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는 고철 일을 진짜 시작하셨다. 생각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싫어하던 내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기 싫어도 돈이 되는 일은 이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혼자 계속 노력하셨다.
거래처를 늘리기 위해 일 없는 시간에는 여기저기 공장을 다니거나 새로 생긴 공장, 또는 고철장에 가서 소개를 받기도 하고 다양하게 노력하셨다. 고철 일이 없어도 해당 공장에 고칠 부분을 해드리겠다며 무료로 고쳐주시고, 다음 고철 계약은 아버지에게 부탁한다며 인사를 남기고 오시곤 했다 한다. 그만큼 돈이 없기에 몸으로 때우셨다. 나도 몸으로 때우시는 아버지를 주말마다 봤다.
토요일 일요일도 구분 없이 일이 있거나 공장에서 수리를 요청하면 거의 무료에 가깝게 일을 하셨다. 재료비만 주셔도 그때는 일이 있어서 감사하게 일을 하셨다 했다. 그중에서 좋은 사장님들이 아버지가 고철 사업자를 내고 일을 시작하자 거래처가 되어 주셨다 했다. 있던 작은 트럭으로 시작하시다가 거래처가 조금 늘어나자 트럭이 작았다고 한다. 왔다 갔다 기름값이 더 든다는 생각에, 또 고철장에서 너무 조금만 실어오니 큰돈을 벌려면 큰 트럭을 사라고 했다.
처음 고철일을 하고 물건을 실어서 시작하시고 얼마가 지나다 고정거래처가 하나 생겼다고 하셨다. 사장님은 인심도 좋으시고 사람도 좋으셨다. 거래처 사모님도 같이 일을 하셨는데 사람이 역시 좋으셨다. 이것저것 고철일에 대해서 자주 고철장에 물어보시고 직접 실천하셨다.
그러다가 고철장을 운영하면 더 빨리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에 목표도 설정하게 되셨다. 아버지의 작은 트럭은 아버지 꿈만큼 커야 했다. 4명이 타는 작은 트럭을 처분하고, 폐차 직전의 조금 더 큰 트럭을 구매하셨다.
우리 집은 자동차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을 시작하며 2인승 트럭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점점 커가는 가족이 타기에는 3인용 트럭이 작았다. 나는 뒷 빈 공간에 ㄴ자로 앉아서 가고 멀미가 심한 동생이 트럭 가운데 앉았다. 나는 차를 타면 잠이 드는 멀미를 해서 어디에 앉든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편하게 허리 쪽에 엄마나 아빠의 옷을 끼워 잠이 들곤 했다. 차가 흔들려도 머리가 꼭 끼어서 안전했다.
부모님은 그런 내가 재미있으면서도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면 꼭 편하게 앉아서 가도록 4인승 차를 사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켰다. 4인용 차를 샀는데,, 4명이 탈 수 있는 트럭이었다. 그 트럭이 너무 멋졌는데, 안동 시골에 몰고 갔다가 사고로 논두렁에 빠졌다. 차 수리를 요청했는데 판매사에서 수리를 거절했다. 새 차가 논두렁에 빠진 것이니 돈을 내고 수리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새 차를 수리할 돈이 무척이나 부담되어 그 차를 팔아버리셨다. 그리고 다시 폐차장에 가서 오래되고 큰 트럭으로 구매하셨다. 돈을 더 벌어서 더 좋은 브랜드의 차를 사겠다고. 가족이 타는 승용차와 일할 때 쓰는 트럭을 구분할 만큼 돈을 열심히 벌겠다고 생각하셨다 한다.
그동안에 우리 가족은 여행도 없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각자 일을 하셨고, 나는 운동에 동생은 학교에 바빴다. 각자 바빴는데 그러다 보니 집에 돈이 조금씩 모였다. 생활비를 하고서도 돈이 남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철일도 거래처가 느리게 천천히 조금씩 늘어 아버지는 성실함으로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 남들이 출근하기 전에 쇠가루를 모으셨고, 또는 공장의 휴식시간에 잠시 들어가 쇠가루를 모아 오셨다. 혼자서는 일을 하기 힘들어서 공장 이쉬는 주말에 가서 어머니랑 함께 일을 하시기도 했다.
