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미 판매 완료되었습니다
세운 상가에서 10만원 주고 구매했던 8미리 중고 캠코더 반값에 내놓습니다. 제조년도는 잘 모르겠지만 족히 20년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 저기 긁힌 자국들도 많고 작동도 조금 느린 것으로 추정해 보건대 누가 아주 많이 썼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잘 모르는 일이고, 제가 쓴 것은 그에 비하면 별로 안 됩니다.
지난해 7월 문득 캠코더를 가지고 싶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술에 취할 때마다 버릇처럼 핸드폰으로 친구들의 취한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기억나지 않는 그 장면을 마주하는 것은 대부분 수치스러움에 고통을 참을 수 없게 하였으나, 과감한 카메라 워킹과 숨 막히도록 줌을 땡겨버리는 천재 같은 연출을 보고 있으면 홍상수도, 김기덕도 우스워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중, 유튜브에서 정다운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8mm 카메라로 본인의 친구들의 모습을 담아 만든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제가 술 먹고 찍었던 것과 어딘가 비슷한데, 느낌이 천지 차이였습니다. 낮은 화질로 인해 지저분한 화면, 줌을 땡길 때마다 별안간 스즈즈즉- 하고 들리는 소음까지.. 어쩐지 그런 것들이 현장의 라이브함을 보다 더 살아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거 해볼래?” 라고 친구에게 말했고, 친구는 그 길로 저를 세운 상가로 이끌었습니다.
기분 좋게 카메라를 구매하고 을지로의 친구 작업실에서 알콜 스왑으로 카메라를 열심히 닦으며 이 카메라로 무엇을 찍을지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찍는 영화 메이킹을 이 카메라로 찍자, 이걸로 브이로그를 만들면 멋지겠다 등등.. 이 고물같이 생긴 캠코더가 저희를 칸으로, 오스카로, 아니면 그냥 포브스 선정 영향력 있는 30대 이런 것으로 보내줄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전화가 울렸습니다. 02로 시작하는 전화였습니다. 직감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재난 상황에 닥쳤구나, 하고 말입니다.
자수합니다. 그날 카메라를 사러 가기 전 저는 코로나 PCR 검사를 받았습니다. 사내에 확진자가 나와 검사를 권고 받았기 때문입니다. 검사를 받고 외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별다른 증상도 없었거니와 역병도 시대라는 이름을 달게 되면서 다소 안일해진 탓에 카메라를 사러 나갔던 것입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았습니다. 전화는 예상대로였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제가 확진자라는 소리가 물 먹은 것처럼 들려 왔습니다.
보건소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급하게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들쳐 메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막혔습니다. 택시에서 진땀을 빼고 있는데, 애꿎은 카메라 가방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그놈이 내 인생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사랑스러웠던 그 카메라였는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리 시설에 들어갈 때 저는 그 녀석을 챙겼습니다. 이걸로 격리 브이로그를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면 떡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정말 지독하죠?) 그렇게 구급차를 타는 순간부터 신길역에 위치한 격리시설에 가는 데까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손에서는 캠코더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정말 슬프고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캠코더를 켰습니다. 어느 날은 <올드보이> 최민식이 된 것처럼, 또 어느 날은 <127시간>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매일의 내 몸의 증상과 기분과 가끔의 우울함 등을 기록했습니다. 얼른 나가서 이것들로 브이로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증상이 나아질 차도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설렜습니다. 덕분에 그곳에서의 시간이 빠르게 갔던 것 같습니다.
10일 후,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체온도 정상 체온으로 회복했습니다. 매일 전화로 제 증상을 확인하던 의료진들이 이제 집으로 돌아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난 뒤, 빠르게 테이프를 챙겨 들고 세운 상가를 다시 찾았습니다. 8mm 캠코더로 촬영한 테이프를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동안 찍었던 그림들을 상상하며 아저씨에게 테이프를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절망했습니다. 카메라도 테이프도 너무 오래된 것이라 내부 청소를 하지 않아서 영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저씨는 원래 중고 카메라를 사면 청소를 해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제가 알 리가 있었나요. 10만원이면 싼 거라며 구매를 부추겼던 친구까지 미워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금영수증도 안 해줘서 열받아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10만원을 공중에 날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은 정말로 계획대로, 목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기 때문입니다. 캠코더가 제 수중에 들어오고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마구 생겼으니까요. 코로나로 인해 10일 간 격리를 하다 보니, 내게 주어진 인생에서 10일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당시엔 인생의 일정한 조각을 잃어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때를 지나고 보니, 서른 살이 되면 무언가를 빨리 이루어야 한다는 조급합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구체적인 목표나 빠른 성취 없이도 유유히 30대를 흘러가리라는 기대와 자신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번복하겠습니다. 세운 상가에서 10만원 주고 구매했던 8미리 중고 캠코더, 판매하지 않겠습니다. 쓸모는 없지만 저한테 꼭 필요한 캠코더인 것 같아서요.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동안 캠코더 가방을 열지 않았습니다. 내일이라도, 저 늦은 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