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한번 보여주세요!
원페이퍼(one paper) 보고는 직장생활 중 수도 없이 쓰게 되는 보고서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원페이퍼 보고서는 형식이 거의 정해져 있다. 추진 배경, 추진 경과, 예상되는 문제점 및 기대효과처럼 말이다.
한 번은 과장님이 사무실 내 직원들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업무지시를 내렸다.
업무지시를 받은 사람은 '나'였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 업무는 내 사무가 아니었다.
과장님은 업무지시를 내리면서 말미에 쐐기를 박았다.
“만약 본인 사무 아니라고 한다면 사무분장을 바꿀 것이다.”라고 말이다. 결국 내가 해야 한다는 말이다.
행정업무라는 게 그렇다. 사무분장대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애매한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부당하거나 위법한 지시가 아니라면 업무지시를 받은 당사자는 하는 게 마땅하다. 그렇게 내 사무 아닌 사무인듯한 일을 받아 들고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자료를 구해 보고서를 썼다.
보통의 결재 과정이 그러듯 실무자가 기안을 하면 중간 관리자가 검토를 하고 최종 결재자가 결재를 한다.
업무지시 역시 거꾸로 그렇게 내려오는 게 상식이나, 업무지시는 중간 관리자 없이 받은 상태에서 중간 관리자를 거쳐 보고를 하려니 두 배 아니 몇 배로 힘이 들었다.
사실 현황 파악이 번거롭고 귀찮기는 해도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다만 그 결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보고서의 핵심이었다.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였으나 팀장은 번번이 못마땅한 반응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피드백도 주지 않은 채 “좀 세련된 거 없나?” “이거 말고 다른 레퍼런스는 없어?”라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놨다.
한 장짜리 보고서가 버전 9가 탄생하도록 나는 도대체 버전 1과 버전 9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과장님은 계속 언제 보고하느냐고 재촉하고 중간에 팀장은 계속 딴지를 걸고 이건 문제를 같이 해결하자는 것인지 훼방을 놓는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내 보고서 능력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잘 된 보고서를 찾아 형식을 바꿔보기도 하고 팀장이 원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료도 집어넣었다. 그러나 결과는 번번이 '다시'였다.
아홉 번의 퇴짜를 받는 동안 인격적 수모를 느낄 만큼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고 그날 이후 다시는 그 보고서를 만지지 않았다.
그 일 이후 나는 업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끊임없이 내 업무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자신이 없어졌다.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직장 생활하면서 이런 일 처음 겪는 것도 아닌데, 짬밥이 늘어서인지 그 정도가 심했기 때문인지 여전히 헷갈리지만 일을 하다가도 숨이 쉬어지지 않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등 비정상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함께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부서를 이동했다. 그러나 나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수백 번의 고민 끝에 병원 문을 두드렸고 스스로 '휴직'이라는 처방을 내리며 잠시 그 상황을 피해 갈 수 있게 되었다. 휴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의 병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솔직한 글쓰기가 필요하겠지만 여전히 그럴 수 없음에 안타깝다.
지난 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나도 당신도 미성숙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마음을 무겁게 흔든다.
언젠가 용기를 내어 그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오로지 내 속의 것들을 다 끄집어내어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