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에 관한 이야기
이권우,이명현,이정모,김상욱 저 | 강양구 기획 | 생각의힘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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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살아 보니, 시간』은 이 모순적인 주제를 천문학자 이명현, 물리학자 김상욱, 과학관장 이정모, 도서 평론가 이권우가 모여 치열하게 탐구하는 책입니다.
"뉴턴도 정의하지 않았고, 아인슈타인도 답을 내리지 못한 ‘시간’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에서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한 시간은 왜 우리 삶 속에서는 감정과 기억을 동반한 흐름으로 존재하는가?"
이 책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개념을 낯설게 만들고, 철학적 사유와 과학적 통찰이 결합된 흥미로운 여정을 선사할 것입니다.
* 책의 내용중에 인상 깊은 문장이나 문구를 그대로 옮겼(발췌)습니다.
숫자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1은 1이고, 2는 그냥 1이 두 개 모인 거다. ‘1 ’에 심오한 의미는 없다. 2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자, 2의 정의定義이기도 하다. 정의는 이름을 주는 것이다.
내 이름은 ‘김상욱’이다. 여기에 어떤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를 처음 보는 사람도 내 얼굴을 보고 이름을 알 수 있으리라. 원래 정의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숫자는의미 없는 1을 시작으로 그냥 기계적으로 하나씩 1을 더해 만들어진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지는 수는 자연수다. 이제 자연수에 사칙연산을 결합하면 우리가 아는 실수實數가 나온다.
우리 문화에서는 태어난 지 60년 되는 해를 환갑이라 하여 특별히 취급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60은 1을 60번 더했거나, 6을 10번 곱했거나, 360을 6으로 나누어 구해진다는 것 말고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더구나 1년이라는 시간도 지구라는 행성의 자전주기로 지구가 태양공전궤도상의 같은 위치에왔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며, 정확히 365일인 것도 아니다. 결국 이명현, 이정모, 이권우의 공동 환갑을 기념하는 이 이벤트는본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겠다.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주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세 사람은 거의 매달 전국을 함께 ‘강연’ 여행했다. 마치 트로트 가수(차마 아이돌 가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의 ‘전국 투어’같이 말이다. 또 이렇게 세 차례 대담을 하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하려 한다. 이런 이벤트들을 내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시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대담 게스트를 맡은나, 장대익, 정재승은 각각 70년생, 71년생, 72년생이다. 우리는 동시에 환갑이 될 수 없으니 이런 행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모두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할 듯하다. 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세 분과 ‘시간이란 무엇인가’ 같은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는것은 60이라는 숫자의 의미나 ‘환갑쓰리3李 전국 투어’같이 사서 하는 생고생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흥미로운 기회라고 생각한다.
천문학자(이명현), 생화학 전공자(이정모), 인문학자(이권우)가 있는데도, 굳이 물리학자를 부른 것은 물리학의 시간이 뭔가 특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시간의 본질에 대한 물리학의 답은 “모른다(단호)”이다.
물론 물리학은 누구보다 시간을많이 사용하는 학문이다.
우주는 시간, 공간, 물질로 되어 있다. 시간은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는말이다.
물리학은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물리를 하는 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본질이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측정하는가이다.
물리학의 아버지 뉴턴은 시간을 정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탁월한 결정인데, 시간이 무엇인지 지금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턴은 수학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을 말했다. 해가 뜨고 계절이 바뀌어서 오는 시간이 아니라 지구, 달, 태양의 움직임과 무관한, 아니 이 세상과 무관한 숫자로서의 시간! 뉴턴 이래 지금까지 우리는 뉴턴의 생각을 따라 시간을 숫자로 생각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 7일 4시 29분’에 어떤 특별한 의미는 없다. ‘4시 30분’은 ‘4시 29분’보다 1분 늦을 뿐 모두숫자에 불과하다.
결국 환갑을 기념하는 이벤트에서 환갑이라는 나이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처음부터 이런 흉흉한 결론이 나온 것은 시간을 주제로 물리학자를 초청한 주최 측이 자초한 일이란 뜻이다.
하지만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내일 오후 7시와 어제 오후 7시는 완전히 다르다. 어제는 기억할 수 있지만 내일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내일이 오지만, 무슨 짓을 해도 어제로는 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시간의 화살’이라 부른다.
즉, 시간에 방향이 있다는 뜻이다.
누구나 아는 당연한 사실에 거창하게 시간의 화살이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물리학자의 허세가 심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시간의 화살이 설명하는 현상은 분명 모두의 상식이다. 하지만 뉴턴에 의하면 시간은 숫자고 물리법칙에 시간의 방향은 없다.
시간은 그냥 숫자니까.
그렇다면 뉴턴의 물리학과 시간의 화살은 양립할 수 있을까? 뉴턴의 물리학으로 시간의 화살을 설명할 수 있을까?
19세기 말 루트비히 볼츠만은 뉴턴의물리학에서 시간의 화살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 주었다. 볼츠만의 아이디어를 이해하기 위해 루빅스 큐브를 생각해 보자. 큐브를 구입해서 포장지를 뜯었을 때, 큐브 각 면의 색은 모두 같은 색으로 되어 있다. 이제 눈을 감고 100번 정도 마음대로돌려 보자. 눈을 뜨고 보면 색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상태일 것이다. 이제 다시 눈을 감고 마음대로 100번을 또 돌려 보자. 눈을 떴을 때 각 면의 색이 처음처럼 같은 색으로 된 상태가 나올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여전히 색은 (다른 모습이지만)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을 거다.
큐브를 아무렇게나 마구 100번을 돌리면 큐브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를 다 커버할 수 있는데, 그 수는43,252,003,274,489,856,000이다. 이 가운데 처음 상태의 경우는 단 하나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큐브를 돌려 처음으로 돌아가길 기대하는 것은 엄청난 경우의 수 가운데 단 하나가 나오길 기대하는 것이니,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미친 짓이다. 자, 이제 여기서 약간 도약을 해 보자. 비유를 들자면 큐브의 상태를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매번 큐브를 돌릴 때 회전 방향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시계 방향으로 두 번 돌렸다면 반시계 방향으로 두 번 돌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회전 방향이 시간의 방향이라면 시간의 방향이 없다는 뜻이다.
큐브를 매번 돌릴 때 양방향이 모두 가능하다. 즉, 시간에 방향은 없다. 뉴턴의 법칙에 시간의 방향이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큐브를 제멋대로 돌려서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는 힘들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무수히 많은 흐트러진 상태에서 단 하나인 초기 상태를 고르는 것과 같다. 즉,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볼츠만이 설명하는 시간의 화살이 존재하는 이유다.
여기서 ‘엔트로피’라는어려운 개념이 등장한다.
엔트로피는 경우의 수다. 큐브를 돌릴 때, 엔트로피는 경우의 수가 작은 상태(각 면의 색이 같은 초기의 큐브)에서 경우의 수가 많은 상태(색이 흐트러진 큐브)로 바뀐다.
즉,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한다.
