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등사 대웅전에서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한 강화도는 그 지리적 이점으로 세계 역사에 없을 몽골군에 맞서 항전을 벌인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의 터전이 되어 주었다. 자신의 형과 나이 어린 이복동생을 유배시켜 죽게 한 곳에 자신도 유배되어 처와 자식 내외를 먼저 보내야 했던 광해군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이런 강화도엔 참성단과 단군의 세 아들이 세웠다는 삼랑성이 있으며 성 안쪽에 조선 후기 산성과 사고(실록을 보관하는 장소)를 수호하는 임무를 지닌 "전등사"가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 절은 선조와 광해군 시기 원인 모를 두 번의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 재건하게 되었다.
고려말 불교의 폐해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적개심이 조선조 500 내내 이어졌다는 것은 역사로 알 수 있다. 조선초 새로운 절을 짓지 못하게 하는 억불정책을 시작으로 중종조에 이르러 승려의 도심 출입을 제한하게 된다. 사찰과 스님들은 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렸다. 산천 유람길에 스님들에게 거마꾼 역을 시키는가 하면 사찰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때론 불상을 부수기도 하고 값이 나가는 건 훔쳐가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폐사가 된 곳에는 서원을 세우거나 조상의 묘를 쓰기도 했다.
폐사된 사찰들에서 "절에 빈대가 들끓어서 스님이 불태우고 떠났다는.." 웃지 못할 말들이 전해졌다. 사림들은 절을 불태우고 빈대 핑계로 회피하려 하였다. 옛절 영국사 자리에 도봉서원과 충현사에 영봉 서원.. 등에서 보이듯 사대부들의 횡포는 절을 허물어 그 터에 서원을 짓는 일이 많았으므로 도심 내 사찰들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 해오던 지방 산간의 사찰들 또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버렸다. 전쟁으로 불안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에 대한 사대부와 왕의 서로 다른 고민은 인조반정으로 이어져 30년 뒤 국토가 다시 유린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나라에 빈대가 들끊어 왜구와 오랑캐가 불태우고 떠난 격이다.
소실된 건축물들의 복구 과정에서 전등사와 같이 크지 않은 사찰들은 공통점을 보인다. 마당을 중심으로 불전과 누각을 일직선 상에 놓이게 하고 좌우에 요사채(승려들의 거처)나 강당을 두는 새로운 배치 형태를(b) 보이게 된다. 누각은 삼국과 고려 시기를 거쳐 조선에 향교와 서원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건축물을 뭉뚱그려 "정자"로 표현한다. 맞다! 산사에서는 불전 마당의 대용과 휴식공간으로 유학의 관점에서는 풍류와 자연과의 (병산서원 만대루) 어우러짐으로 사용되었다.
특이한 것은 산사의 1층 누각의 기둥 높이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인데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산을 절개해 마당과의 높이를 맞추다 보니(a) 낮아지게 된 점과 정도전의 "불씨잡변"이란 책에서 부처의 말을 잡소리라 표현한 것처럼 (타락한 승려들이 하는 소리를 두고 한말) 사대부의 눈에는 불교가 눈에 때 만도 못한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다. 그들에겐 "갓"이란 모자가 있고 누각 밑을 지나려면 갓을 벗거나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어찌 되었든 부처님께 인사는 하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것도 목례 정도가 아닌 긴 인사로...
과거 마당 양옆으로 건물이 있어 "ㅁ" 집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사면을 건물로 두른 배치는 시선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얻기 좋은 구조로 되어있다. 누각 밑을 지나(c) 계단을 오르면 자연스레 부처님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어 있다. 얕은 어둠 속 대웅전 안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부처님과 마주치는 느낌은 어땠을까? 지금 그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불국사의 "구품 연지" 자리에 마당을 놓은 것처럼 적묵당 건물을 옮기고 강설당의 위치를 바뀌 놓았다. 일부러 그러지는 안았으리라..
전등사에는 알려지지 않은 유물들이 많다. 희소성의 가치도 있겠지만 사람의 때가 묻어 있는 그런 물건들이 많다. 생각해보면 전등사만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찾아보면 1000년이 넘은 세월의 때가 묻어 있는 곳은 많으니까 전등사 대웅전 추녀에는 마음 아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벌거벗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추녀를 힘겹게 떠받히는 조각상이 있다. 도편수와 사랑에 빠진 주모로 도편수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여인에게 무거운 추녀를 받들게 하였다는 전설이다. 현실에서는 이뤄지지는 않지만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마음의 무게로 짊어져야 하는 주모는 어떠했을까? 그 주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남녀 사이에 일은 알 수 없지만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또 다른 얘기로 추녀를 짊어지고 있는 주인공이 야차 또는 원숭이를 조각한 것이란 이야기들이 있다. 누가 주인공이 되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겠지만 둘 다 힌두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중에서도 "야차"는 인도의 토속 신으로 놀라게 한다는 의미이며 사람을 잡아먹는 사악한 귀신으로 알려졌다. 사천왕이 힌두교에서 귀신들의 왕이지만 불교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네 개 방위의 수호신인 것처럼 야차 또한 같은 의미로 표현된다. 대표적인 것은 석굴암에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명의 수호 신중 하나로 조각되어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사면을 지키는 야차의 손동작과 자리 잡은 위치 그리고 표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웅전 전면에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의 야차는 두 손을 들고 추녀를 받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잘 안 가는 후면의 야차들은 한쪽 팔을 내리고 꾀를 쓰고 있다. 그것도 바깥쪽으로 팔을 들고 안으로 팔을 내려 들키지 않게 표현되었는데 대웅전을 만든 목수들의 얄궂은 장난과도 같은 재미를 안겨준다. 이렇듯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겠지만 우리 문화는 사람의 때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갖는다.
대부분의 기와는 처음 붙이는 기와는 못을 박아 고정시키고 다음장에 맞물리게 하여 못을 가려 주는데 대웅전에 쓴 기와는 노출되어 있어"연봉"이라는 자기 뚜껑을 사용하여 마감하였다. 용도는 노출된 못의 부식을 막고 지붕의 장식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개심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수타사 대적광전..
이런 장식들은 하나를 부각하면 하나를 감추기 위한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건물이나 전면과 측면의 길이가 서로 다르다. 그래서 "포" 구성에 있어 신경이 많이 쓰인다. 자세히 보면 기둥 위 포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신빙성은 없지만 아마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에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프랑스군과 격전을 앞둔 이들이 기둥에 적어 놓은 이름들 ... 이들은 누구였을까? 글자를 모르는 이들은 ?
삼랑성은 병인양요의 격전지중 한 곳이다. 이곳은 조선의 실록을 관리하는 전등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병인양요는 천주교 신자 8,000여 명과 프랑스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항하여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결국 승리는 했다. 어느 백과사전에 이 전쟁의 의의 대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라 적어 놓았다.
이런 얘기는 던져 버리자
결과적으로 이 일로 쇄국정책은 더 강화되고 우리는 세계 경쟁에서 밀려 아픈 역사를 격게 되었다.
그리고 기둥에 새겨진 외로운 이름들을 헛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