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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래 Apr 20. 2024

플레이리스트 유튜버 하지 말아요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를 90년대생의 음악 아카이빙

출처 : https://youtu.be/TjI-yHiNNQM?si=Jm4so64oH3ukaKkn
플레이리스트 유튜버 하지 말아요


플레이리스트(이하 플리) 유튜버를 시작하기로 다짐했던 날, 정보를 얻기 위해 유튜브에 '플레이리스트 유튜버'를 검색했다가 가장 먼저 보게 된 영상이었다. 플리 제작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인터넷 '밈'에 빠삭하다면 한번쯤 어디에선가 보았을 수도 있는 영상이다. 


영미권 드라마 장면에 자막을 입힌 이 영상은 한 여성이 "플레이리스트 유튜버 해보려고요" 라고 말하며 시작된다. (사실 이 영상은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여자를 말리는 내용이어서, 실제 대사는 "변호사 해보려고요"다.) 그러자 한 남성이 크게 탄식하며 "최악의 선택"이라며 "유튜브 중 음악 유튜브는 최악"이라고 격렬하게 반대한다. 이어서 흥겨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지 이유'마냥 왜 플리 유튜버를 해서는 안 되는지 다양한 이유를 남성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들려준다.


출처 : https://youtu.be/TjI-yHiNNQM?si=Jm4so64oH3ukaKkn


노래 고르기, 저작권 확인. 매일 같은 작업하는 게 당신이 생각한 유튜브인가요?
아니면 영상을 올리면 저작권 때문에 영상이 블록되고,
또 차단 당하고, 또 삭제 되고, 수익금은 0인게?


영상 속 자막은 플리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운 일인지 설명한다. 실제로 유튜브 특성상 몇시간씩 공들여 영상을 완성해도, 플리에 삽입한 곡 중 일부가 저작권상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면 세상에 공개되기도 전에 차단을 당하고, 설령 무사히 올린다한들 계정의 주인은 수익을 가져갈 수 없다. 한 마디로, 웬만한 봉사정신이 있지 않고서는 쉬이 도전할 수 없는 일이다.


3분 남짓한 영상을 보면서 마음 속에 품어온 꿈 중 한 가지였던 일을 시작조차 않고 다시 버킷리스트 서랍에 넣어두어야하나 고민했지만, 사실 그러기엔 이미 때는 늦었다. 영상 제작 프로그램으로 플리 영상을 만들어보겠답시고 12개월 할부로 쿠팡에서 2020년형 맥북 에어 13인치를 구매한 후였기 때문이다. 플리 유튜브를 시작한다고 하면 도시락이라도 싸와서 뜯어말릴 것 같던 그 남성의 격렬한 춤사위는 결국 나를 설득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매일같이 쏟아지는 노래를 들어보고, 그 중 취향에 맞는 곡을 발견하는 재미를 찾게된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사촌언니가 가입시켜준 소리바다에서 신곡들을 한 곡씩 신중하게 들어보며 어떤 노래를 mp3에 담아야할지 고민하던 것이 시작이었던 것도 같다. 지금은 유튜브 뮤직을 구독하거나 음원 사이트에서 무제한 스트리밍 상품을 구매하면 어떤 노래든 자유롭게 들을 수 있지만, 스마트폰이 없던 당시에는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yepp' mp3에 넣은 노래들만이 내 두 귀를 즐겁게 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달마다 적게는 30곡씩, 많게는 50곡까지 노래를 다운받아 mp3에 넣는 일이 루틴처럼 굳어졌다. '음원 30곡 구매' 상품이 갱신되는 날에는 나만의 작은 청음회가 열리는 날이다.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음원 사이트에 접속해 '최신음악' 카테고리를 클릭한다. 이어 맨 위에 올라온 곡부터 한 곡씩 순차적으로 내려가며 감상한다. 평소 좀 더 관심이 있었던 가수라면 아티스트 이름을 클릭해 수록곡도 전부 들어본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곡들이 눈에 띄면 과감히 다운로드를 누른다. 1곡, 2곡, 5곡, 10곡... 새로운 멜로디들이 mp3의 용량을 채워 간다. (주로 멜론 사이트를 이용했는데, 어릴 때부터 같은 아이디를 사용하다보니 엉겁결에 MVIP가 됐다.)


기껏 다운 받은 노래들이 막상 취향에 맞지 않으면 새로운 곡을 mp3에 담기까지 또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하니 노래를 고르는 기준은 자연스럽게 까다로워졌다. 멜로디 라인이 아쉬워, 싸비가 좀 약한데? 이 작곡가가 만든 노래들은 유난히 좋네. 어떤 노래를 듣고 듣지 않을 취사선택하는 훈련을 반복하다 보니 중학생이 되었을때 쯤엔 나름의 '음악 취향'이 생겼다. 취향은 후에 싸이월드 BGM으로 무자비하게 표출되기 시작하는데, 음악 취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아실현을 이루던 어린 여자애의 작은 성취감은 플리 유튜버를 결심하게 되는 첫 번째 복선이 된다.


'우리 엄마 딸 선정 이번 달에 듣고 싶은 노래 50곡'을 MP3에 고이 넣고, 심경이 바뀔 때마다 싸이월드 BGM도 함께 달라지던 학창시절의 내가 음악과 공연을 사랑하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더 자라서 대학교 교내 방송국 PD로 2년간 아침, 점심, 저녁 음악 방송을 진행할 때는 선곡하는 일에 대해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니 할부가 남은 맥북 때문이 아니어도, "플리 유튜버 하지 말라"고 애처롭게 외치는 영상 남성의 말을 나는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2021년 겨울, 유튜브 계정을 만들었다. 이름은 나의 별명과 '에어팟'을 합쳐 '00팟'으로 매우 단순하게 지었다. yepp mp3에서 흘러나오던 선곡표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을 때처럼 좋은 노래들을 세상과 공유하겠다는 나름의 뜻이 담겼지만, 요새는 좀 더 멋지고 쿨하고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닉네임으로 지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고단한 회사원의 삶과 병행하느라 많은 영상을 올리지 못했지만 계정을 만든지 어언 2년 반 정도가 지났다.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기깔나게 맘에 드는 플리가 저작권 문제로 업로드도 전에 차단되었을 때, 구독자는 부지런히 늘어가지만 통장 잔고는 그대로일 때 나는 자연스레 어떤 노랫말을 떠올렸다.


"플리 유튜버 하지 말아요...

"전혀 무의미한 작업들일 거에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을 걷다가, 자기 전 침대 위에서 음악을 듣다가 가슴에 꽂히는 어떤 노래들을 우연히 발견하면 습관적으로 아이폰 메모장을 열어 가수와 곡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mp3에 가득 채울 서른 개의 노래를 신중하게 고민하던 그때와 같이. 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하루가 노래 한 곡으로 조금 특별해지길 기대하며. 소리바다에서 '아틀란티스 소녀'를 다운받던 그 순간부터 '선곡 노동자'로써의 삶은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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