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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May 11. 2024

13.전 부야베스에 소비뇽블랑만 먹어요.

<사실, 이건 부를 상징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멘트>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북한에 떨어진 여자주인공 '세리'가 부를 상징하는 상황에 저 멘트를 내뱉는다. 세 입 공주(늘 먹을 것이 풍족해 세입 이상 안 먹는다는 것)와 더불어 까다로운 상류층 취향을 상징하기 위한 대사였다.


하지만 난 저 대사를 듣는 순간, 엥? 부유하다며 왜 소비뇽블랑을 즐겨 마시는 것을 자랑하듯 강조할까?


물론 재벌도 라면을 좋아할 수 있고, 소주를 즐겨마실 수 있다. 하지만 저 대사를 말하는 장면은 여주가 '난 남한에서 좀 잘 살던 여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상황이었다.


나의 의아함이 생긴 이유는, 사실 소비뇽블랑(줄여서 소블)이 그렇게까지 고급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싼 소블과 저가의 소블의 맛이나 가격의 편차가(물론 있긴 하지만) 어마무시하게 많이 나는 편도 아니다.

저가의 소블은 물이나 탄산수 마시듯 가볍게 먹을 수 있다. 여름에 물대신 아주 잘 어울리며??? 한낮에도 가볍게 마시기 좋다...(??) 

나름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품종의 와인이다.


술을 전혀 모르는 여성 직장 동료들과 와인을 마시러 가서, 내가 고른 '소블'을 먹고 맛이 없다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 정도로 대중적인 맛이다. 심지어 어떤 술이냐며 이름까지 적어갈 정도로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기 쉬운 와인이다. 식사 후 팀원들과 단체로 와인 쇼핑을 가서 그날따라 할인을 하고 있는 소비뇽블랑을 다 같이 구매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는 왜 하고많은 술 중에 소비뇽블랑을 선택했을까?


1. 첫 번째 가설.

고급술로 샴페인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친숙하여 대명사 느낌이다.

특별한 취향을 가진 상위 0.1%라는 것을 강조하기에는 너무 흔해빠진 술이름이라 오히려 고급보다는 축하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극 중 흐름에서 강조되기 어려운 품종이다.(사실 흔한 이름에 비해 샴페인은 고급 중 고급으로 흔하게 막 먹기는 힘든 술이다.)

소비뇽블랑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 새로운 이름에 대체 어떤 술이길래? 귀를 기울이게 되고 역시 상류층의 까다로운 취향이겠구나 대충 얼버무려 이해하기 좋다.

샴페인이란 술명칭은 일상에서 너무나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어떤 감정의 질감을 담아내기 오히려 부적합하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샴페인 세례라는 말과 함께 "샴페인 터트려야겠다."라고 관용적 표현으로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급술을 상징하고 싶었다면 샴페인이라고 써야 했지만, 이 평범한 표현에 오히려 정확한 스토리의 뉘앙스를 담아내기는 어려웠을 터. 샴페인엔 축하의 이미지만 남아있고 어떻게 고급술이 되었는지 세부 정보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실제 주변에서 샴페인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샴페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지만 샴페인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라고 해두자.


정확하게는 상파뉴 지역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보통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발포성의 화이트 와인을 모두 샴페인으로 부르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샴페인은 스파클링 와인의 범주 안의 아주 작은 카테코리로, 상파뉴지역에서 생산되는 기포 와인만을 지칭한다. 상파뉴지역의 스파클링 와인이 품질과 맛이 좋고 유명하기에 다른 나라에서 발포 와인을 샴페인이라고 잘못 쓰기도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상파뉴 지역 외의 와인은 모두 스파클링 와인으로 불러야 하며, 유럽 다른 국가는 이 발포성 화이트 와인을 부르는 명칭이 다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상파뉴 외의 스파클링 와인을 크레망이라고 부르며, 이태리는 스푸만테 / 스페인은 까바 / 독일은 젝트. 미국 및 뉴질랜드처럼 신대륙은 별도의 이름 없이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정직하게 부르고 있다..


프랑스의 모든 스파클링 와인은 샴페인이다? 