결국 돌고 돌아 환갑 이벤트는 의미가 있다는 훈훈한 결론일까? 시간이 흐르면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큐브가 흐트러지는 것이바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엔트로피는 경우의 수니까. 나이가 들어 노화가 일어나고 시간이 흘러 문명이 폐허가 되는 것도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방향이 시간의 방향이고, 엔트로피는 늘어만 나니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환갑은 한 번뿐이다. 그렇다면 환갑은 중요하다.
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숫자다. 시계에 찍힌 숫자다. 시간을 잰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개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집을 나서는 순간 시계를보고 시각을 기록한다. 집에 돌아오는 순간 시계를 보고 시각을 기록한다. 여기서 두 개의 사건이란 집을 나서는 사건과 집에돌아온 사건이다. 나중 시각에서 처음 시각을 빼면 외출한 동안 흐른 시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시간을 재는 방법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식으로 정의된 시간을 여러 가지 상황에 면밀히 적용하여,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과 정지한 사람의 시간이 같지 않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다(물론 어려운 내용을 더 알아야 한다. 광속불변 원리라든가 관성계에서 물리법칙이 동일하다는 것 등등. 하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끝까지 밀고 가면 무거운물체 주위에서는 시공간이 구부러지고 블랙홀이 존재하고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했다는 미친 결론이 나온다. 상대성 이론으로 이끄는 시간에 대한 핵심적인 가정은 그것이 시계에 찍힌 숫자라는 것이다.
천문학자는 물리학자의 시간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겠지만, 생화학 전공자(이하 생물학자)는 짜증이 날 수도 있다. 당연히흐르는 시간을 가지고 이런 골치 아픈 이야기만 늘어놓다니. 무엇보다 생물학자에게 시간은 진화의 토대다. 아직 정확히 알지못하지만, 최초의 생명체만 주어지면 진화는 필연이다.
진화에는 방향이 없다. 그냥 그때그때 최적의 생명체가 살아남는 거다.
이렇게 본다면 진화의 시간에 방향이 있다는 말도 이상하다.
시간은 진화의 방향이 아니라 무작위로 일어난 진화에 순서를부여한 것이다.
여기에 어떤 경향이 있을 수 있을지언정 방향이라고까지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물학자의 바람과 달리 시간은 진화의 토대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환갑 이벤트는 60년이라는 시간의 결과가 아니라, 60년이라는 시간의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일까? 시간의 물리적, 형이상학적, 생물학적 의미에 상관없이 우리는 시간에 쫓기며 산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까지일해야 한다. 마감이 다가오면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마쳐야 한다.
현대의 시간은 뉴턴의 시간이고, 뉴턴의 시간은 수학의 시간,
기계의 시간이다.
인간이 기계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자 기계의 리듬에 맞춰야 했다.
전근대 사람들은 ‘분’ 단위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다. ‘분’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필요 없는 정밀한 시간 단위다. 시민혁명으로 자본가들이 권력을 잡은 후 노동은 사회의 핵심 가치가 되었고, 노동시간과 강도를 놓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수많은 갈등이 있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하루 8시간, 주 5일 노동이라는 현대의 노동시간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현대의 우리는 하늘이 무너져도 이 시간을 지켜야한다. 휴가를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은 권리라기보다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노동의 미래가 불확실한 지금, 노동시간이야말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초에 비해 이미 엄청나게 많은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100년 전 노동자의 상당수가 1차 산업에서 일했지만, 2022년 기준 우리나라 1차 산업 노동자는 10%도 되지 않는다. 이들의 노동을 기계가 대체했기 때문이다. 기계가 일을 대신할 때,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모두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도 생계 걱정 없는 세상이 이상적인 답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생계를 위해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 노동시간만큼은 줄이는 것이 좋은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하루 8시간, 주 3일 노동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주 5일제가 시작되던 20세기 초에 비해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이미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엄청난 규모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전히 주 5일을 일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가능한 답 가운데 하나가 《가짜 노동》이라는 책에서 다루어진다. 한마디로 인간이 불필요한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노동시간을 채우기 때문이라는 거다. 왜냐하면 노동은 신성하니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노동을해야 한다는 것은 근대인의 강박일지도 모른다. 이런 강박으로 만들어진 쓸데없는 노동을 책의 저자들은 ‘가짜 노동’이라 부른다.
물론 모든 노동이 가짜 노동인 것은 아니다. 진짜 노동도 많다. 생산직보다 사무직에 가짜 노동이 많다. 가짜 노동처럼 보이는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다. 때로는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으니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고 필요도 없지만 단지 노동시간을 채우기 위해 고안된 노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치 않는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도 노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불필요한 노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기계가 노동을 하고 인간은 노는 세상이라.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런 사회를 만들려면새로운 사회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18세기 서양의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사회계약론》이라는 이론이 있었듯이, 인공지능이 가져올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미래가 온다면 인간이 할 일은 노는 것이다.
결국 환갑이라는 아무 의미 없는 사건에의미를 부여하여 재미있게 노는 일이야말로 인류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돌고 돌아 훈훈한 결론에 도달했다.
김상욱 :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가 선생님들께서 태어난 지 60년 된 해를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가지금 기념하는 ‘60’이라는 수에 무슨 의미가 있죠?
이명현 : 의례ritual의 한 형식이죠. 개인이든 공동체든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고, 그런 변화의 중요한 국면을 기억해서기념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절차가 필요했을 겁니다. 영장류 때부터 근대 이전까지는 이런 국면을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연 현상이었어요.
그래서 달의 움직임에 따라 월月이, 해의 움직임(정확하게 말하면 지구의움직임)에 따라 연年이 나왔을 테고요. 그 해가 열두 번(십이간지), 또 그 열두 번이 다섯 번 반복되는 60이라는 숫자를 상서롭게 생각했겠죠. 실제로 옛날에는 회갑까지 살면 장수했다고 여겼을 때니까요. 그런 전통이 관습처럼 이어져 온 것일뿐이에요.
강양구 : 예전엔 선생님들께서도 회갑 챙기는 어른, 은사, 선배 보면서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웃음)
이정모 : 내가 예순이 되면 절대로 저런 일은 하지 말아야지 했었죠. (웃음) 그런데 내 일이 되니까 한 달 전부터 두근거렸어요. 조바심도 나고, 또 회갑을 기념해서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이 기쁘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60’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우선은 이명현 선생님도 언급했지만 오래 사는 것, 장수가 있는데요.
선사시대에는 넉넉하게 잡아도 평균 수명이 20대 중반이었어요. 문명이 시작되고 나서도 거의 제자리걸음이었고, 중세에는 오히려 수명이 짧아졌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이런저런 이유로 죽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감염병팬데믹에도 취약했고요.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에도 평균 수명은 서른이 안 되었어요.
20세기 들어와서야 마흔을 넘겼고, 1970년대가 되어서야 예순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순을 넘기는 걸 기념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의례였죠.
이권우 : 답변을 보태면, 만 60은 태어난 해를 다시 맞는 나이예요. 60년이 되면 내가 태어난 해와 간지가 같아져요. 말하자면 ‘60’은 성장과 순환을 동시에 상징하는 거죠. 방금 이정모 선생님께서 이야기했듯이, 이 나이까지 살아남았다는 걸기념하는 동시에 나아가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도 있어요.
