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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망 Nov 19. 2023

D-10

카운트다운 시이작!


열흘만 버티자! 열흘만 버티면 된다.




지금 근무하는 직장의 면접을 보고 안 될 거라 100% 확신했을 때였다. 전 직장 상사는 그전부터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낀 방학에 휴가를 붙여서 쓸 거면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고 나는 한국에 갈 예정이라고 이야기해 놓았었다.


긴 출장을 다녀와 녹초가 된 상태로 면접을 본 데다 한 시간 걸린다던 면접이 30분으로 끝나고 이력서에 추천인 연락처도 적지 않았는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묻지도 않아서 끝나자마자 안 됐구나 생각했다. 면접을 마치고 30분 안에 제출해야 하는 에세이가 주어졌기에 부랴부랴 써서 첨부파일로 붙인 이메일에 '같이 일할 수 없다 해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마음은 일찌감치 접었지만 너무나 작아진 스스로가 서글펐다.


그래서 무언가가 필요했다. 정신을 분산시킬 무언가가.

곧 직장에서 직원 복지 차원으로 제공하는 심리 상담을 신청했고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렇게라도 버텨야 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받아 본 심리 상담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안구운동 민감소실 재처리 요법(EMDR: Eye Movement Desensitization Reprocessiong)을 두 번 정도 받았는데, 두 번으로는 충분치 않다지만 그래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EMDR은 보통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데 쓴다고 한다. 말 그대로 안구운동을 하면서 민감한 기억을 꺼내어 다시 처리하는 치료다. 우리가 REM 수면에 빠지면 눈이 빠르게 움직이고 그때 뇌는 기억들을 정리해 처리하게 된단다. EMDR 요법은 눈으로 빛을 따라가며 뇌를 REM 수면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 힘들었던 기억을 재구성하는 거라고, 나와 상담했던 상담사는 말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심리학자 프란신 샤피로(Francine Shapiro) 박사가 산책 중 눈을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마음이 편해진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치료법이란다.


이 치료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을 꺼내놓는 것이 첫 단계인데 여기서 버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내 목적은 자존감이 바닥을 쳐서 생긴 우울감을 견디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담사가 짚어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생각하고 마음 한편에 잘 접어두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일이었다. 상담사의 질문에 이끌려 가닿은 곳에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원망하고 후회했던 사건이 있었다. 오열하며 시작했던 치료는 다행히도 담담하게 끝이 났다.


그 와중에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했던 면접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알고 보니 지금 직장은 면접 때 추천인에게 연락해도 괜찮냐고 묻지 않고 모든 것이 전산으로 처리되는 곳이었다. 안 됐다고 혼자 비참해져 우울해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미 5주간의 한국행을 계획했기에 새 직장 상사에게 동의를 구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렇게 새 직장에 들어가 일한 지 딱 2개월이 되었다. 십 년 가까이 일해왔던 대학과는 분위기도, 일하는 방식도, 사람들도 다르지만 배울 것도 많고 적응할 것도 많아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언제나처럼 혼자 겉도는 기분이 조금 들었고, 전 직장이, 동료들이 그리웠고, 한국으로 갈 날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한국행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엄마는 이번 주에 김장을 한다고 한다. 한 주만 미뤄서 같이 하자고 해도 절대 안 된단다. 엄마 고집은 못 꺾는다. 이번엔 남편이랑 같이 가게 되어 그다지 자유롭진 않겠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와 여행도 가고 입김 호호 불며 불이 환히 켜진 크리스마스 장식을 볼 생각을 하니 설렌다.


한국 가면 먹고 싶은 걸 생각 중이다. 언제나 떠나고 나면 못 먹어 아쉬운 게 있지만 그래도 이번엔 꼭 다 먹고 오리라 다짐하며.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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