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던 20대 인생경험
나는 벌써 40대인데, 내 20대는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대기업에 입사해 봤고, 그곳에서 인정받아 봤고, 관리직 상사에게 정규직 제안도 받아봤다. 뒷다마로 인사과에 내 이야기를 흘리는 다른 계약직의 괴롭힘도 당해봤고, 예쁘다 일 잘한다 착하다 소리들으며 언니들의 귀여움도 받아 봤다. 그리고 아무생각없이 정규직 MD의 일을 내가 스스로 도와준다며 몰래 해보고 싶어 하다가 매출이 대박나서 상도 여러번 타봤다. 물건 잘 판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봤냐며 무려 계약직이 정규직분들 앞에서 간단한 브리핑과 설명도 해보았다.
그런 내가 대기업 3년간 경험하며 느낀 점은 능력이라는 것이다. 나의 능력이 된다면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믿어야 한다는 거이다. 아무리 공부 잘하고 성적이 좋아도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부정적 분위기를 주변에 발산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쥐뿔도 없는 실업계 고등학교와 전문대를 나온 시골 출신이었다. 이런 내가 대기업에 3년간 계약직으로 일하며 정규직을 제안받고, 월 매출 1억을 넘게 달성하며 매달 매출상과 매출상금을 받았다. 구성된 팀이 좋았던 행운도 있고, 당시의 시대에 맞는 카테고리를 맡게 되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나를 믿었다.
할 수 있다. 해 볼 수 있다. 된다.
내가 하면 된다는 그 믿음으로 행동하니 정말 이루어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더 시크릿>이라는 책을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당시 이룬 결과적 원인은 '믿음'과 '실천'이었다는 것을.
나는 2004년도에 전문대 졸업을 하고 몇달 후 일산으로 독립했다. 성인이 되면 용돈을 끊겠다는 부모의 말에 직장을 구하고 집에서 가장 먼 5시간 거리에 첫 직장을 잡았다. 그런데 그 곳의 사장은 변태였고 바람둥이라 회사 여직원들에게 개별 연락을 하고 찍쩝대었다. 너무 불쾌해서 정중히 거절을 했는데 (아니 왜 시골에서 왔다고 무시하지? 우리집에 와서 가구를 보고는 사주겠대. ㅋㅋ ) 다음날 실장이면서 사장의 여자친구이던 사람에게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일주일후 그녀는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수습 3개월도 채 채우지 못하고 나는 첫 직장에서 짤렸다. 작업을 거는 사장의 작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여자친구이던 실장에게 괴롭힘도 당하고 왕따도 당하고 무시도 당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내가 초중생때 경험한 일에 비하면 너희는 새발의 피다.' 라고 생각하며 쿨하게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수습기간이라 퇴직금도 없고 정부지원도 없던 때였다. 집에서 5시간 거리에 회사에서 짤렸는데 막막하긴 마찬가지. 그때 같이 회사를 다니던 친한 언니도 곧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언니는 나의 기분을 위해 비싼 초밥집, 패밀리레스토랑, 백화점 빵집 등을 데리고 다니며 나를 먹이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쁠지 모르니 배부르게 먹이고 기분을 풀어주신게 아닌가 싶다. 요즘 특히 당시 이 언니의 배려가 너무 감사하다. 어릴땐 몰랐던 언니의 챙김이 너무 감사하고,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이런 배려가 쉽지 않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돈을 벌어보니 언니가 얼마나 많은 돈을 나에게 쓰면서 먹어라! 먹어야한다 하며 배려해 주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겨우 회복한 나는 두번째 회사를 취업한다. 작은 썬그라스 회사였다. 젋은 친구들끼리 대기업에서 만나 퇴사를 하고 사업을 시작한 케이스였다. 나느 거기서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L기업 쇼핑몰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사업을 하게된 스토리를 나에게 말해 주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그들이 말하는 L기업을 잘 알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음악CD등을 그 기업이 국내 최초로 온라인 쇼핑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 기업에 취업을 꿈꾸기 시작했고, 몇달후 일산에서 서울 강동구 번동으로 이사했다. 번동 아파트에 살던 둘째이모가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집을 비워야하는데, 빈집으로 둘 수 없어 내가 들어가 살아도 된다며 어머니가 물어봐 주신 덕이다. 덕분에 나는 관리비만 내며 그집에서 살 수 있었고, 내가 취업을 희망하는 회사가 지하철 30분 거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면접 보던날 나는 특별히 준비한 것도 없는데 마음속에 확신이 들었다. 이 곳에 내가 출근 하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같이 면접을 보러온 언니들은 하나같이 취업을 안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실업급여를 받기위해 면접만 보러온 언니, 결혼을 앞두고 6개월만 다니고 싶다는 언니, 그냥 여기서 다들 도서실 분위기에 일하는 것 보니 취업 안하고 싶다는 언니는 면접전에 가버리기 까지 했다. 총4명이 왔는데 나만 취업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면접도 전에 나는 확신했다. 내가 취업되겠구나.
