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코스타의 <호스머니>, 왕빙의 <맨 인 블랙>
육체는 언어가 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해, 벵베니스트의 말을 빌려보자면, 육체는 “인간의 정신생활과 문화(사회) 생활이 서로 만나 교호 작용을 하는 곳이자 그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육체는 현실을 기호로써 표상하여 의미작용을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해당 문제의식의 연장선 상에 있는 맥락에서 두 개의 작품,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머니, 2014>와 왕빙의 <맨 인 블랙, 2023>을 주목하고 싶다.
이 두 개의 작품은 감독이 서로 친하다는 사실 외에도 깊숙하게 겹쳐진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작품 속에서 역사의 빗물 속에서 스러진 영혼의 상처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호스머니>에서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카보베르데에서 온 이민노동자인 ‘벤투라’가 카네이션 혁명을 비롯한 현대사에서 받은 상처의 기억을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 위에서 재조립하고 있다. <맨 인 블랙>에서는 문화대혁명에 휩쓸린 자신의 동료와 스승의 처형을 지켜보고 반동분자로 몰려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한 작곡가, ‘왕시린’의 상처 입은 영혼이 카메라 앞에서 증언된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대사와 음악을 통해 관객에게 드러나게 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누는 벤투라와 군인의 대화, 왕시린의 증언과 연주 등이 그 예시이다. 하지만, 대사와 음악 외에 육체를 통해서도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의 육체에는 과거의 상처가 새겨져 있으며, 카메라는 이를 포착하고 있다. 말하자면, 페드로 코스타와 왕빙은 그들의 상처 입은 영혼을 카메라 앞으로 ‘호출’하고 있고, 그들의 육체는 그 부름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벤투라와 왕시린의 육체가 ‘어디서’, ‘무엇’이 찍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의 육체는 지하로 향한다. <호스 머니> 속 벤투라는 어두운 지하를 계속해서 내려간다. <맨 인 블랙>의 왕시린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그리고는 어느 장소에 도착하게 되고, 비로소 그들의 회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
벤투라는 병원처럼 보이는 공간에 도착한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보이고, 벤투라도 환자복을 입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벤투라의 탈출시도가 번번이 실패하기 때문에 쇠창살이 있는 감옥처럼 보이기도 한다. 왕시린은 피아노가 놓여 있는 어느 한 어두운 공연장에 도착한다. 암전된 공연장에서 한줄기의 조명만이 무대를 비추고 있다.
그들이 도착한 공간은 마치 현실과 이격된 공간처럼 보인다. <호스머니>에서는 등장하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이 혼재되어 있다. 늙은 몸의 벤투라가 의사에게 자기가 19살이라며 오늘이 “1975년 3월 11일”이라고 답하는 장면은 더더욱 이 공간을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맨 인 블랙>에서는 왕시린 혼자서 어두운 무대에 위치하는데, 마치 유령이 배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그의 나체가 주는 시각 이미지는 그 무대가 주는 비현실성을 증폭시킨다. 따라서, 벤투라와 왕시린이 도착한 이 기이하고도 낯선 공간은 “지하, 어둠, 비(非) 현실”로 묶일 수 있다.
지하는 인물의 무의식의 심연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벤투라와 왕심린이 지하로 내려간다는 것은, 자신의 상처로 뒤덮인 기억을 꺼내기 위해서 무의식의 심연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벤투라와 왕시린은 과거의 기억을 꺼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지하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하, 어둠, 비(非) 현실’과 반대되는 ‘지상, 빛, 현실’ 속에서는 개인의 내밀한 상처를 내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작품에서 육체의 시각 이미지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물며, <맨 인 블랙>에서는 왕시린은 영화 내내 나체로 등장한다. 이는 자신의 상처를 가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메타포의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육체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카메라는 그의 육체를 중심으로 나선으로 돌면서 그의 울퉁불퉁한 피부, 구부정한 허리, 절뚝거리는 걸음을 담아낸다. 마치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그 육체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 절정은 왕시린의 ‘제트기 자세’이다.
군중들 앞에서 모멸감을 주기 위해 ‘개발’된 제트기 자세는 문화대혁명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왕시린 또한 반동분자로 몰려 군중들 앞에서 제트기 자세를 취하면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는 어두운 무대 위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이 겪어야 했던 비참함을 증언한다. 왕시린은 목에 ‘반혁명분자’라는 팻말을 걸고 결박당한 채, 홍위병들이 타고 있는 마차 뒤를 계속해서 걸어야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구타를 당하여 치아를 모두 잃게 된다.
왕시린은 어두운 무대 위에서 늙어버린 몸으로 제트기 자세를 재현하면서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다시금 현재로 불러온다. 하지만 번번이 바닥에 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제트기 자세를 취하려고 한다. 그 지난한 노력은 과거의 기억이 지니고 있는 상처의 회상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어려움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벤투라는 어떨까. 그의 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긴 롱테이크, 움직이지 않는 픽스샷들이 대부분인 <호스머니>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운동하고 있는 것은 벤투라의 손이다. 잘못 처방받은 약 때문에 벤투라의 손이 떨리고 있다고는 설정되지만, <비탈리나 바렐라>에서 사제로 나오는 벤투라가 그 떨림을 멈추지 않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의 손은 보다 더 심층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극단적인 어둠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할 수 있는 페드로 코스타의 미장센처럼, 벤투라의 떨리는 손은 정중동(靜中動)의 흐름 속에서 발견되는 희미한 운동이다. 그의 손은 마치 카메라를 향해 그 비가시적인 고통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알리려고 하는 듯 그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페드로 코스타는 전통적인 영화 산업 한가운데에 있는 감독이었지만, <반다의 방> 이후 영화제작 방식을 완전히 바꾼다. 그는 소규모의 인원만으로 디지털카메라로 포르투갈의 소외된 사람들을 찍기 시작한다. 그의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둘 다 해당되기도 한다. 왕빙은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 이면에 위치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쫓아다니며 자신의 디지털카메라에 담는다. 그는 정신병원에 가기도 하고(<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강제노동수용소에 부역한 사람들을 찍기 위해 고비 사막(<사령혼>)으로 가기도 한다. 그로 인해 왕빙은 (다소 복잡한 문제로 인해) 중국이 아닌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
그들이 이러한 영화를 찍는 이유로는 한 가지만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지금은 다소 빛바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영화의 윤리성’이 바로 그것이다. 개인의 영혼에 벌어진 상처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 그러나 그로 인해 영화라는 공간에 그들을 위한 공간이 생기는 것. 디디-위베르만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인 힘은 잔존 개념을 통해 분명하게 설명된다. 인물들의 생존이 위태로워도 기호나 이미지는 잔존하는 것”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