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공사?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시작은 막연한 동경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나만을 위한 작업을 하는 공간을 갖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나라는 자원을 한정적으로 쓰지 않고 빈틈 없이 적재적소에 쓰이도록 하는 삶. 내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더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줄 몰랐는데 꿈이었던 일도 직업이 되니 시들해졌다. 회사생활과 사회생활의 경계에 멈춘 채로 집중은커녕 선택조차 못하고 있었다. 회사라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지금의 나보다 더 좋아보였고, 그렇다고 그곳에 과감히 뛰어들 용기도 없었다. 입사 3년차가 되니 어떠한 반전도 없이 “소포모어 징크스”에 된통 당하고 만 것이다.
안정적인 것은 편하기 때문에 좋다. 하지만 편한 것은 좋기 때문에 동시에 관성이 생겨 움직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무서웠다. 죽을 때까지 단 하나를 최고로 잘하는 사람을 꿈꿨던 적도 있다.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것에만 몰두하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길러온 내 속의 시샘이 너무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뱁새처럼 다리를 쩍쩍 벌려가며 내가 할줄 아는 것을 늘려가려 애쓰며 죽을 때까지 여러 가지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꿈꾸기로 했다. (그저 직업에 나를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관성과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운명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을 몰랐다. 8차선 도로 위에 멀뚱이 서서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다가 무작정 시나리오 수업을 등록했다. 영화 감독이 되어야지 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좋아하는 영화 감독이 소규모 시나리오 수업을 개설한다고 해서 “소규모? 그럼 그 사람이랑 얼굴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거 아냐?”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었다. 그 마음은 완전히 충족되었고 그 충족으로 인해 나는 부끄럽게도 영화를 꿈꾸게 됐다.
일주일에 3일은 이게 맞나? 생각했고 4일은 이러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눈을 꼭 감고 막연한 동경을 그리며 현실을 회피하려 애썼다. 걱정과 의심을 하는 것은 발전도 포기도 방해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철수가 나를 푹 찔렀다. “1000만원으로 망하느니 100만원으로 망하자”면서 아주 깊게 찔렀는데 나는 홍진경식 화법으로 말하자면 아주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이렇게 살면 참 좋겠다” 생각한 것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다, 는 것도 없었다. 좋아하는 감독과 얼굴을 맞댈 수 있을 거야 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던 시나리오 수업처럼 아무런 계획도 없지만 덜컥 해버린 계약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수 있을 거란 기대 하나로, 오공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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