강양구 :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키워드가 ‘시간’이에요.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시간 감각이 달라지나요?
이정모 : 어른들 말 그대로예요. “10대 때는 시간이 시속 10킬로미터로 흐르고, 50대가 되면 시속 50킬로미터로 흐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옛날에는 시간이 정말 안 갔어요. 그런데 이제는 어영부영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일주일이 지나고, 그러다 월급날이 와요. 너무 시간이 빨리 가는 거예요.
이권우 : 새로운 경험의 유무에 따른 차이도 있겠어요. 어렸을 때는 모든 일이 새로웠고 또 기억에 또렷이 남았죠. 그런데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한 번 경험해 봤던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고, 그걸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렇게 기억을 띄엄띄엄하니까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것 아닐까요?
김상욱 : 같은 생각이에요. 새로운 일을 많이 접하면 그에 비례해서 기억량이 많아지겠죠. 반면에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면압축되어서 기억량이 줄어들 겁니다. 느끼는 시간은 기억량에 비례할 테니, 새로운 일이 적어 기억량이 줄어드는 노년에는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는 게 아닐까요?
강양구 : 우리가 느끼는 시간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비슷한 견해인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뇌 과학자 가운데 데이비드이글먼David Eagleman이 있습니다. 이글먼이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했어요. 놀이공원의 기구를 이용해서 피실험자를50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게 한 다음에 자신이 땅에 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을 추측하게 했는데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상대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떨어지는 데에 걸린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답했어요.
이글먼은 이 실험 결과를 놓고서 강렬한 자극의 경험이 일상의 그것보다 훨씬 촘촘하게 기억된다고 설명해요.
방금 김상욱 선생님의 표현을 따르자면 기억량이 많은 거죠. 새롭고 자극적인 경험은 당연히 어린 시절에 많았겠죠. 그러니 어린 시절에는 더 많은 기억이 촘촘히 저장되고 그에 따라 시간도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세 선생님은 60대이지만, 이제 40대중반인 저도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걸 느끼거든요. (웃음)
이명현 : 노화 영향은 없을까요?
강양구 : 안타깝게도 노화도 영향을 준다더라고요. 나이가 든다고 해서 왜 새로운 경험이나 기분 좋은 일이 없겠어요? 우리가 새로운 것을 접하거나 기분 좋은 일이 생길 때 분비되는 신경 전달 물질이 도파민인데, 노화가 진행되면 이 도파민의분비량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새로운 것을 접하거나 기분 좋은 일이 생겨도 젊은 사람과 비교하면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이 적은 거죠. 이렇듯 도파민의 양이 적어지면 뇌로 들어오는 자극을 종합하는 속도가 느려진다고 합니다. 바깥세상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뇌가 천천히 종합하니까, 상대적으로 바깥의 시간은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겠죠?
김상욱 : 언제나 그렇지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간단치 않아요.
‘시간이란 무엇인가?’처럼 본질을 따지는 질문은 물리학의 질문은 아니에요.
물리학은 현상을 놓고서 기술하는 학문이지요.
물리학의 질문은 질량을 잴 수 있는가?
더 중요하게는 예측 가능한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이작 뉴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도 시간을 정의한 적이없어요. 사실 뉴턴 이후의 물리학자 누구도 ‘시간이 무엇인가?’를 놓고서 답한 적이 없어요. 뉴턴 이후로 ‘시간’은 물리학자에게 ‘숫자’입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리적 실체로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멋진 말을 사용할 수도 있겠네요.
강양구 : 벌써 탄성을 지르는 독자가 눈에 보이는데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요?
김상욱 : 아인슈타인도 뉴턴과 같은 입장이었어요. 과거, 현재, 미래는 환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시간도 첫번째 사건과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시계 눈금을 각각 읽고 나서 그 차를 구한 것일 뿐이에요. 그냥 숫자일 뿐인 건데요. 그렇다면 시간에 대해서 그 이상의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죠.
강양구 : T2-T1?
이명현 : 시간 간격!
김상욱 : 물론 관측자가 보고 있는 시계가 가리키는 눈금을, 여기서 지금 사건이 일어날 때의 시간이라고 전제해야겠죠. 정리하자면 뉴턴부터 지금까지 물리학자가 여러 실험을 통해 검증해서 옳다는 것이 입증된 시간은 단지 숫자일 뿐입니다. 1, 2, 3, 4 같은. 이런 자연수를 놓고서 우리가 그 실체나 존재를 탐구하지는 않잖아요?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시간이 흐른다’라는 말도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잘못된 표현이죠.
시간이 실체가 있는 것처럼 가정하니까요.
실제로는 사건과 사건 사이에 읽을(측정할) 시간의 눈금이 있을 뿐이죠.
그 사이를 ‘시간이 흘렀다’고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물리학의 영역은 아닙니다.
이명현 : 과학자의 시간 개념을 부연 설명해 볼게요. 시간에 대해 자꾸 오해가 생기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사는 이 뉴턴역학적인 공간과 시간에서, 공간이 직관적인 데에 반해 시간은 그렇지 않아요. 공간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몇 걸음인지를 걸어 보면 잴 수도 있고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앞에서 김상욱 선생님께서 설명했듯이 시간 간격이라는 걸 통해 개념화한 겁니다. 그게 과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김상욱 : 아, 엔트로피까지 염두에 두고서 시간의 방향성을 생각하는 방식도 있어요. 우리가 사는 닫힌 시공간에서 다시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있다,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등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을 놓고서 시간과연관 짓는 거죠.
강양구 : 그래서 ‘시간의 화살’이라는 표현도 있잖아요?
김상욱 : 그것도 사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비유입니다. 언뜻 그 표현을 들으면, 우리는 시간이 마치 화살처럼 한 방향으로 이동한다고 연상하죠. 하지만 진짜 의미는 나침반이나 풍향계의 바늘처럼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에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처럼요.
강양구 : 또 다른 대가인 스티븐 호킹은 책 《시간의 역사》(까치, 2021)도 썼잖아요.
김상욱 : 마침 호킹이 그 책에서 이렇게 설명해요.
핵심은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즉 심리적 시간이 우연히(?) 일치한다는 거죠.
호킹에 따르면, 시간은 빅뱅과 함께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빅뱅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마세요. 그건 “북극의 북쪽에 무엇이 있느냐?” 이런 질문과 비슷하니까요.
그렇다면 빅뱅 이후에 우주는 팽창하는 한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우주의 시간도 마찬가지인데, 바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방향이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기억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엔트로피가 증가합니다.
신경 세포에서 기억을 저장하는것은 열을 발생하는 과정인데, 이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이거든요.
그러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의 시간과 일상생활에서 기억을 만들면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인간의 시간이 일치하는 겁니다. 만약 우주가 다시 수축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걸 우주론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빅 크런치Big Crunch’라고부릅니다. 우주의 끝을 설명하는 이론 가운데 하나죠. 하지만 그때도 우주의 부피는 줄지만, 엔트로피는 증가해요.
