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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Aug 30. 2024

소낙비 내리고

뚝뚝, 빗방울일까 싶어 손을 내미는 사이 소낙비 쏟아졌다. 늘어질 대로 늘어져 지쳐가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활기를 되찾는다. 그 시원함에 쓰고 있던 양산은 급히 용도를 탈바꿈하고 하안거라도 들어선 듯 고요하던 산중이, 목탁 두들기듯 쏟아지는 빗소리에 나직이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산책로에 자리한 정자로 들어선다. 잠시 내리는 비에 묻혀가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연일 기록을 경신해 가며 무더웠던 날이니 소낙비가 가져다주는 시원함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반가운 일 아닐 수 없었다. 꺼져 가는 더위가 뽀얗게 수증기를 피어 올린다. 흐려지는 시야다.    

 

유난스레 비를 좋아했다. 특히 여름날 쏟아지는 소낙비는 똥강아지 마냥 마음을 뛰놀게 하였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날,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낙비는 주변의 비틀어진 시선도 집어삼키며 흠뻑, 빗속으로 나를 빠져들게 해 주었다. 빗속으로 걸어 든 내가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아마 한 번쯤 쏟아지는 빗속에 자신을 내주었던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 기쁨을 함께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풀어헤치듯 신고 있던 운동화 끈을 풀어 가방에 집어넣는다. 쉬이 멈출 것 같지 않은 비에 양산을 펼쳐 들고 정자를 벗어났다. 세차게,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듯 빗방울이 양산을 두들긴다. 덩달아 첨벙첨벙, 반주를 맞추듯 지나는 웅덩이마다 나도 모르게 튀어 오르는 발길질이다. 웅덩이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재미없을 산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면 제각각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 첨벙첨벙 웅덩이에 발을 담가가며 새롭게 살아가는 날들에 힘을 보태지 않았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흠칫, 누군가 부르는 듯 소리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외로움이었나 보다. 비바람에 춤추는 초록의 손짓이, 목마름을 벗어난 춤사위가 아름답다. 그러고 보면 참 많이도 닮았다. 아픔을 게워내고 그리움만 끌어안는 추억처럼, 사람도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부하지 못할 닮음이다.     


문득, 내 삶의 길엔 얼마만큼의 웅덩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살다 보면 피하지 못할 몇 개의 웅덩이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웅덩이는 내 어리석음으로 인해 파헤쳐진, 구덩이가 아니었을까? 판단되는 것이다. 어찌 됐든 웅덩이든 구덩이든, 결국 지나는 비 잠시 고여가는 내 삶에 파임이 분명하였을 것이다.     


산길을 벗어나자 거짓말 같이, 아이의 울음처럼 딱 그치는 소낙비다. 맑은 하늘이 시치미를 뚝 떼고 고개를 내민다. 말갛게 씻은 건물들이 물웅덩이마다 몸뚱이를 들이밀고 으스댔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난, 해님처럼 방긋 웃음 짓는다.     


눈에 보이는 이런 시간이 참 좋았다. 내가 고요해져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마음에도 해가 비춰 든다. 하루가 입안의 사탕처럼 녹아들고 있다. 이런 날이 있어 또 살아가는 날들이 기대가 되는 거겠지, 이래서? 주절주절 뒤따르는 기쁨이다. 하긴 인생도 이와 같아 소낙비 쏟아진 날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마는, 그래도, 후회의 연속인 삶이 분명함에도 또 그 순간으로선 최선을 다해왔던 삶이었기에 오늘 이리 평안함으로 가슴 가득 차오를 수 있지 않을까? 마음 다독여 준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비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비가 내리면 하나밖에 없던 우산은 당연히 오빠의 차지가 됐고 우산 없던 난, 발이 묶여 우두커니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거나 뒹굴다 잠드는 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하물며 하교 길에 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마중 올 리 없던 나는 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갔던 어린 시절이다. 

    

아마도 서서히, 그렇게 비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내보이기 싫은 그 길이,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던 그 길이, 차츰차츰 쾌감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그러다 은근히 소낙비 쏟아지는 날을 기다리는 나를 만났던 것이다. 산 넘고 또 넘을 만하면 쏟아졌던 인생의 소낙비도 그렇지 않았을까 한다. 견디다, 견뎌낼 만 해져 차츰차츰 넘어왔던 인생의 고비인 것이다.     


바보, 똥개, 멍청이, 때때로 시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오는, 후회스러운 기억들에게 쏟아 붙는 나의 언어다. 어쩌면 남은 오늘도 언젠가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수면 위의 일상은 언제나 잔잔해 보여도 심해 속엔 처치 못한 괴물 한 마리 아직 꿈틀거리고 있다. 그래도 어쩐다. 멈춰지지 않는 웃음이다. 오늘 난 내리는 소낙비에 모처럼 춤추는 자유로운 영혼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순간도 허투루 벌어지는 일이 없다. 꼭 짜인 틀처럼 가 닿는 인연이다. 소낙비가 필요할 만큼 오늘 난, 시들었을 것이다.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음이다. 혹여, 로켓포에 얻어맞은 듯 웅덩이 움푹 파여도 다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아! 왜 갑자기 개미가 궁금해질까? 그 많던 개미들은 다 어디로 숨어들었던 것일까?

내일은 개미처럼 짠 나타나 인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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