내가 운동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평범한 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용돈벌이 겸 방학에 아빠를 따라다니며 고철 모으는 일을 하자고 하셨다. 방학 동안 노느니 경제활동에 대한 것을 배우고 아버지랑 놀러 다니자 는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은 쭈그리고 앉아서 바닥의 쇳조각을 큰 통에 담거나 다 담고 남은 자리의 빗질 정도였다. 아버지는 조금만 쇠도 다 모아서 고철장에 팔면 돈이 된다는 얘기도 해주셨다. 아빠는 내가 운동을 시작하고 이일을 시작했는데, 이제 내가 운동을 그만두었는데도 이 일이 이제 돈이 되니깐 계속할 생각이라 하셨다. 나 보고도 앞으로 학생으로 돌아가니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학원이든 보내 줄 수 있으니 얘기하라며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그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많은 얘기도 하고 나에게 길이 있다고 절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덕분에 방학 동안 고철을 모으던 나는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했고, 첫 고등학교 기말시험에서 전교 70등 안에 들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받지 못할 성적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잘 선택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목표는 30등 안이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다음 성적표엔 전교 30등 안에 들었다.
아버지는 성적표를 보고 기뻐하셨다. 학원을 따로 다닌 것도 아닌데 전교 30등 안에 든 내가 대견하셨던 모양이다. 매일 공부만 하던 친구들보다 운동하다 공부를 한 내가 더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싶었다. 2학년 때는 수학 공부에 올인을 했고. 17점 받던 성적표가 97점을 받는 성적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철을 모으는 내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이 좋았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영어는 공부가 되지 않았다. 기초가 없으니 어려운 영어단어가 외워지질 않았다.
아버지에게 얘길 했더니 학교에서 배우는 일본어에 집중해 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8살 때 한 달 만에 천자문을 다 외우고 아빠 앞에서 빼곡히 써냈다는 것이다. 한자를 그때 그만큼 배웠으니 일본어를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한다면 중국어도 가능하다고 했다. 앞으로 중국이 커질 거라며 중국어를 해두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말 학교 한자수업에서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금방 외웠고 일본어도 재미있었다. 다만 성적표는 그리 좋지 못했다. 시험 포인트를 잘못 집어서 늘 틀리거나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계속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다. 수학 점수가 많이 오르듯 다른 과목도 오를 수 있다고.
나는 한자나 일어 중국어를 나 두고 한글, 국어 공부에 집중했다. 선생님들께서 국어공부가 되어야 외국어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얘길 해주신 것이다. 2~3학년은 국어와 수학에 집중해서 공부했다. 때마침 만난 수학선생님은 나를 무척 예뻐해 주셨는데, 성적은 몰라도 수업 태도가 너무 바르고 좋아서 눈여겨보신다고 했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고 17점 23점 받던 애가 갑자기 85점 97점 받더니 졸업 때까지 늘 1~2개만 틀려서. 언제 만점 받나~ 하고 기대하시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졸업 때까지 100점은 받지 못했다. 아직도 그때 수학선생님께 100점 성적을 받지 못한 것에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다. 기대를 만족하지 못한 한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 노력에 아버지는 새로운 목표를 정하셨다. 내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학 입학 전까지 아파트 이사하기!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셨고 아버지가 거래처로 두는 거래처 근처에 분양하는 아파트를 사셨다. 당시 어머니 말로는 7천만 원 조금 넘는 돈이었는데, 아파트 대출을 하고 가진돈 모두 털어 아파트에 넣었다고 했다. 심지어 내가 용돈을 모아 둔 100만 원이 안 되는 돈도 달라고 해서 보태셨다고 한다.