면접관은 잘 안다. 어떤 분위기 인지. 면접 태도에서 이미 그 분위기가 나온다. 나는 절실했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언니들은 모두 성격도 좋고 사람도 좋아 보였지만, 그들은 이 회사에 취업의사가 없었다. 나는 달랐다. 이전에 두 작은 회사에서의 경험치가 있었기에 큰 회사인 이곳에 꼭 취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면접도 착실히 하고, 집에서 가깝다는 것도 강조하고, 열심히 배워서 일하겠다는 의견도 말했다.
바로 입사 통보를 받고 출근했고, 다니고 있던 아르바이트 가게에도 직원을 구할때까지만 일하겠다는 말을 했다. 혹시나 싶어 한밤중에만 일하는 자동차 극장이었고, 집에서 도보로 5분거리에 주말극장이라 금토만 상영하는 경우가 많아 가능했다. 주5일제, 금토 야간 아르바이트. 상황이 그렇게 흘렀는데 나는 그때 일과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여튼 대기업 계약직에 2년으로 들어갔다. 2년차에 팀 구성을 잘 만났고, 상사인 대리님이 무척 좋으신 분이라 편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잘 지냈다. 3년차에는 팀장님이 '정규직 염두에 두고 있으니, 딱 1년만 견뎌라' 라고 귀뜸도 해주셨다. 나에게 MD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옆에서 대리님보면서 잘 배워두고, 백화점이나 창고도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L기업 쇼핑몰에서의 3년간 근무하면서 좋은 추억이 많다. 그곳에서 스노보드를 처음 경험했고, 워크샵이 어떤 것인지도 느꼈다. 그리고 나쁜사람은 어떻게 걸러야 하는지도 알게되고, 철없던 20대 경험한 사회생활의 쓴맛도 그곳에서 봤다.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그곳에서 배우고 나왔다. 그만둔지 3개월만에 다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철 없던 내가 아직은 못간다고 덜 놀았다는 대답을 했다. 6개월 후에 또 연락이 왔다. 연말 파티때 오라는 놀러 오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나는 그날 스키장에 많은 눈을 보며 또 가지 않았다. 철없던 20대. 다시 찾아주는 대기업의 관리직 분들의 요청에 나는 불응한 것이다. 그렇게 인사과에는 내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곳 사이트에 한동안 임직원 프리미엄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한번 직원은 영원히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그 회사의 배려가 무처 고마웟고 다시 입사하고 싶다고 전화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 회사가 요즘 쇼핑에서 큰 두각을 보이고 있지 않다. 네이버 쇼핑, 쿠팡 등에 밀려 주가도 많이 하락했다. 내가 근무하던 당시에는 백화점 물건을 온라인에서 판매하고, 착한 가격에 이월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들이 국내최초로 이 쇼핑몰에 집중하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항참 성장하는 시기에 그 회사에 있었고 덕분에 그 행운을 같이 누릴 수 있었다. 나를 믿어고 회사를 믿었고, 함께 일하는 분들을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그만두고 나를 괴롭히던 사람도 그만두고 다시 나를 불러주셨지만 응하지 못한 후회는 지금도 가끔 한다.
