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리, 기억을 기록해 둡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다. 1980년대 태어난 내가 소외양간 한 켠에서 살았다는 말을 하면 다들 믿질 못한다. 약간 티브이 프로그램 '아형'에서 이수근 님이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면, 아형 멤버들이 그 말을 믿지 못해서 결국 "아버님과 통화 연결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정말 이수근 님 아버님께 전화를 연결하여 답변을 듣고는 다들 믿을 수밖에 없는 그 사실. 개그맨이라 이수근 님의 어릴 때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이야기도 비슷하다. 믿지 못하지만 실제 했고, 우리 엄마가 증명을 했다.
나는 현재 아이를 한 명 키우고 있다. 내 아이는 궁금한 것이 많다. 나는 어릴 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그 이야기보따리들을 내 아이에게 하나씩 풀어놓고 있다. 세상에서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다고 한다. 내 이야기보따리에는 '소외양간 한편의 지푸라기 집'이라는 기억도 담겨 있다.
(이집은 '지푸라기 위에서 자는 소꿉놀이 같은 집'이라는 말을 꺼내니 엄마가 놀랬다. 그걸 기억해? 니가 3살인가 4살때 살던 곳인데? 라길래 어. 나 다 기억나. 놀다가 잠들면 엄마가 지푸라기랑 이불을 엎어줬잖아. 폭신하게 깔아야 한다며 지푸라기 새거 더미 아빠가 가져오면 다시 깔아준다고 일어났다 눕고. 그런거 다 기억난다며 줄줄줄 설명하니 엄마가 놀래셨던 일이 있다. 왜 그걸 다 기억하냐며.. )
소 외양간으로 이사 간 이유는 부모님이 수저만 들고 결혼을 하신 탓이기도 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너무 어렸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 후 돈을 벌고 싶어도 제대로 벌 수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동생이 태어나도 번듯한 셋방 하나 구하기 힘든 게 우리 집의 현실이었다.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해서' 돈 빌리는 것도 당연히 갚지 못하기에 미안해서 못 빌리는 지경이었달까.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래도 자존심과 독립심이 있어 어떻게든 우리 끼니는 먹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오셨다고 한다. 내 기억엔 그렇게 가난한 우리 집이 조금씩 돈을 벌고 모으기 시작해서 작은 창고를 집처럼 개조해 살게 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했고, 돈을 벌어 집 앞에 작은 논을 빌리거나 사셨다. 얼마 전 네이버 지도로 찍어보니 여전히 그 창고는 남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유는 내 기억이 정확한지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지도의 로드뷰를 보여주며 내 아이에게 '엄마가 살았던 창고집'이라고 이야기했다.
(창고집은 이제 없어진 듯하다. 아파트가 들어선 듯... ㅠㅠ)
소외양간에서 창고를 개조한 집. 쥐가 너무 많아 고양이를 키울 수밖에 없던 집. 그 집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데리고 집을 떠나고서는 얼마 후 우리 가족도 도시라고 생각되는 마산으로 이사를 나왔다. 낮고 작은 다락방이 딸린 월세방이었다. 화장실이 집 내부에 없어 2층 사람들이 모두 같은 화장실 하나를 사용하는 집이었다. 그 집이 여전히 있나? 2년 전쯤 또 네이버 지도로 찍어보니 여전히 그 집은 있었다.
우리 가족이 이사 가서 많은 일이 있었던 그 다락 월셋집은 현재 주소지로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북 3길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봉암북 3길에서는 집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인 '제30호 어린이공원'을 통해서 봐야 집이 보였다. 집 창을 통해 놀이터가 보이지만 놀이터로 자주 놀러 가지 않았다. 동네에 이상한 애들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애들 무리는 봉암북 10길 쪽에 살았는데, 나름 그 동네에서는 좀 산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블록이었다. 놀이터에 오면 늘 힘이 없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놀이터 모래에서 발견한 동전'을 뺏는 못된 애들이었다. 하루는 내 동생이 500원을 발견했고, 놀이터 모래에 숨긴 후 나를 데리러 집으로 왔다. 같이 놀이터 가서 내가 동전을 건져내 가 그 나쁜 아이들 무리는 나를 때리고 꼬집고 동전을 쥔 손을 일부러 뜯어내서 결국 500원을 가져가고 말았다. 그리고는 '재수 없다'는 말로 내 얼굴과 머리와 몸에 수시로 모래를 던졌다.