위에서 말했듯 상파뉴지역 외 스파클링 와인에 샴페인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불법이다.(와인의 품질을 위해, 엄격하게 지역에 따르는 명칭을 제한하고 있음)


참고로 '드라마에서 차용한 고급취향을 대변한 단어가 왜 샴페인이 아니냐는 설명'으로 발포성 와인에 대해 길게 얘기했다. 그러나 이때쯤 소비뇽 블랑을 발포성 와인으로 오해할까 봐 한번 정리하고 가자면, 소블은 그냥 화이트 와인이다.

보르도지역에서 유래한 청포도로 만든, 시원하게 칠링 해서 먹으면 맛있는 기포 없는 백포도주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 항상 강조와 비유를 위해 반대 사례를 들면 학생들은 거꾸로 이해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마무리로 오해를 정정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림. 만약 이것이 수업이었는데, 졸다가 깨어난 학생이 "우리 교수님이 분명 수업시간에 소비뇽블랑은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했어. 샴페인 예시까지 들었다니까." 라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상황도 많았다. ㅠㅠ 자! 마무리, 소비뇽블랑은 기포 없는 화이트 와인입니다!!)



2. 두 번째 가설.

위에서 밝혔듯 소블은 저렴한 축에 속하는 와인이다. 맛도 대중적이다.

재벌인척 했지만 사실은 대중적인 맛과 취향을 가진 부분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허세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여주 세리가 피아니스트 남주 앞에서 자신도 피아노 전문가라며 허세를 부리는 장면도 있다.

또한 부야베스 역시 과거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에서 어부들이 팔다 남은 생선으로 끓인 해산물찌개로 지극히 서민적인 메뉴에서 시작되었다.

현대에 와서 잘 모르는 품종의 와인과 낯선 프랑스 요리라는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알고 보면 서민적인 것들이라는 것이 세리의 삶과 닮아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싶다. 다 가졌지만, 서자출신(배다른 어머니를 가진 출생의 비밀)에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친구도 가족도 외면한 텅 빈 삶처럼.

겉으로 좋아 보이지만 그 근원을 내려가보면 평범 이하로 스스로 사랑할 줄 몰랐던 인생. 겉보기에 멋져 보이는 삶을 속까지 들여다보면 사실은 별달리 대단할 것도 없는 상황을 위해 소블을 비유해서 언급했던 걸까?라고 혼자 추측해 봤다.

보통 드라마 작가들이 글을 쓰며 많은 레퍼런스를 수집하고 리서치를 거듭하기 때문에 이 소비뇽블랑 대사도 이런 아이러니를 표현하고자 하는 극적 장치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를 보며, 점점 더워지는 요즘 날씨에 소비뇽블랑이 점점 당기는 계절이 됐다고 생각한다.

땀이 많이 나고 더울 때 시원하게 칠링 된 소블 한잔이면, 하루를 깔끔하고 부담 없이 마무리하기 딱 좋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와인은 샴페인이다. 다만 가격이 높기 때문에 집에서 수시로 쉽게 마시지는 못하고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좋은 음식과 먹기 좋다. 늘 샴페인 한 병은 참으로 모자라다.

그래서 술 잘 못 먹는 남편이 한두 잔만 먹고 말 때, 나 혼자 남은 한 병을 다 마실 수 있어서 속으로 너무너무 행복하다.


샴페인은 아무래도 집에서 혼술 하기는 아까운 술이다.

집에서 혼술 하기에 만만한 술은 뭐니 뭐니 해도 소블이지~~~~ 안주나 요리 없이 술만 마셔도 참으로 가볍고 맛있는 술이다.

소비뇽블랑은 가격도 싸고 (물론 그 중 비싼 것도 있지만) 소주처럼 막 마시기 좋다. (물론 소주보단 비싸지만)


호캉스를 할 때 보통 이그제큐티브 라운지에 가면 와인이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다. 

레드 / 화이트 / 스파클링와인.

그중에 레드나 스파클링 종류는 너무 저렴한 것(혹은 내 취향에 안 맞는 것)이 나올 경우 맛이 없어서 잘 먹지 않게 되는데, 화이트 와인에서 소비뇽블랑이 나오는 경우는 아무리 저렴한 것이라도 대체로 실패할 일이 없다.

그날은 내가 만취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다. 공짜라고 자꾸 퍼먹다 보면 보통의 정량인 와인 1병을 훌쩍 넘게 되고, 입가심으로 맥주까지 한잔 마시면 호텔방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안 날 때도 있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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