친정 아버지도 가끔 그때 왜 다시 불러줄때 가지 않았냐고 아쉬워하시기도 했다. 나도 대기업인데 내가 너무 배가 불렀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다. 많은 혜택을 무시하고 나의 자유를 선택한 것에는 큰 후회가 없지만, 대기업의 혜택을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자, 전문대 2년제 졸업자가 누릴 수 있다는 경험담도 40대가 된 지금은 큰 이야기 거리가 아니였을까? 생각해 본다.
당시 계약직은 정규직이 하늘의 별따기라며, 잠시 일하다가 그만두거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나는 이미 팀장님께 정규직을 염두에 두고 대리님을 따라다니며 배워라. 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다른 계약직 사람들과는 입장이 좀 달랐다. 그런 순간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입사했다. 처음엔 좋은 사람인줄 알았지만 너무 친하게 들이대는 그녀는 내 상여금 봉투를 열어보고 여기저기 그 금액을 말했으며, 인사과에 가서 같은 팀인데 왜 상여금이 다르냐는 말까지 흘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맨날 논다느니, 일을 안한다느니 험담과 욕도 한 것을 알고는 나는 화가 나서 주체를 할 수 없었다.
그만두기 몇주전에야 대리님이 '왜 그러냐, 이유가 뭐냐?'며 1:1 면담을 요청했고, 사실대로 이야기 했다. 그녀의 입 때문에 나의 인사고과가 바닥이 났고. 나는 이미지가 떨어졌다. 계속 다닐려고 하니 너무 힘들다. 나는 괴롭힘에 저항력이 없는 것 같다. 몇일전에는 공황장애 증상으로 지하철에서 기절했다. 이대로 숨쉬기가 너무 힘들다. 살고싶다고 말했다.
대리님은 제대로 알아보시겠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고. 대리님은 내말의 사실을 확인하고는 내편을 들어주셨다. 3개월의 계약기간이 남은 뒷다마의 그녀를 자르고 나를 다시 부를테니, 3개월만 쉬다가 오라고 했지만 나는 가지 못했다. 3개월은 나에게 치유의 시간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9개월을 함께보낸 뒷다마 그녀의 행동에 나는 무척 화가 나있었고, 믿었던 사람마져 나를 믿지 않았다는 생각에 배신감도 느꼈던 듯 싶다.
3년이 시간이 흐르고 다른 회사에 다니면서, 그때서야 대리님과 팀장님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큰 회사의 혜택이 얼마나 내게 편안함을 제공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계약직을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처럼 잘 대해주셨다는 것도 뒤늦게 깨닿고 좋은 회사였다는 걸, 내가 좋은 사람들과 3년간 일했다는 것을 느끼고는 후회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쉬움섞인 말이 와 닿기도 했다. 3년이 지나서야 사실 2번이나 3개월차, 6개월 차에 연락이 왔는데.. 내가 가지 않아다는 걸 부모님은 알게 되었고. 내가 나쁘게 회사를 퇴사한게 아니라는걸 아신 부모님은 그래도 자식농사 잘 지었다는 것. 대기업에서 두번이나 다시 나를 부른것은 내가 일을 잘 했다는 걸 뿌듯해하셔다.
지금도 가끔 3년간 다니며 받았던 매출상장을 열어본다. 내가 그때 정말 열심히 일에 진심이었던 것이 그립다. 그렇게 일만 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해준 그 회사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때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정해진 시간내에 일을 마치면 즐길 여유도 있었고. 내가 무슨 작업을 해도 믿고 맡겨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다녔던 이 회사가 계속 사업이 번창하기.
'내가 이 회사를 다녔잖아!'라고 말할 수 있길.
그리고 전하지 못한 김대리님에 대한 감사하다는 인사.
몇년전 김대표이사님이 되신 당시의 팀장님께도 감사 인사를 조용히 전한다.
두 분, 항상 어디서든 건강하세요.
철없던 20대의 저를 가르쳐주시고 품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