그 아이들무리는 질이 나쁘고 버릇이 없다는 건 나도 동생도 이미 알고 있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유명했다. 또래보다 덩치크고 살도 퉁퉁한 한 여자아이가 대장이였다. 성격도 더러웠고 딱 자기엄마 닮아 동네에서 인심이 없는 가족이었다.
여튼 당시에 힘이 없고 가엽은 내 동생은 모래 속 동전을 발견하고 나를 불렀고, 나는 알기에 고민도 없이 동생과 함께 놀이터로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500원이 뭐라고. 진짜 꼴랑 500원.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네는 그만큼 가난했다. 500원에 여러가지 일이 생길 정도로. 별 좋지 않은 일을 당하고 이렇게 40이 넘어서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다락이 있는 집. 그 동네의 분위기는 그랬다.
(몇날 몇주를 당하다가 하루는 따라가서 이 여자애를 힘씬 두들겨 팼다. 울면서 집에간 그 아이는 엄마가 나와서 나의 뺨을 때렸는데 나가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때 동네 어르신들이 먼저 그집 딸이 날 몇날몇일 괴롭혔는데 '애들 싸움 사이에 어른이 껴서 지롤한다'고 혼을 내셨다. 덕분에 자존심 구긴 그 모녀는 더이상 나를 건들지 않았다. 빰을 맞고 넘어진 나는 울지 않았다. 이미 속이 풀릴정도로 그아이를 패놨기 때문이다. 내 편을 들어준 어르신들은 3~4분이 자주 그 자리 평상에 앉아 수다를 떠시는 어르신들이었는데. 늘 우리 모습을 보셨나 보다. '저집 여편네 성격이 지롤맞으니, 저집 딸이랑 엮이지 말아라'라는 말을 하며 먼지 묻은 내 등을 탁탁 털어주셨다. 동네 인심은 딱딱했지만 그 사이사이 좋은 분들이 계셔서 살만했다. 뭐. 당하고 살기만 한건 아니니 안타까워 하지 마시길. 솔찍히 그녀가 나보다 덩치도 나이도 많았지만, 사실 나도 덩치가는 동네에서 두번째로 컸기에 더이상 그녀의 태클은 없었다. )
분명 나도 동생도 잘 느끼는 매서운 산동네였다. 산아래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있는 봉암동. 그 동네는 어린 나와 동생에게도 맵고 나쁜 기억이 있었지만, 분명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부모님에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또 다른 기억의 보따리가 있다. 다락과 계단, 틈 사이의 빛을 기억하기에.
하루는 단지 매서운 동네, 좋은 소리 못 듣고 밖에서 또 그 무리들에게 모래 던짐과 꼬집힘, 때림을 받고 들어온 날이었다. 엄마는 모래 투성이라며 씻어라, 밥 먹어라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분명 엄마도 밖에서 좋은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동생은 눈치껏 엄마의 말에 따라 빠릿빠릿 움직였다. 반대로 나는 밖에서 겪은 일이 너무 속상해서 밥이 먹기 싫었다. 그런 내게 엄마는 더 화를 냈다. 나는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을 했는데,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엄마는 더 화를 냈고, 결국 먹지 말라고 화를 내다가 분에 못 이겨 매를 들었다. (그때는 매 드는게 당연한 육아 분위기였으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길. 동네가 정말 매운 동네였다....) 분이 좀 가라 앉았지만, 밥 먹는 동안 내 얼굴이나 꼴을 보는 것은 싫었는지 다락문을 열고 올라가라며 밀어 넣었다. 돌로 된 좁은 계단은 내게 친절하지 않아서 무릎이나 정강이가 모서리에 부딪혔다. 매 맞아 아픈 것보다 소리 내 우는 것도 듣기 싫다고 조용히 입 닥치라던 엄마의 고함이 여전히 들리는 듯하다. 그때 내게는 아무도 친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한 사람은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나는 더 유달리 기억이 선명하다. 4살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 기억한다. 상황과 표정, 위치나 배경 그림들을.
성인이 되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때 봉암동 살 때 우리 집은 가난했어? 엄마는 밖에서 공장 다니고 남에 집 일할 때, 주인들이 화를 많이 냈어? 어땠어? 엄마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엄마는 그때 힘들 때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풀었어? 친구는 있었어?"
