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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Oct 14. 2020

평범한 아줌마, 미국 광고에 출연하다

열정페이는 열정만큼 깎는다는 뜻일까

코로나로 인해 집에 갇혀 있으면서 답답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예상치 못한 경험들도 했다. 그중 하나가 광고 촬영이었다. 연예계와는 오조오억광년 떨어진 채로 살아온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보니 지인찬스와 우연의 합작으로 신기한 기회가 생겼다.


아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실 나한테나 아는 동생이지, 카리스마 넘치는 잘 나가는 촬영감독님이시다.) 모 미국 회사의 광고 촬영에 참여하는데,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컨셉으로 가족이나 친구들을 자유롭게 찍은 영상을 보내기로 했단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이 절대 불가를 외친 탓에 '아는 언니'인 내가 대체재로 낙찰. 코로나 때문에 심심해진 남편이 마당에 텐트를 치고 불멍하는 사진을 올렸었는데, 그게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 집 텐트는 한 번도 뒷마당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저 평소처럼 일만 하면 된다고, 단 30초 광고에 나오는 수십 명의 일반인 중 하나일 뿐이니 아무도 못 알아볼 거라기에 수락했다. 사실 별 생각은 없었다.


나와 남편 사이에서 고민하던 광고주는 일단 나와 남편 둘 다 찍어보자고 제안했다. 전문가 카리스마를 장착한 촬영감독님은 아침 7시, 8시, 9시와 저녁 5시, 6시, 7시의 햇빛 방향과 세기를 체크하더니 촬영 시간을 정했다. 메이크업이나 헤어는 필요 없지만, 옷은 흰색과 검정은 안되고, 요란한 패턴은 안된다고 했는데, 내게 도무지 평범한 옷이라곤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결국 감독님이 고른 옷은 10년 전쯤 어느 아웃렛에서 산 네이비색 셔츠와, 한국에서 집 앞 매대에서 만 오천 원을 주고 산 펑퍼짐한 빨간색 체크무늬 홈드레스였다. 아줌마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그 빨간 깅엄체크 홈드레스는 뭐랄까, 온몸으로 "나는 한. 국. 에. 서. 온. 아. 줌. 마. 다!"라 외치는 듯했다.  


2층 데크에서 아침 8시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동트는 아침해를 뒤로 하고, 난 여름내 남편이 공들여 키운 대파와 부추 정글 사이에서 업무에 매진하는 척했다. 사실 연기(?)에 대한 요구사항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랩탑 자판을 치다가, 화면의 뭔가를 확인하고 다시 짧게 자판을 치고, '아 잘 끝났다'라는 표정으로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살짝 기대고 머리를 살짝 쓸어 넘긴 후 커피를 한 모금하라고 하긴 했지만. (이걸 몇 초씩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오직 정적만이 흐를 뿐...) 다음 장면에서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남편이 내 뒤에서 오이고추에 고무 호스로 물을 주었다. 마지막에는 남편이 일하는 나에게 커피를 갖다 주면 씽긋 미소를 지으며 뽀뽀(smooch)하는 건 어떠냐고 광고주가 말했는데, 뒷부분은 영어 모르는 척했다.


이후로도 장소를 세 번이나 옮긴 촬영은 결국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꼬박 8시간. 엄청나게 피곤했다. 이렇게 열심히 찍었는데, 둘 중 하나만 나오거나 아예 둘 다 안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무지 유명한 영화를 찍었던 촬영감독도 참여했었는데, 그 사람 분량은 벌써 까였다며. 안 나오면 로열티 부분 모델료는 지급이 안된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아쉽지도 않았다. 흥미로운 경험이긴 했지만, 다신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분량은 살아남았다. 남편과 내가 등장하는 세 장면 합쳐서 무려 6초. 한 화면에 열여섯명이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에, "저 사람인가?"라고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지나간다. 한국도 못 가서 일 년째 미장원 구경을 못한 내 봉두난발과 기미 낀 얼굴이 잘 안 보여서 내심 좋긴 했는데, 사실 이 정도면 옆집 사람은커녕, 우리 부모님도 날 못 알아볼 판이다. 빨간 체크 홈드레스는 다행히 탈락됐다.   


처음 해 보는 일이 생각보다 힘든 건 당연했지만, 사실 내가 가장 놀랐던 지점은 생각보다 철저한 시스템이었다. 촬영감독은 우리 강아지와 아이들을 출연시키고 싶어 했는데 규정이 엄격했다. 동물의 경우 조련시킬 수 있는 공인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촬영 현장에 있어야 하고, 법적 미성년자의 경우에도 연기 지도자가 현장에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사전에 노동 허가까지 받아야 했다. 사실 우리는 촬영감독의 지인에 불과한 일반인인데도 여러 계약서를 전달받았다. 모델료는 촬영 준비하는 날과 촬영 당일의 인건비와 장소 대여비, 그리고 로열티로 구성되었는데, 이 로열티가 어느 기간, 지역, 그리고 영역을 커버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다시는 업계에 등장하지 않을 나 같은 일반인이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어린이나 동물도 부적절한 노동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게다가 분명 촬영 끝나고는 '두 번 할 짓은 못된다'며 혀를 내둘렀는데, 입금 내역을 보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얼마가 들어올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생 한 번이라고는 해도, 아무런 열정도 없고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은 내 하루의 시간이 이렇게까지 금전적 가치가 있는 것이었던가 싶었다.


순간 한국의 열정 페이가 떠올랐다. 젊은 사람들의 열정을 볼모 삼아 노동력을 착취하는 불합리한 행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늘 약자라고는 하지만, 누군가의 꿈이 착취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생충" 감독님이 대단한 점 중 하나는 모든 스탭이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게 하고 근로시간과 임금지급을 칼같이 지켜준 데 있다고 들었다. 요즘 최고 잘 나가는 젊은 배우가 본인의 광고료를 낮추는 대신 함께 하는 스태프들의 처우를 올려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을'들에게도 정당한 대가와 안전한 환경이 주어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추신. 우리 남편 에이전트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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