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자기 계발 (2)
처음 영어공부를 결심한 건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공부한 덕분에 첫 직장에 입사했다. 해외이주화물 업체였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직원이 필요했다. 그곳에서 수출입 업무를 배웠고, 일 년 뒤 현 회사로 이직했다. 내가 맡았던 직무는 처음에는 배울 것이 많지만 정형화되어있어 일이 점점 단조로워진다. 매일 같은 업무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객사 영업을 시작했다.
영업을 했던 건 거래처 매출을 높이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결국 커리어가 목적이었다. 당시 회사에서 업무 자동화를 위해 프로그램 개발에 큰 비용을 투자했는데, TFT에 들어가 실무 자문을 하면서 언젠가 나도 대체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20대 중후반엔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수없이 했다.
영업을 통해 거래처 매출을 5배 올렸고, 팀장님께 '저 영업직 시켜주세요.' 하고 말하니 조건을 거셨다. 당시 우리 팀에서는 해외에 발전소를 짓는 EPC Project 운송을 수주했는데, 고객사 프로젝트 팀에 파견을 다녀오면 시켜주겠다 하셨다.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사실 다른 팀원들은 파견을 가기 싫어해서 팀장님께서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을 테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그것도 갑(甲)과 함께)과 새로운 업무를 배워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넵 알겠습니다. 하고 나의 파견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객사는 발전소를 지었다. 우리 회사는 발전소를 짓기 위한 자재들을 운송했다. 나는 그 중간에서 고객사의 업무 일부를 대신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업무들이었다. 고객사 대신 서류를 만들어주고, 통관이나 보험 등을 관리하는 업무였다. 하지만 이전에 했던 업무랑은 180도 달라서 새로이 업무를 배워야 했다.
파견 나간 지 두 달 차, 이제 ‘주기기’ 운송이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주기기는 발전소 건설에 가장 중요한 자재로 운송이 늦어지면 공사기간도 늦어져 모두가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제때 제작이 완료되어 문제없이 운송 후 공사에 투입시키는 것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모두의 목표였다.
그러나 일은 항상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코로나가 터지고 생산이 지연되면서 운송 또한 지연될 위기에 놓였다. 위기감을 느낀 프로젝트 매니저는 매주 1회 콘퍼런스 콜을 시행하였고, 나도 물류 운송 담당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생산 업체는 유럽의 한 회사로 담당자들도 모두 현지인들이었다. 콘퍼런스 콜을 할 때마다 프랑스 억양이 매우 강해서(물론 그들의 귀엔 내 한국 억양도 만만치 않았을 거다.) 말을 한 번에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열댓 명이 참여를 하니 다들 각자 하고 싶은 얘기만 했고, 이런 프로젝트 업무는 처음이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매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다 나오는 게 일과였다.
한 달쯤 지났을까, 계속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우리 회사 대표로 콘퍼런스 콜에 참여하는 건데 업무를 몰라서!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어도 되는 거야?'
그 길로 나는 바로 CPIM(Certified in Planning and Inventory Management) 학원에 등록했다. 주기기 생산 지연이 주된 이슈였기 때문에 SCM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영어학원 청취반에 등록해서 평일엔 CPIM을 공부하고, 주말엔 영어 청취 훈련을 했다. 업무에도 적응이 되면서 SCM의 체계에 익숙해질 무렵, 어느 순간 프랑스 PM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의 억양이 아닌 내 귀였다. 일상적인 대화는 문제없이 하더라도 업무에 관련된 콘퍼런스 콜 경험은 전무해서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낯선 SCM용어들이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CPIM을 공부하며 업무를 파악하고, 주말마다 4시간씩 CNN을 들으며 청취에 익숙해진 덕에 이제야 조금씩 그의 말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나도 발언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는 적당히 거절하고, 발전소 건설에 차질이 없도록 운송 일정을 관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함께 콘퍼런스 콜에 참여했던 고객사 프로젝트팀 직원이 갑작스레 현지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고 콘퍼런스 콜은 내 몫이 되었다. 생산업체와 고객사 사이에서 내가 주제와 일정을 관리하며 회의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혼자서 어떡하지 싶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피할 순 없었다. 미리 회의 주제를 선정하고, (생산업체와 싸워서 이길) 자료들을 충분히 준비해서 회의에 들어갔다. 크리스마스 전날까지도 타이트하게 운송 일정 관리를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가 되었다.
이 일로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인정을 받았다. 다음 프로젝트 때도 꼭 함께 하고 싶단 말을 들으며, 내가 앞으로 그들의 '업무 기준'이 될 것이란 말도 들었다. CPIM 자격증과 OPIC 성적은 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준비하고 공부했던 것이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CPIM 자격증을 계기로 컨설팅 팀으로 이동하게 되어 현재는 물류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CPIM 학원의 강사는 물류 컨설턴트를 겸하고 있었는데, 실무 경험담을 들으며 컨설팅에 관심이 생겼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갑자기 사내에 컨설팅 강의가 신설되었다. 수업을 들으며 SQL과 빅데이터를 공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컨설팅팀으로부터 이동 제안을 받았다.
CPIM이 없었다면 전반적인 Supply chain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을지, 그리고 이런 이해도가 없었다면 팀을 옮길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물류 컨설팅 업무의 가장 기본은 전반적인 제조·물류에 대한 이해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업무를 잘하기 위해서 공부를 했던 것이 나를 새로운 진로로 이끌며 내 인생의 2막을 열어준 것이다.
영어공부를 한 덕분에 첫 직장에 입사했고, 현 직장에 이직할 수 있었다. 역량을 키우기 위해 영업을 했던 것이 대형 프로젝트를 맡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고, 프로젝트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자기 계발을 했던 것이 나의 다음 진로를 결정해주었다. 사소한 점들이 선처럼 이어지는 경험을 했다. 연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다음 단계로 가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나는 아직도 배울 게 많다. 물론 일과 병행하며 공부를 한다는 게 피곤하고 지칠 때도 있지만, 이 점들이 또 어떻게 연결이 되어 내게 어떤 기회를 줄지 기대된다. 그러니 배움에 있어서 항상 적극적으로 임하자. 내일의 기회가 되어 돌아올 테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