엄마가 나빴다. 나를 학대했다. 그런 물음이 아니었다.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어? 엄마는 힘들 때 누구에게 하소연이라도 해봤어? 엄마는 힘들 때 도와줄 사람이 곁에 있었어?' 그렇게 물었다. 엄마는 그렇게 묻는 내게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철없는 나는 그때 당시 8살, 9살, 10살이었는데 엄마는 그때 어떤 생각으로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보따리는 이런 식으로 채워진다.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시 어떤 생각과 기억으로 살았는지, 도움을 청하거나 받을 수는 있었는지. 주변사람들은 어떻게 당신들을 대했는지.. 그런 것들이 늘 궁금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이가 가장 궁금했다.
엄마가 나에게 화를 내던 날, 그날 엄마는 밖에서 정말 괜찮았어? 무슨 일이 있었어?
나의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표현하자면, 해외에서 잠시 카페에 간 내가 눈 앞에 안보이자 '내 아이가 사라졌다'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다리에 힘이 풀려 펑펑 우는 딸바보 엄마다. 그때 나는 일본어 전공자이고, 이미 24살은 되었는데 말이지.... (하여튼 이것도 담에 썰 푼다) 엄마랑 아빠는 자식들을 너무 사랑했다. 그걸 알기에 나는 엄마나 아빠를 원망하기 보다 그때 좀 많이 속상하고 서운했지만, 엄마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랬는지가 궁금해질뿐이다.
단지 상황이 너무 나빴다. 곱게 큰 엄마는 결혼을 잘못한 것 같다. 근데 또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랑 내 동생 때문에 엄마는 견뎠다. 이미 본인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당장을 살고 잘 살고 싶고, 굶지 않고 살고 싶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목표 하나로 살았고, 그래서 다른 건 돌볼 틈이나 생각할 틈이 없었다고 한다.
엄마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원망하거나 속상했다, 나에게 사과해 달라.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단지 엄마가 오해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 진짜 그때부터 현재의 나를 다시 생각해 주길 바랐다. 엄마가 알고 있는 그 아이는 내가 아니었다고, 나는 엄마 생각과 달리 잘 살아가는 아이였다고. 엄마를 힘들게 하거나 엄마의 의견을 반대하는 아이가 아니었다고. 나는 스스로 해내고 싶어 하는 아이였고, 그래서 말을 못 해서 설명을 못하고 꾹 참아서 늘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일주일정도 함께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묵혀둔 이야기들을 풀고 오해도 조금씩 풀어간다. 엄마가 기억하는 40년짜리 나에 대한 기억은 제대로 맞는 기억이 잘 없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도 엄마는 잘 모른다. 애당초 잘 알려고 하시지도 않았다. 엄마는 요리는 취미가 없는 거 같다는 생각에 나도 별로 요구한 적이 없다. 해주시는 대로 그냥 먹고 없으면 없는 대로 먹었다. 어릴 때 비하면 진수성찬이고 이만큼 배부르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늘 자주 수시로 그 다락방의 차가운 돌계단.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 잠긴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동생과 밥을 먹는 엄마가 떠오른다. 동생은 엄마 눈치를 보며 밥을 먹고, 엄마는 화가 잔뜩 나서 씩씩 거리다가도 동생보고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밥 먹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떠오른다. 동생은 후딱 먹고 '언니도 밥 먹으라고 하자'라고 말을 꺼내는 날도 있고, 엄마가 너무 화가 나 있다 싶으면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사주셨던 그림책을 꺼내고 읽었다. 작은아씨들, 조가 남장을 하고 연극을 준비하는 모습을 봤다. 나는 우리 집에서 '조'처럼 혼자 튀는 아이다. 그래서 엄마가 힘든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다 보면 서러웠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엄마도 곧 다락방 문을 열 줬다. 문을 열기 전 그 차가운 돌계단에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통해 그림책을 읽던 때가 자주 생각이 난다. 나의 단단한 마음은 그때 갖춰졌다. 아마 엄마가 나의 단단한 마음을 갖춰주기 위해 하신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모든 경험은 성인이 되어 어떻게든 도움이 된 것 같다.