이권우 : 우리가 죽을 때도 엔트로피가 증가하나요?
이명현 : 맞아요. 우리가 몸속에 품고 있던, 응집해 있던 질서가 죽으면 무질서로 폭발하죠.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거예요.
이권우 : 그렇다면 우주가 죽는 것과 사람이 죽는 것이 같군요.
강양구 : 여기서 궁금증이 생기는데요. 그렇게 과학자가 말하는 시간의 정체가 명확하다면, 왜 시간에 주석을 다는 과학자의 책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대부분은 물리학자네요. 국내에도 소개된 책 중에서 얼른 생각나는 것만 열거해 봐도 세 권이나 됩니다. 그것도 다 대가라는 소리를 듣는 과학자들이네요.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쌤앤파커스, 2019), 리처드 뮬러의 《나우: 시간의 물리학》(바다출판사, 2019),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김영사, 2022) 등이 떠올랐어요.
김상욱 : 그런 책들에서 문제 삼는 건 시간의 본질이 아닙니다. 물리학의 풀지 못한 난제 가운데 ‘통일장 이론’이 있어요. 물리학에서는 시간, 공간 그리고 물질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 셋을 설명하는 두 이론이 있어요.
첫째로 시간과 공간을다루는 이론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입니다. 그리고 물질을 다루는 이론인 양자역학에서 온 표준모형이 있어요. 쉽게설명하면 상대성 이론이 시공간을 설명하고, 양자역학이 물질을 설명합니다. 물론 상대성 이론에서도 물질의 특성을 고려하긴 해요. 바로 질량과 그것에 관계하는 힘인 중력이죠. 하지만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 같은 미시 세계로 들어가면 양자역학이 관여해요.
단순화하자면, 아주 큰 세상에서는 중력과 상대성 이론 그리고 아주 작은 세상에서는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같은 힘과 양자역학.
이렇게 나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이 둘을 동시에 고려해서 설명해야해요. 예를 들어 빅뱅의 순간이죠.
중력은 크고, 크기는 작고. 이 순간에 두 이론이 조화롭게 작동되지 않아요.
하지만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이를 믿고 있죠.
우리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조화롭게 작동할수 있는 이론이 있다고요. 이 이론이 바로 통일장 이론입니다.
강양구 : 초끈 이론이 주목받는 것도 같은 이유죠?
김상욱 : 맞아요. 한동안 가장 강력한 후보가 초끈 이론이었어요. 한 시대를 풍미했다가 지금은 힘이 빠졌어요. 요즘에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 바로 고리양자중력loop quantum gravity 이론이에요. 앞에서 언급한 책의 저자 가운데 카를로 로벨리와 리 스몰린이 그 이론의 대가입니다.
사실 저도 고리양자중력 이론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이 이론에서 시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리 스몰린의 책을 보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는 달리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실체라고 주장합니다. 실체라는 말이무슨 뜻인지 살펴봐야겠지만요. 아무튼 주류 물리학계에서 시간의 본질에 대한 이런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인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런 책을 쓰는 겁니다. 자기 이론의 지지자를 얻고자 대중을 상대로 홍보하는 거예요.
강양구: 과학계 반응은 어때요?
김상욱 : 다수의 물리학자는 관심이 없어요. 초끈 이론이나 고리양자중력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이 어려워요.
이명현 : 수학적으로는 완벽하고 그래서 아름답지만, 실험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이론이죠. 그래서 나는 엔트로피와 시간의 화살 비유 정도가 딱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해요.
이정모 : 왜? 나는 ‘시간이 흐른다’는 표현이 정말 좋아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그렇게 표현하지 않나요?
김상욱 : 우리 인간이 시간이 한쪽으로 흐른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경험이 워낙에 강렬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죠. (웃음)
이정모 : 사실 직관적인 게 정말로 정의하기 어렵잖아요. 나는 인간 또 동물이 태어나자마자 시간의 흐름을 안다고 생각해요. 자기 행동을 시간의 흐름에 맞추잖아요.
김상욱 :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과거는 존재하지 않아요.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요.
오로지 현재만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흘러가는 실체, 즉 시간이 있고 심지어 그것을 느낀다고 착각해요. 바로 기억 때문이에요.
과거를 기억하니까그 결과로 과거-현재-미래의 흐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변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2001)에서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나와요. 10분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거죠. 폴라로이드 사진, 메모, 본인의 몸에 새긴 문신 등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중요한 정보에 의존하지 않으면 기억을 못 해요. 영화처럼 기억을 지우거나 뒤죽박죽 섞으면 우리의 시간관념은 엉망이 됩니다.
물리학자들이 보기에 우리의 시간 개념은 이렇듯 기억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동물도 인간처럼 시간을 체계적으로 알까요? 글쎄요, 동물도 신경계가 있어서 기억할 수도 있겠군요.
이정모 : 돌멩이는 못 하겠지. 돌멩이는 시간의 흐름을 모릅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돌멩이가 시간의 흐름을 모른다고 해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요? 내가 바로 1초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과거-현재-미래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있는데요.
김상욱 : 다시 말하지만, 원래 과거는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 우리의 기억 같은 것이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이 흐른다는 환상을 줄 뿐이죠. 사실 우리 인간도 인지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금과 같은 시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양구 : 사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관 자체가 근대에 나타난 것이라는 지적이 있어요. 유럽의 경우 중세 시대 이전만하더라도 대세였던 시간관은 순환하는 시간이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오늘 이 자리를 있게 한 회갑 자체가 60년 만에 원래대로 돌아와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잖아요.
이명현 : 시계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시곗바늘이 하루 주기로 한 바퀴 돌잖아요. 순환하는 시간과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개념이 여전히 섞여 있는 것으로도 보이네요.
강양구 : 그래서 우리가 김상욱, 이명현 선생님 말씀을 듣고서도 ‘시간이 흐른다’ 같은 비유를 포기하지 못하나 봐요. (웃음) 시간이 흐른다는 비유에 혹하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생명 현상 때문입니다. 생명 현상은 끊임없이 변하죠. 태어나서성장하고 노화하고 소멸하고. 그런 변화의 감각을 생명의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정모 : 생명의 시간을 생로병사로만 한정하면 안 될 것 같아요. 하나의 생로병사에 이어서 또 다른 생로병사가 계속되니까요.
강양구 : 생명의 시간을 염두에 두면, 시간을 보는 두 축이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재생과 순환으로 보는 관점이고, 다른하나는 탄생에서 소멸로 이르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이죠.
이정모 : 사실 생명의 시간을 진화와 멸종의 관점에서 보면, 그 둘을 통합할 수 있습니다. 지구 생명의 다양성은 진화 때문이죠. 그런데 바로 그 진화의 전제 조건이 멸종이거든요. 공룡(파충류)이 사라진 빈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포유류가 진화할수 있었죠. 그러니까 진화-멸종-진화야말로 생명의 시간인 셈이에요.
