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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큰 그릇 Jul 22.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했다.


17세, 고졸검정고시 출신


 먼저 내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바로 고졸 검정고시를 봤다. 집의 보증 빚 때문에 학비를 낼 수 없었고, 당장 일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빚을 갚을 방법을 궁리하다, 다음 신용불량자 카페에 가입했다. 어른들 사이에서 17살짜리가 부모님 빚 때문에 나왔다고 하니 다들 측은해했다. 당시 법무사를 선임할 돈조차 없어서 직접 서류를 준비했고, 엄마는 파산을 할 수 있었다.


 18살엔 갓 전문대를 졸업한 언니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38만 원짜리, 신림동 반지하 원룸이 최선이었다. 엄마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아는 분의 소개로 대구에 있는 한 절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헤어지기로 했다. 3평 남짓한 공간에 언니와 함께 누우면 집안이 가득 찼다. 온 집안이 습해서 벽지가 곰팡이로 뒤덮였으며, 나도 어루러기라는 곰팡이성 피부병을 앓았다. 참으로 축축하고 암담했던 시간이었다.


 신용불량자 모임에서 만난 분께 소개를 받아서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보험 영업직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영업사원들이 계약을 따오면 증권과 함께 회사소개서를 첨부해서 고객 제출용 파일을 만들었다. 그 외에는 은행 심부름을 하거나, 커피를 타거나, 회의실을 준비하거나 하는 허드렛일을 했다. 바쁘지 않은 날들이 계속되었고, 월 80만 원을 겨우 받으며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도서관에서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책을 읽었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가서 돈을   있다고? 돈을 벌면서 공부도 하고 여행도   있다고? 그렇게 관련된 책을    찾아 읽고 나는 가슴속에 '호주'라는 꿈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당장 돈이 없었다. 가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항공권이나 초기 체류비 등의 경비가 필요했다.

 

 당시 나는 보험회사에서  80 원을 받았는데, 생활비를 제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추가적인 부수입이 필요하단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하나  늘렸다. 육회집 서빙이었다. 그렇게 아침에는 회사에 가고, 저녁에는 가게에서 일을 하며  개월을 보냈다. 힘들지만 힘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하고 싶은  생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영어공부를 했다. 학원에  돈이 없어서 펜팔 친구들을 사귀었다. 다행히도 영어실력이  늘었다. 그리고 500 원이 모였을  호주향 비행기표를 샀다.  나이 스물 하나였다.


 1년 간 호주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중학교 졸업 무렵부터 쉬지 않고 일을 해왔기 때문에 초기에는 어학원을 다니며 친구들을 사귀고 여행을 다녔다. 돈이 떨어질 무렵 사막에 있는 한 호텔에서 일했고, 주에 많게는 100만 원에서 적게는 50만 원씩 벌었다. 쓸 곳이 없어 돈도 모을 수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로웠지만 동시에 자유롭다고 느꼈다.





첫 회사에 취직하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엄마의 집으로 들어왔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면서 1년을 허송세월 했다. 하루 일과는 영어공부와 아르바이트가 다였다. 그리고 일을 하기 위해 언니가 있는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와서는 매일 술을 마셨다. 막연한 미래가 너무 무서웠다. 고졸 검정고시 출신에 배운 것도 없었고, 대학도 다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다. 이 시기에는 끊임없이 무얼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정답을 내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먹고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프랜차이즈 카페였는데 알바로 시작해서 부점장까지 갔다. 내 나이 24살이었다. 사장은 출근을 하지 않아서 매장의 모든 관리는 내 몫이었다. 발주나 아르바이트생 관리와 매장의 매출까지도 신경 써야 했다. 겨우 월급 150만 원을 받았지만 내 매장처럼 일을 했다.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항상 외로웠다. 내 또래의 아르바이트생들은 방학이 끝나면 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2년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곳을 거쳐 다른 곳으로 떠났다.


 나도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학자금 대출을 빌리더라도 알바를 하지 않으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학점은행제로 학사를 준비하고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다. 이게 나의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 일할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가야겠단 결심이 섰다.


