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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18. 2023

너 진지충이야?

진지충의 변명

"너 진지충이야?"

무엇 때문에 동급생이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순간 당황하여 제대로 대꾸하지 못한 내 모습만큼은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당시에 말 한마디 못한 것을 무척 분해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과거의 동급생에게 시원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맞아, 난 진지한 사람이야.'

라는 식으로 대범하게 말이다.

'그래도 진지충이라니. 사람을 그렇게 깎아내릴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너는 경박한 사람이니?'

라고 덧붙이고 싶은 건 동급생이 던진 말 한마디를 아직까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좀생이라서가 아니다. 그냥 나란 남자가 몹시 섬세하기 때문이라 하고 넘어가줬으면 한다.


당시 동급생에게 진지충이란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진지하게 생각했다. 

'한 번뿐인 인생 당연히 진지하게 살아야지. 진지하게 사는 게 벌레 같다고 비하당할 일이야?'

당연히 비하당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급생이 내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은 이해한다. 매사에 진지하기만 한 사람은 어딘가 미숙하고 촌스러워 보인다. 지나치게 자포자기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자기 삶이 소중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다들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단 이야기다. 한껏 심각하게 인상을 잔뜩 쓰고 다니는 건 '나는 특히 참되고 착실하게 삽니다.'라고 뽐내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 모습이 누군가에겐 좀 아니꼽게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진지충이라 불리는 '지나치게 무게 잡고 사는 사람'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그저 자기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 서투른 것뿐이다. 사랑 고백이 항상 그럴듯한 정장과 꽃다발이 있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투른 사랑꾼이랄까.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에 황정민은 무게 잡고 사는 사람과는 정 반대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또한 서투른 사랑꾼이다. 한혜진에게 미숙하고 촌스럽게 사랑한다고 다가가려 한다. 영화를 보면 그의 모습이 밉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응원하고 싶어 진다. 아마 영화를 본 대부분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게 서투른 '지나치게 무게 잡는 사람'을 응원하는 시선으로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황정민은 앞산에 가자고 말하는 한혜진 말에 싫다고 한다. 말은 그렇게 하고선 무심한 듯 목도리를 챙겨주고 산에 안 갈 거냐고 터덜터덜 앞장을 선다. 그러다 갑자기 부욱 방귀를 뀌는데 쓱 뒤돌아보더니 씩 웃으며 말한다. "사랑해 x발." 

그가 하는 사랑 고백에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기긴 하지만 경박하진 않다. 그 말에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일 거다. 그와 반대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가 한 사랑 고백을 좀 배워보고 싶다. 가벼움 속에 진실함을 담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진지충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진지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 진지하게 이런 글을 적고 있는 점이 좀 구제불능처럼 여겨지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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