가끔은 차가운 돌계단이 싫어서 다락 위로 올라가 누웠다. 창고로 쓰이던 다락은 누울 수 있게 작게 공간을 마련하고 잠이 들기도 했다. 여전히 방으로 쓰긴 작고 초라한 장소였다. 초등학생인 내가 앉기에도 천정이 낮아 기어 다닐 정도로 낮고 작은 다락이었다. 그 다락에 올라가 있던 나는 점점 다락이 편해졌다. 조용히 책을 읽을 수도 있고, 티브이를 늘 틀어두거나 이야기를 조잘조잘하는 동생과 잠시 떨어져 나만의 공간이 생긴 듯했다. 이제 다락 계단의 틈은 나에게 출구나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그 모습을 보곤 다락을 내 방으로 바꿔주셨다. 묵혀둔 짐들을 어머니와 함께 정리하고 버렸다. 다 버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많이 버리시고 정리하셨다. 창고집은 월세방에 비하면 10배는 넓은 집이었는데, 월세방과 다락은 너무 좁고 작았다. 덕분에 아버지는 많이 버리고 또 버려야 했다. 어머니도 아까운 살림 다시 마련하기 힘든데 버려야 하니 아쉬워하셨다. 나는 그냥 내 방이 생긴다는 것 하나로 좋았다.
또래보다 성장이 빨라 작은 월세방 칸이 작아져 추가적인 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천자문을 줄줄줄 쓰는 나를 보곤 다락의 짐을 더 정리하고 한편에 책상을 넣어주셨다. 어디서 구한 나무 책상의 다리를 반토막 내고 앉을 수 있는 좌식으로 바꿔주셨다. 밝게 책을 봐야 한다며 조명도 설치해 주셨다. 어두워서 사용하지 못하던 다락방은 계단 문 밖에서만 계단 쪽 불을 켤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새로 달아준 불은 책상과 다락방 천장에서 제 역할을 잘 해냈다.
거의 다락에서 내려가지 않게 되지, 어느 날부터는 동생이 다락에 올라와 같이 옆에 누웠다. 내가 없을 때는 다락을 자기 방처럼 이용하다가 내가 오면 내려가는 식이었다. 나는 어느샌가 다락에 올라온 동생이랑 같이 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어주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느낀 감정은 동생을 챙기고 아껴야 한다는 느낌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이제는 다락방과 차가운 돌계단, 문 틈사이의 빛이 내게 서러운 공간이 아니었다. 동생과 함께하는 비밀의 공간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 동생은 어려서 유치원도 다니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비교적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학습이 빨랐던 나는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용돈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다. 두 살 어린 동생은 글을 몰랐고 책도 읽을 수 없었기에 아버지에게 용돈 받을 이유를 명확히 표기할 수 없었다. 결국 언니와 다르다며 울며 억울해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안타깝고 미안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내 학용품이나 만들기 용품을 살 때, 넉넉히 2개씩 4개씩 여분을 더 사두는 일이었다. 다락에 올려두면 다락에 올라온 동생이 보곤 그걸 사용하게 두는 것이었다. 굳이 챙겨주지 않아도 필요할 때마다 가져가 쓰니깐 부족해지면 채워두는 식이었다.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좋아했던 동생은 공책을 몇 권 가져가 인형의 집 꾸미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공책이 종이인형의 집이 되는 것이다. 몇 장을 붙여 침대와 이불을 만들어 종이 인형을 끼울 틈을 잘라 활용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공책을 사용하는 것을 봤다. '놀라운데? 신기한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생이 미안해하며 공책을 섰다는 말에 '괜찮다. 필요하면 언니가 더 사줄게'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동생의 종이인형 집은 공책 3권이 되어 꽤 두툼했다.
하교하고 오는 길이면 문방구점에 종이인형이 뭐가 있는지 새로 나온건 있는지, 내가 가진 용돈과 비교하며 구매할 것이 있는지 살피고 집으로 올라갔다. 용돈이 모이면 하교할때 종이인형을 사들고 집에 들어가 가위로 잘라주었다. 그럼 동생은 신나게 갖고 놀다가 혼자 있을때는 인형집을 만들어 정리해두곤 했다.
같이 동생이 그려둔 종이 인형집을 갖고 놀기도 하고, 내가 학교에서 배워온 만들기를 서로 공유하며 놀았다. 학교 준비물로 하나를 사서 수업때 해보곤, 하교하는 길에 하나를 더 구매해서 집에 들어가는 식이었다. 간식을 하나 사 먹으면, 동생에게 사줄 색종이나 색연필, 도화지 등을 구매하지 못하니 참았다가 동생이랑 같이 먹을 간식, 같이 쓸 만들기 용품 등을 샀던 것 같다.
꽤 종이인형이 모이고 더 이상 구매하지 말라던 어머니 지시가 있다보니, 어느날부터 걸었다 뺐다하는 종이인형 목이나 옷 걸이 부분이 짖어지고 떨어져 나갔다. 그럼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풀이나 종이 테이프로 붙여 달라고 하면, 나는 또 그 수리(?) 작업에 착수한다. 보통 우리자매의 놀이는 그랬다. 하루는 내 아이의 장난감을 자르고 붙이는데 오버랩되어 동생이랑 놀던 기억이 선명해졌다. 그리곤 이내 그때 우리가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가 생각났다.
