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360장이 도착했습니다
무조건 사랑 받았던 기억으로 살아간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미국인 우체부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빨간 글씨로 "마음까지 전하는 우체국 택배"라고 쓴 황토색 박스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낑낑대며 우리 집 현관 앞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얼른 문을 열어 고맙다고 말했다. 마스크 너머 그는 한숨을 쉬며 "하나 더 있다"라고 말하고는 다시 트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살며 한국에서 소포가 오면 언제나 부자가 된 기분인데, 하나도 아니고 두 개라니. 재벌이 된 것 같았다.
박스 하나에는 내가 친정에 부탁했던 온갖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친정 집으로 가게 한 것들. 아이들 한글 책부터 질 좋은 미역까지, 내가 사는 미국 작은 도시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보다 가벼운 두 번째 박스를 여는 순간, 숨이 탁 막혔다.
빼곡히 들어찬 마스크. 설마 이 박스 하나가 다 마스크인가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법이 바뀌어 재외국민 1인당 한 분기당 90개까지 마스크 발송이 가능해져서 아빠가 우리 가족 넷을 위해 360개를 보내주셨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반출 갯수 제한이 있는 마스크는 해당 박스에 마스크 외에는 아무 것도 넣지 못한다는 것도.) 마스크가 올 줄 모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여름용 비말 마스크와 KF94를 합쳐서 대략 백여 개를 지마*에서 집으로 배송해서 대략 그 정도 받겠거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최대 수량에 꽉꽉 맞춰 추가로 구매해 보내주신 것이다. 봄에 보내주신 마스크와 필터까지 합치면 이제는 500개는 족히 넘는 마스크가 있는 것 같았다. 이쯤이면 우리 동네에서는 마스크 재벌이다.
한국은 이제 마스크 구하기가 쉬워지긴 했겠지만, 그래도 200개가 넘는 수량을 아빠가 어떻게 사셨을지 먹먹했다. 미국보다 낫다곤 해도 여전히 코로나가 무서운데, 가만히 있어도 더운 여름에 (당시는 8월이었다) 이 약국 저 마트 발품 팔아 돌아다니신 건 아닐까. 또 돈으로 계산하면 이게 얼마일까. 마스크가 든 박스만 해도 배송료가 6만 원이 넘던데. 미국에도 마스크가 없는 건 아닌데...(사실 KF94나 비말 마스크 같은 건 구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으로 된 마스크나 치과에서 쓰는 파란 일회용 마스크를 끼고 다닌다.) 한국 아침 시간 맞춰 전화를 걸었더니, 아빠는 마스크 잘 받았다니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신단다. 다음 분기에 또 보낼 테니 애들 학교 갈 때나 장 보러 갈 때 괜히 아끼지 말고 매일 새 거 뜯어 쓰라고 당부하신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데, 말재간이 없는 나는 고맙다는 말 말고는 뭐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가 똑 닮은 아빠도 다정다감한 말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이 늘 바빠서 가족들과 대화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뚝뚝한 편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렴풋이 나는 기억한다 - 내가 어릴 때 아주 많이 사랑받았다는 것을. 바로 앞에 있어도, 품에 안고 있어도 너무나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던 사랑의 공기를 기억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나를 위해서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쾌히 지갑을 열던 순간들도. (덕분에 어른이 될 때까지 난 우리 집이 꽤나 부유한 줄 알았다.) 그래서 사춘기 때도, 엄마가 된 이후에도 저 멀리 앞서 혼자 가는 아빠가 보이면 얼른 뛰어가 아빠의 따뜻하고 투박한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었다.
내가 아이 둘을 낳고 보니, 예쁘게 생겨서, 칭찬받을 짓을 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 나를 키우고 주눅 들지 않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경험은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엄청난 미모나 뛰어난 지성을 갖추지 않았어도, 실패 앞에서, 혹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9월 초부터 주5일 등교를 시작한 우리 애들은 할아버지 덕분에 매일 새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다니는 호사를 누린다. 밤 공기가 차가운 10월, 한국의 가족이 유독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