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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익구 Nov 20. 2021

나의 영웅

그렇게 동네 형들마저 아버지처럼 무서운 커뮤니티 속의 나의 존재는 항상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졸업식 때면 형들의 뒤에서 알 수 없는 뭉클한 가슴이 되어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나도 언젠가는 영광스럽게 졸업식장에 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형들의 뒤를 따르고 싶었고, 검은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진학한 형들은 미래의 내 모습으로 새겨지곤 했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의 중압감은 가을운동회 때에 여실히 드러났다. 기마전이나 깃발 뽑기와 같은 격렬한 경기에 맞닥뜨리면 형들이 얼마나 씩씩하고 자랑스러웠는지 용감 무상한 투사처럼 느껴졌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의 추석 때였다. 나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사라호 태풍이 닥쳤다. 동네 위쪽에 있는 범천 못이 터진다는 위험신호로 한밤중에 사이렌이 울렸다. 기어코 집을 지키겠다는 엄마를 혼자 두고 세찬 바람과 비가 쏟아지는 깜깜한 밤에 사각 초롱을 들고 망창산 중턱 동네에 피난을 갔다. 구석방 한 칸을 빌려 밤을 새울 때 물끄러미 우리 형제들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금방 잠이 든 것 같았다. 이튿날 비가 그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도랑으로 흘러가던 물이 역류하여 마당을 넘어 정지문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엄마와 같이 바가지로 물을 퍼내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미꾸라지가 꼬물거리는 것을 보기도 했다. 물고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궁금증이 오랫동안 내 생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물 구경을 하러 동네보다 높은 철둑 위로 올라갔다. 누렇게 벼가 익어 있어야 할 들판은 온통 물바다였고 비 갠 후의 맑은 가을 하늘빛에 허옇게 번득거리고 있었다. 농사를 망쳐 걱정하실 아버지의 심정은 알 리도 만무한 그저 철 모르는 아이로서는 특별한 구경거리여서 형들을 따라 고기를 잡으러 물에 잠긴 들판으로 나갔다.

  물밑에 어른거리는 논둑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 길이 넘는 봇도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형들이 잡아준 손에 이끌리어 별일도 아닌 듯 들판을 헤엄쳐 다녔다. 물뱀이 지나쳐도 형들은 작대기로 뱀을 후려쳐 던지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내가 따라오는지 뒤를 힐끔힐끔 돌아볼 뿐이었다.

  물바다가 된 들판이 겁나지 않았던 것은 들판 가운데 있는 봇도랑이 우리들의 멱 감는 놀이터였기 때문이었다. 갈수기를 대비하여 수문을 내려 물을 가둔 그곳은 어른들의 키를 훌쩍 넘겼다. 아이들에게는 몇 길이나 되는 깊은 곳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봇도랑 언덕길을 멀리서 내달려와서는 깊은 물속으로 뛰어내리는 다이빙 놀이도 형들에게서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겁쟁이가 되기 싫어 뛰어들었을 뿐 그것이 생명을 건 위험한 놀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3학년 어느 따뜻한 봄날, 오후반 수업 때였다. 친구 대여섯 명이 함께 학교 가는 길이었다. 별 생각도 없이 ‘학교에 가지 말고 망창산에 놀러 가자’라고 누가 제의를 하자 단번에 의기투합하여 실행에 옮겨졌다.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가 놀고 있는 산으로 형들이 몰려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누구에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혼이 났다. 그렇게 동네 형들마저 아버지처럼 무서운 커뮤니티 속의 나의 존재는 항상 둥지 속의 오리 새끼 같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나를 매섭게 기다리는 사람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열한 살 위인 큰형도 아닌 세 살 위의 둘째 형이었다. 그날의 회초리가 낭창낭창한 가시나무로 생각되는 것은 너무 아팠던 기억 때문이리라. 그다음 날은 선생님께 불려 가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과 주동자가 누구인지 추궁을 받으며 여러 교실을 순회하며 벌을 받았다. 그날 이후 무단결석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근처에 살던 형으로부터 초등학교 동창회 단체 대화방에 초대를 받았다. 운동회 때면 늘 달리기 선수였던 형이었다. 나보다는 두 배쯤 더 빨랐던 그는 나에겐 영웅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동네 형의 문자를 보면서 답글을 올렸다. 내가 댓글을 달면 좋아하는 형들이 여전히 많다. 코흘리개가 도시에 나가 학교를 다니고 방학이면 하얀 얼굴로 나타나던 나를 보고 형들은 늘 대견해했다.

  내가 자랄 때 옆에서 지켜보던 그 형들이 지키고 있는 내 고향, 언제 돌아가도 고향산천은 나를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나의 영웅이었던 형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내 기억 속의 영웅이었던 형들을 떠올리며 내 놀이터였던 들길을 다시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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