이권우 : 여기서 나 같은 독자를 위해 명확하게 정리를 한번 해 줘요. 방금 진화의 전제 조건이 멸종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공룡이 지구 생태계를 지배하던 때에도 포유류가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럼 공룡, 파충류가 멸종되지 않더라도 포유류가 진화할 가능성은 있는 것 아닌가요?
이정모 : 중생대 때는 공룡과 같은 파충류의 시간이었어요. 물론 그때도 포유류의 조상이 있었죠. 하지만 파충류의 시간이지속되었더라면, 파충류가 멸종하지 않고서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면 포유류의 생존과 진화는 제한적이었을 거예요. 파충류가 아니라 포유류가 사라졌을 수도 있죠. 파충류의 시간이 끝나면서 드디어 포유류에게 기회가 생긴 셈이랄까요?
김상욱 : 여기서 기본 가정은 이 세상이 생명체로 꽉 차 있다는 것이죠. 대멸종 등과 같은 사건으로 그 꽉 차 있는 세상에여백이 생길 때 그곳을 채우면서 다른 진화의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고요.
강양구 : 흔히 지구 역사를 약 46억 년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생명의시간으로 간주한 것은 고작 5억 4,200만 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전의 약 40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지구에서 물리화학적인 사건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하지만 생명의 시간이라고 부를 만한 진화-멸종-진화 등의 사건이 드물었기 때문에그렇죠.
이정모 : 방금 강양구 기자가 정리한 것처럼 지구 역사는 약 46억 년, 생명의 씨앗은 약 38억 년 전쯤 시작했을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5억 4,200만 년 전까지는, 즉 고생대의 시작점인 캄브리아기 때까지는 생명의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는 아주지루했어요.
그러다 바로 5억 4,200만 년 전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눈! 드디어 생명체에 눈이 생긴 거예요. 눈이생겼다는 건 삶의 목적이 생긴 겁니다.
그전에도 생명체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생명체의 대다수는 영양분을 자가 합성하거나, 외부에서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비유하자면 그냥 입을 “아” 벌리고 바다를 떠다니는 게 다였어요. 그런데 눈이 생겼으니 그에 따른 여러 변화가 나타난 거예요.
일단 눈이 달린 포식자가 피식자를 쫓아갈 수 있게 된 거죠. 눈이 달린 피식자는 포식자를 피해서 도망갈 수 있게 되었고요. 쫓고 쫓기는 역동성이 생태계에 생긴 겁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시각 정보를 주고받다 보니 생명체의 색깔, 모양도 다양해지고 또 측정도 가능해진 거예요.
김상욱 : 진짜 ‘눈eyes’을 말하는 거죠?
강양구 : 저도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왜 5억 4,200만 년 전에는 이름이 없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화석이 발견되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시점에 생물 다양성이 증가한 건 이미 과학계에서는 합의된 사실 같아요. 이렇게 약 5억4,200만 년 전에 지구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이 엄청나게 증가한 걸 과학계에서는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고 부릅니다.
이정모 선생님 말씀처럼 눈의 등장과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연결하려는 시도도 있더라고요. 앤드루 파커의 《눈의 탄생》(뿌리와이파리, 2007)이 대표적이죠.
이정모 : 캄브리아기 대폭발 전에도 생명체는 분명히 있었어요. 센티미터 이하 크기의 작은 생명체였을 테고, 그나마 골격이 없어서 화석으로 남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그 다양성 면에서 캄브리아기 대폭발 이후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을겁니다. 그리고 그때 앞에서 얘기한 대로 눈의 등장이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었죠.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캄브리아기대폭발 때 등장해 고생대의 대표 동물인 삼엽충의 눈을 상상해서 만들어 봤어요. 그럴듯해요. 개인적으로 나는 인간이 이만큼 지구 생태계를 지배하게 된 것도 어떤 생명체보다 좋은 시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시력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영장류인 침팬지와도 비교 불가거든요.
김상욱 : 노동의 시간을 놓고서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도 던져 보고 싶어요. 두 덴마크 저자가 쓴 《가짜 노동》(자음과모음, 2022)을 읽고서 충격을 받았는데요. 그 책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우리 노동이 진짜 사회에 필요한 일인가?” 이런 의문을 품고서 20세기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많아요. 1차 세계대전 때 젊은이가 모두 전쟁터에 있었는데도 사회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생산성은 유지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생산은 더욱더 늘어났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1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일을 절반만 하더라도 사회의생산성을 유지하는 데에 무리가 없어야 해요.
그런데 여전히 100년 전처럼 하루 8시간에 주 5일 일하고 있고, 종종 야근하며 심지어 휴일에도 일터에 나갑니다.
이 책은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의 핵심에 ‘가짜 노동’이 있다고 말해요.
쓸데없는노동이 많아졌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일의 노예처럼 산다는 겁니다.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쓸데없는 노동은 주로 지금화이트칼라 직종이 하는 일이에요. 필요해서라기보다 ‘일해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놀 수 있는데도 일을 만들어서 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게 만들어진 일들이 가짜 노동입니다.
강양구 : 그걸로 밥벌이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를 예쁘게 꾸며 주는 회사도 많더라고요.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프로젝트 수주를 해야 하는 기업은 일단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를 제작하고서, 상당한 대가를 지불한후 예쁘게 꾸며 달라고 의뢰한다고 해요.
정말 사회 유지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이죠. 이참에 질문이 있어요. 유명한 물리학자들, 예를 들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리처드 파인먼 같은 과학자요. 그들의 학회 발표 사진을 보면 칠판과 분필만 있더라고요. 김상욱 선생님은 어땠어요? 물리학자의 학회에서 파워포인트 자료가 필수가 된 게 언제부터인가요?
김상욱 : 대학원생, 아니 초임 교수 때만 하더라도 학회에 가서 발표하면 칠판에 적는 일도 많았고, 투명필름에 손으로 써서 오버헤드 프로젝터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론물리학과에서는 종종 칠판, 분필이면 충분했거든요. 그러다 파워포인트 자료가 들어오면서 모든 게 바뀌었죠.
일단 파워포인트 자료 만드는 데에 시간이 많이 들어요. 거기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작업이 단순해지기는커녕 더 예쁘게만들기를 원해요. 텍스트보다는 그림을 그려야 하고 동영상도 제작해야 하죠. 때로 예술 작품이나 다름없는 다른 사람의발표 자료를 보며 기죽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학회 발표 자료를 방금 강 기자가 얘기한 파워포인트 제작 전문 업체에다 의뢰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죠.
강양구 : 그나마 다행인 게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자동으로 파워포인트 자료를 제작해 주는 기능을 오피스 프로그램에탑재한다잖아요.
김상욱 : 아니요. 그렇게 자동으로 만들어진 파워포인트 자료를 다시 또 예쁘게 손보는 과정이 생길 거예요.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좋아져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두고 보세요. 저는 《가짜 노동》의 문제의식에 상당히 공감이 갔어요. 우리가 하는 노동 가운데 실제로 필요 없지만 단지 ‘무언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노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토론을 조심스럽게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양구 : 그것과 관련해서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부키, 2023)의 한 대목에 감동한 일이 있어요. 저도 항상 툴툴거렸던 대목이었는데요. 팬데믹 때 우리가 깨달았잖아요. 의사, 간호사, 응급 구조사를 비롯한 의료계 종사자,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보육교사,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 교사 등이 없으면 가정, 공동체 그리고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요. 그런데 이 가운데 임금이 높은 사람은 의사 정도예요. 나머지는 모두 형편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직업은 최저 임금을겨우 넘는 수준이에요.
