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무더위로 공포 특집을 준비했건만, 무섭게도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공포는 불안으로부터 태어난다. 그래서 공포를 견딘다는 것은 내 안의 불안을 다루는 일과 같다. 자아가 생길 무렵부터 나는 단 하루도 불안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2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손톱 물어 뜯는 버릇을 못 고친 것도 그 때문이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내리는 폭우에 끊임 없이 전해지는 침수 피해 뉴스를 보며 영화 <테이크 쉘터> 생각을 했다. 영화는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는 악몽을 꾼 뒤로 그로부터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방공호를 짓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까지 그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보이지 않는 불안과 공포에 맞서 싸운다. 처절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두려워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데, 어느 순간부터 차라리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게 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조마조마한 것은, 어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것이다. 불안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있으니까. 그래서 불안이라는 것은 그것을 마주하지 않으면 않을 수록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몸집도 커지고 그 힘도 더 강해져서 급기야 공포라는 것으로 거대해져 우리를 집어 삼켜 버리곤 한다. 달리 말하면 불안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겪고 지나오는 것 뿐이다.
최근 DJ들의 믹스셋에 빠져 호기심 어린 치기의 기세를 몰아 DJ 클래스에 등록했다. 첫 클래스 전날부터 입이 바짝 말랐다. “DJ들은 다 팬시한 사람들 같은데 내가 찐따인 거 들키면(?) 어떡하지”부터 “나는 음악적 지식도 많이 없고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노래는 뉴진스랑 비욘세 노래인데 무슨 장르 좋아하냐고 하면 ‘POP’이라고 말해야 하나(그냥 뉴진스랑 비욘세요 라고 하면 좀 없어보일까봐), 그럼 무시 당하면 어떡하지”까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클래스 시작 전까지 취소를 할까 말까 수천번 고민도 하고 몇번 시뮬레이션도 돌려보고 하다가 결국 그 시간이 왔다.
불행(?)히도 내가 걱정했던 일은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포마드를 얇게 바른 머리를 한 선생님이 살짝 무서워 긴장했지만 선생님은 (자칭) ESTJ답게 꼼꼼하지만 자상했다. 노래를 연결시키는 비트매칭을 배우는 도중, 이게 맞나 싶어 주춤거리는 내게 “쫄지 말고 차라리 그냥 확 틀리세요! 애매하게 틀리는 것보다 확 틀려버리는 게 고치기도 쉬우니까요!”라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긴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 까짓 거, 틀릴 수도 있지! 틀릴까 두려움에 떠느니 틀려서 더 배우는 게 낫지 싶었다.
하기 싫은 일을 없애는 방법은 바로 해버려서 없애는 것이다. 두렵고 무서운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역시도 그것과 맞서 싸워 이기거나 지거나, 뭐가 됐든 내가 직접 겪어 해치워 버리는 것 뿐.. 그렇게 생각하면 대체로 무서울 것이 없어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과 함께 살고 있다. 이렇게라도 말하는 이유는.. 이렇게 말이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니까. 나는 여전히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고, 이 세상에서 내 존재의 의미가 사라질까 무섭고, 내가 뒤처질까 불안하다-고 이 더운 여름, 화이트 와인을 맥주처럼 들이키며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폭우가 내렸다. 도시 곳곳이 물에 잠기고, 집 앞에 있는 천은 다리 바로 밑까지 불어났다. 대체로 불편하지만 종종 낭만이었던 비가, 수십 년째 장마와 태풍을 겪으며 익숙해질 법 도한 이 비가 종종 공포가 된다. 일상은 걱정이 되었고, 그럴 일 없었겠지만 아니 없어야 하지만 불어난 물이 나까지 휩쓸고 가진 않을까 두려웠다. 뉴스에서 말하는 300미리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는 비와 밤의 어둠이 더해져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무서움이 됐다. 이틀 내내 내렸다 그치길 반복하던 비구름이 빠져나가자 해가 났다. 하늘은 파랬고, 조금 습하지만 공기도 좋았고, 햇살도 좋고, 곧 가을이 올 거 같이 온도도 좋았다. 수위가 낮아진 천에 남은 지난 이틀의 흔적이 없다면 언제 비가 왔었고,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모를 만큼. 폭우가 끝나고 난 뒤에 이상하리만큼 맑은 날씨와, 단 하루 만에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되찾는 도시와 그리고 여기저기 펼쳐진 세찬 비의 흔적들을 마주하면 지난밤의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안도감과 함께 지난밤과 너무 다른 분위기에 새로운 공포에 휩싸이기도 한다. 대단히 무서웠던 지난밤으로부터 홀로 살아낸 남자가 되었고, 의심스러울 만큼 적막한 이 공간이 주는 뭐 그런. 지친 마음을 이끌고 카페에 가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깊은 한숨을 내 쉬었는데,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똑똑하고 떨어질 것 같은 뭐 그런.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슬픔이 남고,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자리엔 공허가 남는다. 그리고 공포가 지나간 자리엔 또 다른 공포가 남는다. 우리가 좋아하는 야마컷같이 말이다. 지금도 다시 보면 무서운 곡성도, 알포인트도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한 아침으로 시작되지만 그 뒤에 또 다르게 전개될 새로운 공포가 숨겨져 있다. 얼마 전 다시 개봉한 영화 <큐어>를 봤다. 평범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모두 특별한 흔적들이 있다. 살인은 진짜 살인자가 라이터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살인을 일으키고 그 진짜 살인자를 쫓는 형사의 이야기다. 곡성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피의 흔적만 없다면 잔잔하고 조용한 일본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기도 한데, 중요한 건 무섭다. 공포영화의 맛은 무엇이든 의심을 하면서 보는 건데, 그 마음은 어느새 형사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아 그 불빛 보지 마세요! 제발. 영화엔 짙은 어둠도, 귀신도, 비도 없는데 시종일관 잔잔하게 무섭다. 폭우가 그친 찾아온 잔잔함같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는 흘러 영화는 끝이 나고, 형사는 늘 가던 식당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다. 휴 드디어 끝이 났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면의 구석에서 어이쿠 하는 장면을 마주한다.
공포가 사라진 뒤 찾아온 고요가 때론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이제 무서운 것은 끝났으니 안심해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이것이 정말로 끝이 아닐 거란 의심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 속에 숨어든 무심한 공포 때문에. 공포는 학습되기 때문에 공포가 지나가면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 공포물보다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큐어>는 한 번쯤 볼만하다. 영화가 끝나면 형사가 식사를 했던 식당과 비슷한 곳에 가서 식사를 하자.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턱 하고 숨이 막히는 순간을 마주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