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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Nov 18. 2023

AI 시대의 음악 감상

박정용 ‘Music for City Traveller’를 읽고

교보문고나 알라딘 웹사이트에 가면 베스트셀러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내 관심사를 키워드로 넣고 검색해 보면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할지라도 관련 서적들이 뭐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손쉽게 집에서 책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점에 가면 온라인으로 얻을 수 없는 경험을 한다. 평소라면 알지 못했고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책들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이란 얼마나 큰가! 얼마 전 서점 주인의 취향이 듬뿍 담긴 추천 책들이 가득 있는 서점에 간 적이 있다.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이르게 도착해서 시간을 때우러 가까운 서점에 들어갔는데 뭔가 전형적이지 않은 책들의 진열 상태를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분명히 이 서점 문을 나섰을 때 의외의 책 몇 권을 갖고 나갈 거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시선은 독립 출판물을 모아 놓은 코너에 가서 머물렀다. 그중에서 한 권의 책을 집어 들고 찬찬히 읽어 보았다.

홍대 앞에서 벨로주라는 공간을 14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저자를 나는 알지 못했다. 인디 음악과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다는데 힙하고 트렌디한 것과 거리가 먼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취향이 독특한 책방 주인 덕에 나는 벨로주라는 양반을 만나 그가 쓴 책을 통해 보석 같은 곡들을 소개받았다. 그가 삿포로라는 도시를 여행했을 때 들었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삿포로에 어울리는 오래된 음악들,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던 운명의 올드팝들을.


첫 장에 나온 추천곡은 1960년대 사이키델릭 록의 대표 주자로 큰 인기를 얻었던 Jefferson Airplane의 초창기 멤버였던 마티 발린의 'Hearts'라는 곡이었다. 재즈나 흑인 음악 쪽 취향인 나로서는 사이키델릭 록의 대표 주자라는 말에 난감해졌다. 이런, 어쩌지? 록은 별로인데..


그러다 결심했다. 까짓 거, 한 번 들어 보지 뭐! 내 취향이 아니라 평소 같으면 듣지 않았을 테고 알지도 못했던 곡이지만 여기서 이렇게 운명처럼 만났잖아? 그리고 대학 시절 공부하는 학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는데 음악 감상 소모임 활동은 꽤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서 취향이 아닌 음악도 찾아 들으려 애썼던 젊은 날의 모험심을 다시 일깨워 보기로 했다. 당시 음악 감상 소모임은 취향이 꽤 확고한 한 학년 선배가 이끌고 있었던 덕에 억지로 꾸역꾸역 내 취향이 아닌 곡들을 들어야 했고 그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에릭 클랩튼을 듣는다면 유명한 'Tears in Heaven'을 들으면 좋으련만 에릭 클랩튼이 그전에 소속되었던 록밴드 '크림' 시절의 60년대 곡들을 참고 듣는 식이어서 그 때 취향이 조금 확대되긴 했다.


그렇게 이 책 'Music for City Traveller' (박정용 지음)를 쥐어 들고 서점 문을 나섰다. 지친 하루 끝에 매일 한 곡씩 저자로부터 선물을 받는 느낌으로,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곡들을 (사실은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지만 그저 내가 알지 못했기에 이제야 발견하는 노래들) 들어야지', 결심하고 한국에서 데려 왔는데 스위스로 돌아오고 바쁜 일상에 잠식되어 이 책을 사 온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처음으로 책장을 펼쳐 삿포로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아, 나는 지금 여기 전기장판을 틀고 침대에 누워 있지만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 바깥은 혹시 눈 내리는 삿포로가 아닐까? 오래되고 고즈넉하고 조용한 도시를 헤매는 방랑자의 겨울 노래가 여기 흐르고 있구나. Hearts (Marty Balin), Classic (Adrian Gurvitz), The Night Won't Last Forever (Bill Labounty), Never Be the Same (Christopher Cross), Love Will Conquer All (Lionel Richie), Love Will Conquer All, Love Will Conquer All, 그리고 또 Love Will Conquer All... 라이오넬 리치의 이 곡이 너무 좋아서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이제 음악도 찾아 들을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음원 재생 사이트에서는 내 취향의 첫 곡만 입력하면 그 곡과 비슷한 노래들을 추천해 준다. 그렇게 알고리듬을 타고 형성되는 플레이리스트는 분명 나만의 것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빠져 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바쁘게 걸어가는 이들 각자의 개성적인 플레이리스트가 외로워 보이는 건 내가 옛날 사람 이어서일까. 인공지능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주는 시대에 여전히 홍대에서 라이브 클럽을 운영하는 주인장에게서 책으로 노래를 추천받는다는 건 뭘까. 시대에 뒤떨어진 고집일까, 지키고 싶고 그리운 것들에 보내는 나름의 찬사와 응원일까. 베스트셀러를 읽기도 힘들게 바쁜 시대에 검색어로 원하는 책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온라인 서점이 아닌 작은 책방에 가서 취향이 아닌 책들도 둘러보며 책방 주인의 취향을 훔쳐 오는 건 바보짓일까? 아니 애초에 책이라는 매체를 아직도 실물 형태로 구입하는 이 미련한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AI 시대를 얼결에 살게 되어 버린 모든 어른들의 당황한 영혼에 이 올드팝들을 보낸다. 세상은 이제 사람이 필요 없다고, 첫 검색어 몇 글자를 입력하는 소수정예의 인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고로운 일은 인공지능이 대신해 줄 테니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이제 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고하고 짐스러워도 여전히 책장을 훑고 음반 가게를 헤매고 사람을 만날 것이다. 인간이 빠져 버린 창작물에 다시 인간을 불러들이려는 미련한 사람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내가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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