장하준 선생님은 이렇게 묻죠. 이런 직업을 놓고서 “핵심 일꾼”(영국)이라고 칭송했는데, “어떤 일이 ‘핵심’임을 인정한다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제일 좋은 보수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전적으로 동의해요. 《가짜 노동》의 문제의식도 통한다고 생각하고요. 우리의 노동을 사회 유지에 꼭 필요한 것으로 재편하자, 그과정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가짜 노동은 과감하게 없애자!
그러고 나면, 정말 한 사람이 해야 할 노동시간은 작을 거예요. 그럼 이정모 선생님이 얘기했듯이, 진짜 구석기 시대처럼 하루 3시간만 일할 수도 있겠죠. 맞다. 그러고 보니 마르크스도비슷한 이야기를 했네요. 1846년에 쓴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잖아요.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즉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한다.
저녁에는 소를 몰며,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도 해 본다.
그러면서도 사냥꾼도 아니고, 어부도 아니고, 목동도 아니고, 비평가가 되지않아도 된다.”
마르크스뿐만이 아니죠. 마르크스가 죽고 나서(1883년 3월 14일) 3개월 후에 태어난(1883년 6월 5일)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1930년에 쓴 에세이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100년 뒤, 그러니까 2030년에는 노동시간이 주당 15시간, 즉 하루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요.
지금이 인공지능AI 대폭발의 순간이라는 시각이 있어서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일이 더욱더 중요할 텐데요.
이정모 : 웹이 등장했을 때를 생각해 봐요. 스마트폰 때도요. 그때는 신기하고 편리했지만, 두렵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챗GPT, 정말 편리해요. 그리고 이번에는 두려워요.
챗GPT를 놓고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잖아요. 정작 제대로 사용하는 분은 드물어요. 나는 챗GPT를 이용하고부터 자료를찾는 시간이 엄청나게 줄었어요. 지금 나의 고민은 이렇게 챗GPT로 절약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입니다. 챗GPT가 아껴 준 시간에 내가 더 일을 하게 되면, 그건 불행한 일이잖아요.
강양구 : 이정모 선생님의 고민은 행복하게 들리는데요? (웃음)
이정모 : 맞아요. 내가 챗GPT를 쓰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질문의 중요성이에요. 질문을 잘하는 사람은 챗GPT의등장으로 자기 시간도 아끼고 생산성도 늘릴 수 있어요. 반면, 질문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챗GPT와 경쟁하는 상황이될 거예요. 결국 그들 자신의 노동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겠죠.
강양구 : 가만히 생각해 보면, 40대 중후반의 내 또래도 챗GPT 탓에 일자리를 빼앗길 것 같지는 않아요. 그냥 나이 들어서 후배에게 밀려나겠죠. (쓴웃음) 오히려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세대는 현재 고등학생, 대학생처럼 앞으로 사회에 진입해서 어떤 직업이든 경력을 쌓는 이들이 아닐까 싶어요.
음, 기자를 예로 들어 볼까요? 입사하고 수습기자로서 처음 연습하는 게 300자, 500자짜리 짧은 기사를 쓰는 일입니다. 사실만 단순하게 정리하는 기사죠. 그런데 처음에는 요령 있게 쓰지못해서 많이 혼나요. 요즘에는 아예 연차가 쌓여도 그런 기사만 반복해서 쓰는 디지털 뉴스 전담 기자가 언론사마다 아주많이 있죠. 이른바 ‘낚시 기사’들이요. 그런데 그런 기사는 사실 챗GPT 같은 AI가 훨씬 정확하게, 빨리, 많이 쓸 수 있어요. 장담컨대 디지털 뉴스 전담 기자는 금세 인간 기자에서 AI 기자로 대체될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수습기자로 경력을 쌓아야 하는 초짜 기자가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이죠. 그들은 1년, 2년, 3년 경력을 쌓고 나서야 베테랑 기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김상욱 : 기성세대도 마냥 안심하기에는 일러요. 지금의 AI 발전 속도를 염두에 두면, 아까 언급했던 수많은 가짜 노동을대체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물론 또 다른 가짜 노동이 만들어지겠지만, 지금 그 가짜 노동에 종사하던 기성세대도 일자리를 잃는 고통을 단시간에 피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강양구 : 가짜 노동도 없애고, 나아가 AI가 감히 넘보지 못할 인간의 자리도 지킬 수 있는 대안이 있어요. 앞에서도 언급했던 돌봄노동이요. 다수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간이 하던 일 가운데 돌봄노동을 AI나 로봇이 대체하기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돌봄노동은 전문 지식, 숙련노동, 감정노동, 육체노동 등 업무 성격이다양한 복합 노동이니까요. 게다가 각각의 노동을 쪼개서 그에 맞춤한 AI나 로봇을 만들기보다는 사람이 하는 게 효율도높고 비용도 싸죠. 요양보호사나 보육교사를 AI와 로봇으로 대체한다고 상상해 보면 그냥 사람에게 시키는 게 낫겠다, 싶잖아요.
더구나 앞으로 저출생-고령화 시대가 심화할수록 돌봄노동의 필요성은 커질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AI-로봇 시대에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지금 요양보호사는 고령의 저임금 여성 노동자, 보육교사는 젊은 저임금 여성 노동자가 전담하고 있습니다.
일단 요양보호사나 보육교사처럼 중요한 직업을 이렇게 박하게 대접하는 게 맞나, 이런 생각이 들고요. 또 바로 그런 저임금 때문에 요양보호사나 보육교사에 적성이 맞는 사람이 쓸데없는 가짜 노동에 종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올라가면 정말 세상이 바뀔 겁니다.
강양구 : 그럼 문학은 어때요? (웃음) 이제 문학의 시간을 짧게 얘기해 볼게요. 많은 독자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 최은영의《밝은 밤》(문학동네, 2021)에는 시간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시간을 흐르는 강물이라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얼어붙은 강물이라 보는 견해죠. ‘흐르는 강물’이란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흘러간다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일반적인 시각이죠.
한편 ‘얼어붙은 강물’로 보는 견해는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존재한다고 말해요. 운명은 정해져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주장이죠.
흥미롭게도 2년의 시차를 두고 나온 소설가 최진영의 단편 〈홈 스위트 홈〉(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3)에도 이런 구절이 등장하더라고요.
