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래 Apr 02. 2020

브런치로 요양왔습니다

브런치 초보의 '내 글 구려' 병 극복기


"나 당분간 공채 지원 안 하려고."

"왜?"

"그냥 좀 쉬게."


는 당연히 핑계였다. 휴식은 누구보다 충분히 즐겼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지난해, 몇 번째인지도 헷갈리는 n번째 공채에 탈락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구직 활동 임시 휴업을 선언했다. 구직 활동을 휴업한다는 말이 좀 웃기긴 하지만, 나로서는 구직만큼 기운 빠지는 일도 없었으므로 나름의 '업(業)'이었다. 


정확히는 글 쓰는 일이 기운 빠졌다. 글자수에 맞게 기업의 입맛별로 나를 소개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건지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한 자 한 자 공들여 내가 가진 잠재력과 매력을 어필하고 패기 넘치게 지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냉혹했다. '귀사에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초간 멈칫했지만 애써 웃으며 웹페이지 창을 닫았다. 뭐, 나 같은 인재를 몰라보는 쪽이 잘못이지. 가볍게 셀프 위로를 하면서 밤새도록 '분노의 키보드질'을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지원했던 다른 곳들에서도 함께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안타까우면 뽑아주든가..!) 연이은 문전박대에 약간 위축됐지만, 그때만 해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 후였다. 자기소개서를 180도 갈아엎고, 색다른 방식으로도 써보고, 소제목을 달았다가 뗐다가 별짓을 다 했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딱 두 번, 서류 전형에 합격하고 필기시험을 보러 간 적이 있었지만 역시나 탈락. 그때부터는 합격자 조회를 하는 게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도 반복하면 으레 익숙해지듯이 탈락의 고배도 여러 번 마시면 '그러려니' 하는 상태가 발생한다. 문제는 나의 경우, 그러려니 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툭 치면 쓰러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러려니의 유사어는 '내가 그렇지 뭐' 같은 것이었다.


'내 글 구려' 병에 걸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내 글 구려 병이라 함은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내 글이 구리게 느껴지는 병이다. 이 바이러스는 어디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잠복해있다가 어느 날 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무력화시킨다. 특히 주의해야 할 대상은 글에 대한 자신감이 급격하게 떨어진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나.


바이러스가 찾아온 날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기소개서를 다듬고 있을 때였다. 지원동기와 관련 업무 경험을 수정하던 중 문득 내 글솜씨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형편없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글을 자기소개랍시고 보냈을 수가 있지? 혐오감이 밀려왔다. 순간 머릿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글 진짜 구려...."




글이 구리다고 스스로 인정한 순간부터, 더는 글을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몇 시간 동안 한 글자도 못 쓰고 망부석처럼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며칠 뒤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 아닌 선포를 했다. 나 당분간 공채 지원 안 하려고.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글 쓰는 게 무서워서 그랬다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렇게 나는 글쓰기 파업에 들어갔다. 공채 시즌 무렵 채용 공고가 우수수 뜨는데도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자기소개서뿐 아니라 블로그나 일기장에 자유롭게 쓰던 글도 그만뒀다. 이제는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사실만으로 창피했다. 심지어 그게 나 자신일지라도. 애인에게 기념일마다 꼬박꼬박 쓰던 편지도 같은 이유로 생략했다. 내 글 구려 병은 순조롭게 악화되어갔다.


글이 없는 삶은 자유로웠다. 무언가를 억지로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딘가 허전했다. 문득 이런 복잡한 심경을 글로 적어두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글쓰는 게 싫어서 도망친 주제에 그 이야기를 또 글로 쓸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싶었다.


그러던 중 한때 친했던 친구가 글 관련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 또한 야심차게 준비하려다 내 글 구려 병에 발목잡혀 포기했던 공모전이었다. 상장을 들고 웃고 있는 친구의 사진을 보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싶은데 이상하게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서는 같은 말만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부럽다. 좋겠다. 진짜 좋겠다...


부럽다, 좋겠다. 사실은 여기에 내 모든 속내가 다 담겨있었다. 나는 글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글로 행복을 향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만 그러지 못할까 무서워서 잠시 멈춘 것일 뿐. 그쯤 되니 알았다. 아, 내가 거절당하는 데 신물이 났구나. 나름대로 잘 극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속에서는 잔뜩 곪고 있었구나.


사실 브런치에 첫발을 내디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아무 내용의 글을 아무렇게나 쓰고 싶었다. 나에 대한 소개를 거창하게 늘어놓을 필요 없이, 그저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늘어트릴 수 있는 공간. 잘 쓴 글, 못 쓴 글이 아닌 이런 글, 저런 글로 불리며 각자의 글이 어우러지는 공간. 그런 곳이면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브런치는 글자수가 800자가 넘는다고 내 말을 뚝 잘라버리는 매정한 곳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내 고질적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요양을 와있는 셈이다. 요즘 상태는 어떠냐고? 브런치에 입성한 지 고작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내 글 진짜 구린데 그냥 쓰기로 했어'라는 주제로 아무렇게나 글을 싸지르고 있고, 그에 대한 책임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있으니. 다시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자신이 생길 때까지, 당분간은 이곳에 좀 머물러 볼 생각이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를 슬프게 한 마스크와 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