 아침에 매장을 오픈하고 손님들이 오기 전까지 토익 문제를 풀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도 공부를 했다. 엉성한 이력서지만 이곳저곳에 지원을 했다.  다행히 오라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 규모가 가장 컸던(그래 봤자 직원이 15명뿐이었지만) 곳으로 입사를 했다. 내 나이 27살이었다. 초봉은 퇴직금을 포함해서 2천만 원이었다. 월 140만 원을 받아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쓰면 남는 게 없었지만 회사를 다닌다는 것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족회사였던 그곳에서 본부장은 사장의 아들이었는데, 가끔 폭언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도 못 나온 애'라는 말도 들었다. 퇴사 후 몇 년이 지나고 잡플래닛으로 검색을 해보니, 어떤 직원한테는 가난하고 돈 없는 애를 뽑아야 충성하고 일한다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 사람들에게 나는 결국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그만두지 못하는 직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은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이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1년 뒤 퇴사를 했다. 한 달 동안 쉬면서 여행을 다녔다. 다시 취업을 준비할 때쯤 무슨 용기였는지 대기업 하반기 공채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이었다. 자소서를 잘 쓰면 뽑아주겠지란 생각에 자소서만 주야장천 썼다. 그러나 당연히 나는 서류에서 필터링되었다.


 다른 루트를 찾아봐야겠단 생각에 들어간 것은 대기업 계약직이었다. 왜 이렇게 대기업에 집착했는가? 체계를 배우고 싶어서였다. 가족회사를 다니다 보니 가장 배우고 싶었던 것은 체계였다. 그 단순한 마음에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었다.



대기업이 뭐길래


 그렇게 들어간 계약직 자리에선 스스로 열등감을 느꼈다. 세상엔 나 빼고 다 잘난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


 일도 많았다.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1시가 돼서야 퇴근했다.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서 방광염을 달고 살았고, 생리가 샌 적도 있었다. 삼각김밥이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식당에 갈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달을 일하며 너무 힘들어 매일 밤 울며 잠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또다시 사회 밖으로 밀려나는 게 두려웠다. 세상이 그려놓은 동그라미 안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버티지 못한다면 아무 곳에도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와중에는 나는 영어 공부를 했다.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기 때문에 이거라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은 영업일을 해서 맡고 있던 거래처의 매출을 5배 올렸다. 나는 남들보다 한참 모자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다. 이런 노력들은 자신감으로 돌아왔고, 나는 계약직 사원 중 처음으로 누락 없이 진급한 사람이 되었다.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으니 일에 욕심이 났다. 일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월요일 출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일하는 과장님이 조심스레 내 학벌에 대해 여쭤보시며 대학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주셨다. 당신은 나와 함께 오랫동안 일하고 싶은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을 많이 본다고. 진급이든 이직이든 나중에 꼭 필요할 거라고. 안 그래도 내 버킷리스트에는 '대학교 다니기'가 있었다. 언젠가는 꼭 대학에 다녀야지 했는데, 바로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았다. 과장님과 면담을 한 다음날 나는 편입학원에 등록해 1년간 공부를 했고, 다음 해 나는 서른 살에 야간대에 입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했다.


 그리고 지금은 서른셋. 야간대를 졸업하고, 그 사이에 자격증을 몇 개 취득했으며, 사내 교육을 들으며 컨설팅으로 직무를 바꿨다. 내가 항상 고민했던 '뭘 해 먹고살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찾았다. 앞으로 살아갈 방향성을 따라 커리어를 쌓고 있다. 그리고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던 '척척박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다.


 17살. 고졸검정고시 출신. 신림동 반지하 단칸방에서 나 홀로 누워 매일이 외로웠다. 자살생각도 시도 때도 없이 했으며, 정신과에 다녔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평범하게만 살게 해 주지,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했다. 엄마의 빚이 문제였을 땐 파산신청을 위해서 신용불량자 모임에 나갔고, 호주에 가고 싶었을 땐 돈을 모았다.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을 땐 영어공부를 했고, 대기업에 가고 싶었을 때도 자소서를 썼다. 계약직이라는 다른 길을 찾아 대기업에 들어왔고, 진급이 하고 싶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했다. 학벌이 필요해서 나이 서른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직무를 변경하기 위해 자격증을 땄으며, 일의 전문성을 갖고 싶어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눈앞에 당장 보이는 것들을 하고 살아왔는데 33살의 나는 그리 나쁘지 않게 살고 있다. 대기업에서 컨설턴트로서 일하고 있으며, 은행 빚이 대부분이지만 수도권에 자가를 마련했다. 인 서울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다. 벌써 경력이 7년 차이다.


 나는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하고 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해 직무에 관련된 책을 읽고, 출퇴근 길에 경제 팟캐스트를 듣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화영어를 하고 있으며, 업무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사내/외 교육을 꾸준히 듣는다.


 더 이상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라는 고민은 하지 않는다. 주어진 것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당장만 생각하자. 그래도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흘러가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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