“이제 나는 시간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므로 말이 안 되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는 편이다.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육체의 눈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의 눈이 있어 미래를 보고 기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인생이 한 방향으로만, 그러니까 책장을 넘기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현재에서 미래로만 흐른다는 생각을 버렸다. (…)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미래는 어딘가에 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 (14~15쪽)
어떤가요? 앞에서 살펴본 ‘흐르는 시간’에 대한 비유가 적어도 문학에서는 바뀌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명현 : 몇 년 전에 강양구 기자와 피에르 바야르의 《예상 표절》(여름언덕, 2010)을 놓고서 이야기했던 일이 생각나네요. 흔히 표절은 과거에 있었던 작품을 참고하거나 베끼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바야르는 모파상이 최은영을 표절하는 일, 즉 ‘미래의 작품을 참고하거나 베끼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가정해 봅니다.
사실 이건 일종의 작품을 읽는 비평전략이에요. 오늘의 시점을 염두에 두고서 과거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미래의 작품을 과거의 작품이참고하거나 베꼈다는 접근까지 해 보면서요. 그럼 과거의 작품을 그것이 나왔을 때의 맥락에서만 읽을 때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지겠죠.
나는 이런 접근도 문학의 세계에서 과거-현재-미래가 한꺼번에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라고 생각해요. 비유하자면, 테드 창이 쓴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에 등장한 외계 문명 ‘헵타포드’가 바라보는 시간관이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다고 봐야죠. (웃음)
김상욱 : 〈네 인생의 이야기〉는 드뉘 발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Arrival〉(2015)의 원작이기도 한데요. 사실 이 소설은물리학자가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를 헵타포드 문명의 것으로 절묘하게 변주한 겁니다. 그래서 물리학자라면 이 소설과 영화에 열광할 수밖에 없죠. (웃음)
물리학자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아이작 뉴턴(1642~1727)의 방식과 윌리엄 해밀턴(1805~1865)의 방식이 있어요. 둘이 다릅니다.
뉴턴의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한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접근이에요.
물체가 움직이는 이유는 그것에 힘이 가해졌기 때문이죠.
이때 뉴턴은 시간을 촘촘히쪼개서 힘이 가해진 물체의 운동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추적합니다.
뉴턴은 그 변화를 연장하면 미래에 운동이 어떻게일어날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익숙한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과론적 세계관이죠.
해밀턴의 방식은 달라요.
예를 들어 물체를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면 낙하합니다.
해밀턴은 그 경우의 수가 무한한 것으로 봐요.
여기서 ‘액션action’이라는 물리량을 도입하는데요.
수많은 낙하의 경우의 수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액션이 최소화하는경로를 따라요.
여기서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모든 경로의 액션 값을 구해서 가장 작은 값, 그러니까 실제로운동이 일어나는 결과는 뉴턴의 방식과 똑같이 나옵니다.
결과는 같아요. 다만 해밀턴은 뉴턴과 다르게 목적론적 방식이죠.
‘자연은 액션이 최소가 되도록 운동하는 방식을 따른다’, 마치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이요.
강양구 : 그게 시간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김상욱 : 두 가지 방식이 아주 달라요. 뉴턴은 미분, 해밀턴은 적분이라고 이야기하면 많은 독자는 얼른 감이 안 오겠죠. (웃음)
뉴턴의 방식에서는 과거나 미래는 몰라도 됩니다. 현재만 알면 충분해요.
반면에 해밀턴 방식은 일단 모든 경로의가능한 수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도요. 그래야 최솟값으로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테드창이 해밀턴 방식을 헵타포드로 변주한 것도 이 대목이에요. 앞에서도 길게 얘기했듯이 우리는 항상 현재만 살기 때문에뉴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죠. 하지만 헵타포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알아서 결정합니다. 우리는 여러 변수가 개입되어서일어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해요. 하지만 그 모든 걸 계산해서 가장 일어날 가능성이 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럼 여기서 시간과 관계된 아주 문학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죠.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 현재를 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영화〈컨택트〉도 원작처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주인공(에이미 애덤스)은 딸이 죽는 미래를 보면서 딸을 낳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결국 낳아요. 여운이 남는 대사가 있는데, 이렇죠. “넌 미래를 아는데 지구에 왜 왔어?” 헵타포드는 답합니다. “미래가 정해진 건 맞아. 우리는 다 알아. 그런데 우리가 행동해야 그 미래가 오는 거야.”
이명현 : 나는 흐르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관을 최은영, 최진영 같은 한국 작가들이 먼저 제시한 게 반가워요.
김상욱 :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덧붙이자면, 뉴턴 방식과 해밀턴 방식은 의식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접근과도 연결이 됩니다.
보통의 컴퓨터는 수학자 앨런 튜링이 1936년에 제안한 ‘튜링 머신’에서 기원해요. 튜링 머신이 바로 뉴턴 방식입니다. 이 순간의 비트(정보)가 다음 비트(정보)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뇌나 혹은 그것을 흉내 낸 AI는 목표를 정해 놓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경로를 살펴본 다음에 최적의 경로를 찾아요. 해밀턴 방식이죠.
이렇게뉴턴의 방식과 해밀턴 방식이 우주에 모두 존재해요.
흥미롭게도 해밀턴 방식은 마치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우리가 목적 없는 우주에서 종종 목적을 찾아내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죠.
인간이 목적에 집착하다 보니까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강양구 : ‘나이가 들면 시간은 빨리 가는가’에서부터 ‘마약’과 ‘헵타포드’까지 달려왔네요.
이권우 : 시간에 장사가 없다잖아요. 낡아서 점차 소멸해 가는 우리의 시간을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한마디만 하고 싶어요. 살아 보니, 과거에 연연하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일이 없더라고요. 아픔과 상처, 아쉬움과 머뭇거림, 이 모든 걸 잊고서 지금, 오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이정모 : 지금을 좀 더 즐기기 위해서라도 인류의 시간을 지켜야죠. 우리보다 다음 세대가 좀 더 낫기를 기대합니다.
강양구 : 환과 고독을 챙기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웃음)
‘아토초 펄스 광’을 포착하는 방법을 만든 물리학자 3명에게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시간’만큼 실감 나지 않는 것도 없어 보인다. 공간은 그래도 감각하기 쉬워 보이는데 시간은 영 느끼기가 힘들다. 시간에 대해서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어쩌면 시간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나마 실감 나게 정량적으로 다룬 첫 번째이자 아직은 (다른 의견이 있겠지만) 유일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빛의 속도는 유한하다. 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려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빛의 속도를 넘을 수 없다.
즉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동시’에 두장소의 시간을 측정해 비교하면서 동시라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다.
동시라는 개념은 관념 속의 용어일 뿐 현실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을 정량적으로 가늠하는 방식은 시간 간격을 재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 간격은 물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등속으로 움직이면정지해 있을 때보다 시간 간격이 커진다. 속도가 크면 클수록 시간 간격도 커진다. 정지해 있을 때의 1초라는 시간 간격이‘똑딱’ 하는 동안의 크기를 갖는다면, 움직이면 1초라는 시간 간격은 ‘똑~~딱’이 된다. 1초의 크기가 속도에 따라서 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뜻이다.
