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can S.F.
포브스 선정 로맨스를 즐겨볼 거 같은 책임 같은 건 없지만, 효브스 선정 SF와 가장 안 어울리는 남자 같은 건 있다. 내가 만들었으며, 1위는 당연히 나다. 보지 않으면 아무도 친구 안 해줄 거 같아서 본 마블 시리즈 몇 편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너 SF영화 볼래? 돈까스 먹을래?라고 말하면 1초의 고민 없이 돈까스를 먹을 거다. 원래 돈까스란 모두에게 그런 존재인가? 아무튼 SF라는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응수에게 있는 순정처럼 나에게도 아껴둔 SF영화 한 편 있다. 나의 술 인생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적극, 아니 강력 추천해준 영화 '더 월즈 엔드: 지구가 끝장나는 날'이다. 이 영화의 장르가 SF에 속한다는 사실은 한참 맥주를 들이켜다가 알았다. 처음엔 그냥 술 그리고 우정과 관련된 코미디인 줄 알고 재밌게 봤다. 그러다가 '헐... 이게 뭐지?' 하면 갑자기 SF영화로 바뀌는데, 이런 걸 싫어하는 나지만 끄지 않고 재밌어서 끝까지 봤다.
술을 마시면, 최소 3개 이상의 가게를 가는 것을 즐겼다. 코로나가 오기 전엔. 상수 5코스, 신촌 3코스, 서촌 6코스, 광화문 3코스, 충무로 5코스, 을지로 3코스, 느티 4코스... 이렇게 동네에 좋아하는 가게 몇 개를 정해두고, 맥주 한두 잔 혹은 소주 한 두병만 비우며 이동하는 것. 펍크롤이라고 부르던데 나는 이 영화에서 이걸 처음 배웠다. 이 영화에선 무려 12개의 펍이 나온다. 세상을 즐기겠다던 게리킹과 4명의 친구들, 고등학교 졸업에 맞춰 동네 12개의 펍을 정복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토사물과 피와 숙취로 범벅이 된 상태로 새벽을 맞는다. 그리고 그 새벽을 잊을 수 없었던 게리킹은 나이가 들어 다시 동네 친구들을 모아 '그 짓'에 다시 도전한다는 이야기인데, 아름다운 추억팔이도 잠시 '아? 이거 뭐지?' 하는 수많은 장면들과 마주하게 된다. 술과 자유를 갈망하는 이제는 다 커버린 중년들의 이야기랄까?
어떤 사건을 마주하고 나서, 친구들은 이제 어쩌지?라고 말하고, 게리는 '술부터 마시자'라고 말한다. 그래 일단은 술부터 마시자. 말도 안 되는 공상과학 영화답게 진짜 술부터 마시고, 끝까지 술을 마신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가 꿈꿨던 그림이지. 어쨌든 아주 어처구니없는 상상력과 어? 이거 뭐지 싶은 그림들이 SF를 싫어하는 누군가를 마블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특히 벌집펍에서 이뤄지는 액션 전투신은 태생적으로 싸움을 싫어하는 내가 꼽는 2번째로 멋진 액션 전투씬이다.(첫 번째는 킹스맨에서 머리 터지는 장면)
술이 나오니까 술을 준비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냥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진짜 머리가 아픈 기분이 드니까. 차라리 해장을 위한 음식을 함께하자. 예를 들면 순댓국이라거나, 토마토가 잔뜩 들어간 피자. 영국에선 샌드위치를 해장음식으로 한다던데 서브웨이에서 스테이크치즈를 곁들이자. 아 순댓국은 화목순대국에서!
술과 자유가 있는 리얼 SF라이프를 원한다면, 오늘도 잇플릭스!
나 역시 공상과학에는 영 소질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은 나와 친해질 수 없는 친구였다.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 수학이었던 내가 이과 진학을 포기한 데에는 과학이라는 큰 산이 있었을 정도였다. 기계공학을 전공했던 친언니가 물리를 가르쳐 준 적이 있었는데, ‘힘과 가속도는 비례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을 가르치던 언니가 그 원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나서 대낮에 소주를 마시러 나간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빨리 달리면 힘이 빠지지 않나?’라고 물을 때에 언니는 눈알이 벌게진 채로 차가운 냉수를 무섭게 들이켰다.) 부모님마저도 이과 출신인 우리 집에서 나는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이해할 수 없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다.
로봇 같던 가족들 틈에서 나는 홀로 외롭게 로맨스 영화를, 인디 음악을 들으며 떨어지는 잎새에도 눈물을 쏟아 버리는 감성 과다 인간으로 자랐다. 특히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대학에 진학하면 영화 수업을 들을 생각에 설렜다. 그렇게 ‘문학과 영화’라는 수업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강 신청을 했다. 교수님은 스탠리 큐브릭의 광팬이셨다. 그래서 한 학기 내내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이 전체 커리큘럼이었다. (환상의 덕업일치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영화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였다. 교수님의 인생작품이라고 했지만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중간고사의 절반 이상이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관련된 문제였고, 나는 중간고사를 말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적성에 맞는 SF 영화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다. 지금까지도 웅장한 세계관으로 형성된 팬시한 할리우드 영화보다 촌스러운 B급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지구를 지켜라가 SF 영화의 카테고리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다.
혹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마케팅과 포스터가 망친 대한민국 최고의 명작’, ‘저주 받은 걸작’이라고 평을 한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조용히 좋아요 버튼을 누른다. 이 영화는 단순한 공상과학 영화가 아니다. 휴머니즘이고, 사회 풍자 코미디다. 로그라인은 간단하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주인공 병구가 외계인으로 의심되는 생명체를 납치하고 복수한다. 더 이상 줄거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이기 때문에 줄이겠다. 다만, 한 스푼의 과학적 상상력에서 출발한 코미디 드라마- 정도라고 말하면 기괴한 표현이라는 장벽도 거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졸았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딱 하나 기억에 남는 장면의 오마주가 <지구를 지켜라>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기 전까지 SF라는 것은 인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느껴졌다. 과학 수업 시간마다 졸았던 것도, 문학과 영화 시간에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공부할 때도 안드로메다로 정신을 보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사악해보일 수도 있는 병구의 광기를 위로해주고 싶었을 때, 나는 SF는 말 뜻대로 픽션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닿아 있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내가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았다는 걸 다 안다고? 그래, 다 알 수도 있겠지.. 뻔한 이야기니까. 근데 내가 미쳐가는 동안 니들은 어디 있었어?”
라는 병구의 대사는 외계인마저도 라면 하나를 끓여다가 병구에게 소주 한잔이라도 대접해주고 싶어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