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건 분명 감정을 뒤섞은 질타다. 월요일 아침부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상사가 눈앞에 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보고도 끝나지 않았는데 토시 하나하나에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좋게 말씀하세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였다. 잠시 당황한 상사가 절규하듯 한마디 한다. “시비를 걸었잖아!” 순간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어느 직원이 자신의 직속 상사에게 시비를 건단 말인가. “보고드리는 거잖아요. 상황을 설명하는 게 무슨 시비입니까? 제가 어떻게 팀장님께 시비를 겁니까?” 되돌아온 그의 말에 입을 닫았다. “전달하듯 보고하는 게 시비지.”
이건 그냥 내가 싫은 거다. 좋지 않은 감정이 쌓였다가 그냥 어딘가에서 터져 버린 것처럼.
상사와의 이견 다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각자의 입장도 다르니 해결 방법도 다를 수밖에. 이해한다. 직장생활 20년인데 어디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었겠는가. 달라진 건 이제 그냥 입 꾹 다물고 죽어줄 수 없다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는 거다. 그나마 팀장이 아주 못돼 먹은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자신이 짜증을 부렸는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미안하다’라는 절반의 사과를 건넨다. 그의 사과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여기까지가 상황이다.
자, 그럼 문제는 무엇인가.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게 문제이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없지만, 안에서 곪아가는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상대가 아닌 자신을 탓한다는 것이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나.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상대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했을까?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며 안 찍어도 되는 낙인을 찍어대며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월요일 아침의 사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럴 땐 정말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나를 한없이 탓하고 싶다. 그러려니 넘어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진다. 타고난 기질 탓인지 못된 성격 탓인지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아프다. 점점 심해질 두통을 직감했다. 이럴 때 쓰는 방법은 두 가지다. 얼른 농도 짙은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던지. 두통약을 먹던지. 보통은 두 방법 다 순서만 바뀔 뿐 모두 처방하는 응급처치다. 커피를 내려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연다. 하상욱 시인의 시 한 편을 읽고 내 두통은 사라졌다.
누가 나를 싫어하면
나도 싫어하면 된다
나를 싫어하지 말고
이 시가 내 상황과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글감도 제공해 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근원적인 문제를 직시하기보다 어떤 상황에 괴로워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상황이 문제라 여긴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현상에 감춰진 ‘문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상황에서 문제를 구분해 낼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명확해진다. 상대가 나를 싫어하는 건 내 소관이 아니다. 상대의 바람에 나를 잠시 맞출 수는 있겠지만 사람 안 변한다. 다만 상대가 나를 싫어한다고 내가 나를 싫어하면 안 된다. 그저 그 상대와 내가 코드가 안 맞는 것뿐이다. 내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양희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돈다.
“그러라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