얼마나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지는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방정식을 사용하면 간단하고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움직이는속도가 빛의 속도에 이르면 시간 간격은 무한대가 된다. ‘똑’ 하고 시작은 하는데 ‘딱’ 하고 마무리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시간 간격이 무한대가 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시간이라는 개념은 소멸된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강하면강할수록 시간 간격이 더 크게 늘어난다.
즉 중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흐른다. 얼마나 천천히 흐르는지는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방정식을 사용하면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이 발표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상대성 이론에 대한 수많은 검증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그의 이론이 틀렸다는 관측적 증거는 없다. 물리적 상황에 따른 시간 간격의 변화도 예측에서 어긋남 없이 관측되고 있다.
시간과 위치를 알려 주는 GPS 기기에도 상대성 이론에 따른 시간 간격의 변화를 보정하는 식이 들어 있다. 내비게이션에 쓰이는 정보를제공해 주는 GPS 인공위성은 지구 표면에서 한참 떨어진 우주 공간에 떠 있는데, 지구 표면에 비해 중력이 상대적으로약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지구 표면에서보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 그런데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이경우 보통 속도의 효과가 중력의 효과보다 커서 GPS 인공위성에서의 시간은 지구 표면에서의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천천히 흐른다.
따라서 두 효과를 동시에 고려해야만 지구 표면에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시간 간격이물리적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것은 일상에서 적용되는 실제 상황이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은 각자의 물리적 상황에 놓여 있다. 좀 비약을 하자면 우주 속의 모든 것은 각자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설정인데 같은 나이의 두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한 사람은 지구에 남고 한 사람은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속도가 빠른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하는 사람의 시간은 속도의 영향 때문에 지구에 남은 사람의 시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천천히 흐를 것이다. 그런데 중력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시간은 빨리 흐를 것이다.
이때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구 표면의 중력이 크지 않기 때문에 속도의 영향이 더 클 것이다. 만약 영화 〈인터스텔라〉의 상황처럼 블랙홀 주위를 돌고 있는 중력이 강한 행성에라도 다녀온다면 그 중력의 영향으로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의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를 것이다.
따라서 우주여행을끝내고 지구로 돌아왔을 때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에 비해서 지구에 남아 있던 사람이 더 나이가 들어 있을 것이다. 〈인터스텔라〉에서처럼 나이가 역전된 딸과 아버지의 만남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물론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와 블랙홀 근처 같은 강한 중력장이라는 환경이 있어야만 이런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시간은 미래로만 흐른다.
최소한 우리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엔트로피의증가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현재로서는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이 정도까지가 그나마 실감 나게 시간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인 것 같다.
시간에 대한 더 근원적이고 복잡한 탐구가 있지만, 아인슈타인의 설명만큼만족스러운 것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내가 시간을 실감하면서 즐기는 방식이 있다. 별을 보는 것이다. 앞서 잠깐 살펴본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빛의 속도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빛보다 빨리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빛의 속도가 한계치인 것이다. 빛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 하더라도 우주 공간이 너무 넓기 때문에 우주에서는 빛의 속도로 달려도 시간이 한참 흐르기 마련이다.
달까지는 1.3초 정도, 태양까지 가려면 빛의 속도로 8분 20초 정도 달려야 한다. 빛이 1초 동안 움직인 거리를 1광초라고 하므로, 달까지의 거리는 1.3광초이다. 빛이 1분 동안 달린 거리는 1광분이므로, 태양까지의 거리는 8광분이 조금 넘는다. 천체들 사이의 거리를 표시할 때는 빛이 1년 동안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거리인 1광년을 많이 사용한다.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다른 태양계까지의 거리는 4광년 정도 된다.
우주 공간에서는 이렇듯 ‘시간이 곧 거리’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시간을 실감하곤 한다. 어떤 별은 10광년 거리에 있고 또 어떤 별은 50광년 거리에있을 것이다. 또 다른 별은 또 다른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것이다. 10광년 떨어져 있는 별에서 10년 전에 출발한 빛은 우주 공간을 여행한 후 이제 내 눈에 다다랐을 것이다. 50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별로부터 50년 전에 출발한 빛은 지금 나에게 도달했다.
내가 보고 있는 달은 1.3초 전의 달이고 내가 보고 있는 태양은 8분 20초 전의 태양이다. 하늘은 온통 과거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각기 다른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출발한 빛이 나에게 도달하는 체험을 나는 매일 하면서 산다.
빛의 속도가 유한해서 우리가 보는 별들이 제각기 다른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은 천문학자들에게는 행운이다. 우주의 시간 흐름에 비하면 인간의 삶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이런 짧은 시간 동안 우주를 연구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천문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할 수 있고 천문학자들이 우주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천체들이 각기 다른 과거로부터 출발한 빛으로 지구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없지만, 이 순간 하늘에 널려 있는 천체들의 각기 다른 과거 모습을 보면서 연구를 할 수 있다.
1억 광년 떨어진 은하는 1억 년 전 과거의 은하의 모습을 보여 준다. 10억 광년 떨어져 있는 은하는 그 시간만큼의 과거의모습을 보여 준다. 은하의 일생 전체를 함께하면서 살펴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종류의 은하가 각기 다른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서 각기 다른 과거의 모습을 보여 주는 덕분에 천문학자들은 은하의 일생 전체를 다 보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밤하늘은 어쩌면 별들의, 은하들의 화석들로 가득한지도 모르겠다. 가끔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온통 과거의 흔적으로 가득한 밤하늘을 볼 때면 나는 ‘시간’을 만끽한다. 각기 다른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숱한 천체들이 한순간 내 눈에맺히고 뇌에 전달되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현실이야말로 시간을 실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큰 은하 중에 안드로메다은하가 있다. 어두운 곳에서 흐릿하지만 윤곽을 확인할 수 있는 안드로메다은하를 맨눈으로 보는 경이로움이 있다. 250만 년 전에 이 은하에서 출발한 빛을 이제 내 눈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광활함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곤 한다.
눈으로 직접 보는 재미도 있지만 안드로메다은하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나는 더 큰 감흥에 붙잡히곤 한다.
평면에 찍힌 안드로메다 사진이 있다고 하자.
이 은하까지의 거리가 약250만 광년이니 안드로메다은하로부터 250만 년 전에 출발한 빛이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서 한 장의 사진으로 포착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미있고 묘한 감흥을 얻을 수 있다. 안드로메다의 반지름은 10만 광년을 훌쩍 넘는다. 이 은하는 우주 공간 속에 어느 정도 기울어 있기도 하다. 안드로메다은하의 중심부까지의 거리와 기울어진 앞쪽 면과 뒤쪽 면 사이에는 몇만 광년의 거리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장의 사진으로 보고 있는 안드로메다은하의 모습은 사실은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출발한 빛들의 집합인 셈이다. 우리는 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도 각기 다른 과거의 빛들을 한 평면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과거의 흔적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차이가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나는 별을 보면서 시간을 실감한다. 사람을 볼 때도 때로는 그런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시간대를 여행하는 시간 여행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서로의 과거 흔적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는 시공간의 오묘함이 벅차게 다가오곤 한다.
나는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별을 보거나 별을 보는상상을 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시간 여행을 한다. 별을 보고 시간을 느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