단편적인 다락의 계단과 닫힌 문 틈의 빛은 상처인 기억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좋았던 기억으로 마무리가 된다. 때때로 기억이 나고 때때로 눈물이 나는 것 보면, 그때 전하지 못한 내 속마음이 여전히 맺혀 있는 것 같다. 글로 써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정리를 하고 나니 조금은 답답함이 담담함으로 바뀌는 듯하다.
가난해서 소외양간에 살 정도로 살림 자체가 없던 시절, 월세지만 번듯이 누울 공간이 있었지만 살기 힘들었던 동네의 분위기. 그 사이에서 느꼈던 소외감과 서운함. 어떻게든 나누려고 했던 따스함. 여전히 전하지 못한 미안함. 그런 것들이 기억이 되고, 감정이 되어 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엄마가 그때 시절을 이야기하며 '진절머리 나게 가난했다. 어떻게든 밥은 먹고살고 싶었다'라고 얘기할 때의 일이다. 사실 엄마는 그때 너무 힘들고 힘든데,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딱 실천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찍힌 우리 가족사진에서 엄마와 아빠는 비쩍 말라 뼈만 남았다. 그 사이에 나와 동생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건강하고 또래보다 키도 컸다. 잘 키우고 싶은 욕심과 소화되지 않아 먹지 못하고, 먹을 게 없어 굶어야 했던 부모님이 상냥할 수 없었다는 게 진실이다. 그래서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나와 동생을 먹이고 용돈을 주며 경제관념을 깨우치길 원하셨고, 책을 읽고 지식을 얻어 자신들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원하셨다.
그때의 가족사진을 보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아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이미 돌아가셔서 더 이상 여쭤보거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다.) 나의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면 이렇다. 진실은 먹고살기 힘든 우리 부모님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셨고, 단지 가끔 자신도 탈출구가 필요했다는 것. 그 탈출구가 어떤 방법이든 지금은 사용하면 안 되는 방법인건 맞다. 그렇다고 그 지나온 시간을 원망하고 사과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랬다고. 나는 그때 그랬는데 엄마가 이제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깐, 시간적 여유도 있으니깐 나의 이야기를 이제 조금 들어달라고 꺼내고, 엄마도 그때 그랬다고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는 우리 진짜 잘 살아왔다. 대단하다 서로 응원한다.
앞으로도 잘 살자고. 그때보다 지금이 더 먹고살기 편하기 깐, 앞으로도 잘 살 거라고 응원한다.
사랑하는 엄마.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때 당시 어떻게든 잘 살고싶어 노력했던 아빠.
그때 힘든 삶들을 견뎌줘서 고맙고,
그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해줘서 고마워요.
부모에게 과거의 일을 사과받는 자식은 드물고 거의 없다는데,
나는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사과를 받았어.
아빠가 밖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들어서 기억나고 다시 눈물나고,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해.
엄마가 얼마나 밖에서 진절머리나게 힘들었는지 들을때마다 지금 밥은 잘먹고, 따뜻히 누울 방이라도 한칸 있는것에 감사해.
부모님과 나의 경험담 보따리를 현명하게 잘 풀어서 손주 잘 키울께요.
나도 잘 살아갈께요.
엄마도 힘들었던 그때 그 기억들 완전히 털어내고, 좋은 기억과 기분으로 살아가시면 좋겠어. 여전히 남아있는 삶의 흔적이 주름처럼 패여 있는 것 같아. 어서 털어내고 뽀얀 새 살로 덮어두면 좋겠어.
아빠도 이미 세상에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도 못하고 떠나신게 너무 아쉽지만, 가시기 전에 한달정도 우리 서로 이것저것 대화하고 오해풀고 봄꽃피는 날, 부녀 여행해서 좋았어. 아빠에게 미안하다 사과하는 나에게 '괜찮다, 와줘서 고맙다. 아빠가 더 건강하지 못해 미안하다. 밥은 잘 먹어야 한다.' 라는 그 한마디가 늘 마음에 남아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매 끼니 넘치게 잘 챙겨먹으며 살고 있어요.
다락과 계단, 틈으로 비치는 빛이 상처가 아닌 추억이 되는 오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