 이 바쁜 와중에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있나, 현타가 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릴 때 나도 얻어먹은 게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건가.
음식은 추억이라고 했던가, 추석 때가 되면 풍성했던 무주 산골의 가을이 떠오른다. 할머니 휘하 네 며느리가 둘러앉아 꽉 찬 부엌에 진동하던 기름 냄새, 유달리 꼼꼼한 아빠가 신문지를 펼치고 앉아 작은 칼로 하얗고 동글동글하게 까 놓은 생율, 제사를 마치고 나면 상에 물컵 하나 올려놓을 자리 없이 풍성하게 채워지던 음식. 뒷산에서 난 도토리로 만든 묵을 말린 묵말랭이 볶음과 큰엄마가 얇게 찹쌀풀을 발라 튀겨낸 부각, 그리고 영동 사는 사촌 고모가 처마 밑에 줄줄이 달아 말려 온 곶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을의 무주는 넉넉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금색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소나무는 송편 찌는 솥에 깔 솔잎을 원 없이 따가도록 내주고, 장대를 들고 감을 따러 가면 병풍처럼 두른 덕유산 위에 솟은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그리고 코끝이 아리던 흙먼지 냄새가 매 순간 재채기로 존재를 알렸다. 서울에서는 접할 수 없는 신기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음습했던 동네 끝 소나무 둔덕에는 삼촌 친구를 새벽 내내 부르던 귀신이 산다 했고, 큰아빠들도 우리 아빠도 삼촌들도 모두 다녔다는 안성초등학교 운동장에는 625 때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이 묻혔다고 했다. 이불 끝을 손에 쥐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듣던 이야기는 내 나름의 재편집을 거쳐 8-12살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전달되었고, 명절이 지나면 작은 엄마들로부터 갑자기 애들이 잠들기 무섭다며 밤마다 안방으로 쫓아온다는 하소연 섞인 전화를 받는 게 일이었다.
지금과 같은 대체휴일도 재택근무제도 없던 그 시절. 전 국민은 한날한시에 고향에 다녀와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 는 마냥, 전 국민이 추석 연휴 첫날에 귀성길에 오르고 또 마지막 날 다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1991년이 되어서야 도로포장이 이루어진 아빠의 고향은 가는 길도 오는 길도 더 험난해서, 도로 정체 때문에 새벽에 도착해 그 길로 바로 등교한 적도 있었다. 요즘 눈으로 보면 미련하고 비효율적이지만 그래도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부모님 덕에, 이 먼 곳에서 30년 세월을 지나 내가 그리워하는 그 시절의 기억의 파편이 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십 년 넘게 넘치도록 얻어먹어놓고, 만두 한번 빚는 걸로 퉁치려 하다니 염치가 없는 것도 같다. 그래도 얘들아 30년 후에 엄마의 만두도 좀 기억해 주면 안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