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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Apr 10. 2021

호두까기 인형은 동양인을 차별하지 않아서

열 살 무렵, 나는 어느 날 영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뚝 떨어졌다. 간단한 인사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고 선생님의 쉬운 지침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무력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다가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아빠도 엄마도 네 살짜리 동생도 모두가 각자의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린 밖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는 집에서 나누지 않았다. 생채기를 열어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말랑해졌다. 비록 다음날 각자의 전쟁터에 나가면 다시 상처투성이가 된다 해도.


1990년, 내가 살던 런던 외곽의 작은 마을엔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의 존재가 드물었다. 그럼에도 전쟁터 복판의 방공호같은 이들이 있었다. 나의 피부색이나 언어에 집중하기보다 ‘나'라는 사람에게 조건 없는 애정과 관심을 베풀어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내가 살던 마을의 번화가(?);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에 위치한 작고 조용한 도시였다 (출처: wiki Creative Commons Image)

특히 데릭 할아버지와 준 할머니가 그랬다. 이들은 우리 아빠가 다니는 영어 학원 선생님의 부모님이었다. 아빠 회사도, 영어 학원도, 선생님의 거주지도 런던이었는데 우연히 대화 중에 우리가 부모님과 이웃이라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딸이 가르치는 여러 학생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우리 가족에게 유난히 친절했다. 우리를 자주 집으로 초대해 영국의 음식을 먹이고 전통과 문화를 소개해 줬다. 대머리에 안경을 쓰고 주먹코를 한 유쾌한 데릭 할아버지는 유머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다는 걸 증명하듯, 영어 실력이 일천했던 우리 가족을 빵빵 터뜨렸다. 웨이브가 들어간 백발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늘 깔끔한 셔츠를 입는 준 할머니는 언제나 우아했다. 은쟁반에 담긴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을 곁들인 애프터눈 티를 가르쳐준 것도, 크리스마스 만찬에서 크리스마스 크래커를 처음 보여준 것도, 부활절에 마당 여기저기에 부활절 계란을 숨겨놓고 나와 내 동생을 위한 보물 찾기를 연 것도, 모두 이 노부부의 배려였다.

크리스마스 크래커: 손님들이 양쪽 끝을 잡고 잡아당기면 찢어지면서 작은 선물이 나온다.

첫해 겨울 한껏 위축되었던 나는 데릭 할아버지 집의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았다. 나무로 만든 호두까기 인형과 빨간 봉투 속의 발레 티켓이었다.

호두까기 인형

며칠 후 나는 그 호두까기 인형을 품에 안고, 데릭 할아버지와 준 할머니와 함께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보고 올 터였다. 태어나서 발레는커녕 클래식 공연 한번 본 적이 없었기에, 어떤 경험일지 감이 오진 않았다. 그렇지만 열 살 어린아이도 알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이방의 가족에게 이들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진짜 선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물론 이렇게까지 고급스럽지도 않았고 1등석도 아니었지만 클래식함이 비슷한 사진을 찾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무와 쿠션으로 이루어진 객차였다.출처: gcrailway.co.uk

영국에 도착한 이래 그날 처음으로 엄마 아빠 없이 집을 나섰다. 30여 년이 지나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해리포터에 나오는 것처럼 오래된 나무와 세월에 닳은 쿠션이 놓인 객차에 타려면 달칵 걸쇠를 열어야 했다. 런던의 코번트 가든이나 생애 첫 발레 공연은 파편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하지만 그날 밤 정신이 번쩍 드는 날카로운 찬 공기 속, 목이 메일 것처럼 답답했던 마음은 또렷이 기억한다. 기차 안에서, 공연장 들어가기 전과 나와서, 돌아오는 길, 내 딴에는 진지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열살짜리가 말로밖에 전할 수 없는 고마움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내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애꿎은 밤하늘만 한참 바라보았다. 그날 관람했던 <눈꽃송이의 왈츠>보다, 하얗게 쏟아지던 별빛이 애태우는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Nutcracker Snowflake dance (출처: wiki Creative Commons Image)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집을 떠나 런던에 다녀오는 여정 내내, 나는 한순간도 내가 '다르다'고 느끼지 않았다. 누가 나를 차별하지도, 이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 느끼지도 않았다. 이 동화 같은 경험은 움츠렸던 내가 바깥세상에 대해 조금 더 용기를 가지게 해 주었다. 집 밖으로 한 발짝 더 떼어보고, 나와 다르게 생긴 이들의 마음을 조심스레 두드려 볼 수 있었다. 상황이 하루아침에 좋아지진 않았지만, 몇 개월 후에는 정말  친한 친구들이 여럿 생기면서 학교 생활이 즐거워졌고, 지금껏 잊지 못할 행복한 추억도 많이 생겼다.


노부부의 친절이 아니었다면, 적응하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내 주변 사람들과 다른 나의 생김새, 유창하지 못한 언어, 관점의 차이 같은 것들에 매몰되어 마음의 문을 쉽사리 열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이방인으로 타국에 사는 나지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러한 용기를 줄 수 있기를 염원한다. 사랑은 차별과 분리를 뛰어넘을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니까.  


기차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말없이 무성한 나무 사이로 바라본 하늘엔 별빛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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