어떻게든 은행 빚을 낮춰야 한다는 생각에 그러셨다고 했다. 나는 아파트에 보탠다는 얘기에 흔쾌히 내 용돈을 드렸던 기억이 있다. 나는 당시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운동을 그만두고 살찌는 것이 싫어서 집에서 학교 가지 걸어 다녔으며, 찜통같이 꽉꽉 들어찬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것이 싫었다. 또 출퇴근 시간에는 도로에 차가 많아 출퇴근 시간 전에 학교에 도착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새벽 운동을 한다며 일찍 일어난 습관으로 가능했던 것 같다. 아침도 안 먹고 가는 나에게 어머니는 공부하면 꼭 먹어야 한다며 전날 김에 밥을 올리고 김치를 채워 김치김밥을 말아두고 주무셨다. 아침이면 나는 씻고 학교 갈 가방을 메고 가스레인지에 김밥을 돌돌 굴려 살짝 데워먹었다.
아침에 가스레인지 불 소리에 깬 엄마는 다음날부터 밥통 안에 김밥을 넣어 보온을 켜 두셨다. 나는 아침마다 요구르트 하나에 어머니가 만든 김밥 몇 줄을 먹고 걸어서 학교에 갔다가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차비랑 간식값을 아껴서 모은 100만 원이 우리 집을 첫 구매할 때 쓰인다니.... 기쁘게 드릴 수 있는 이유였다.
덕분에 나는 매일 30분 거리를 왕복으로 1시간 운동을 했고, 살이 찌지 않았다. 172센티에 52킬로. 운동할 때만큼 계속 몸무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우리 집이 아파트로 이사 가고.. 나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학교와 멀어져서 왕복 1시간 거리였는데, 중간에 무서운 공장지대를 지나가야 해서 몇 번 걷다가 버스를 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벽은 너무 어두웠고 해가 뜰 때는 매연이 심했다. (도로는 8차선이었다)
또 집은 공장 앞에 있어서 너무 이른 시간이나 오후 늦게는 공장 굴뚝의 매 쾌한 냄새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타는 모습을 보고는 운전면허증을 따면,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하셨다. 면허를 빨리 취득하라는 얘기였다. 내 핑계를 대고 우리 집에 승용차를 드디어 사보자고 하셨다.
고3 수능이 끝나고 운전면허 필기에 붙었다. 이미 아파트로 입주도 하였다. 아버지는 실기를 취득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 대학 여름방학 때 운전면허 학원을 갈 것을 명령했다. 미루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미리 승용차를 사 두셨다. 누비라 2.
대우차 누리라 2는 연비가 좋았는데, 트럭 운전이 익숙한 아버지는 오토 대신에 스틱을 구매하셨다. 나도 스틱을 운전할 수 있게 면허를 취득했다. 또 아버지 트럭도 종종 운전했다. 21평 작은 아파트에 은행빚이 대부분이고 차도 할부였지만, 아버지는 필요한 돈만큼 고철일을 더 열심히 하시고 일이 없는 날은 다른 일을 하셔서 매워가셨다. 갚으신 것이다.
2000년. 내가 스무 살이 막 되기 직전에 우리 집은 아파트 21평에 누비라 2. 그리고 아버지 업무용 트럭이 있는 가정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제 이사를 가지 않고 살아도 돼서 주변 환경은 신경 쓰지 않으셨다. 앞은 공장 뒤는 산이었고 어디든 버스를 타고 10분 이상 20~30분 나가야 했고, 또 그 버스도 자주 오지 않는 곳. 그 버스마저도 방심하면 그냥 지나치는 곳에 위치한 아파트였지만, 우리 집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수 있었고, 부모님의 방, 나와 동생의 방. 방은 2개에,
거실에 문이 달려있어 손님이 오시면 거실에 문을 닫아 방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2000년. 드디어 집에 자동차라니. 우리 집이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우리가 이제 부자냐며 신나 하는 동생.
그런 동생은 우리가 잘 사는 집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달 하루 치킨을 먹는 날이 어머니의 월급날이었는데, 아파트로 이사오고는 치킨 한 마리 시켜먹던 집이 이젠 두 마리를 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아파트에서 처음으로 피자라는 걸 시켜먹어 보자며 첫 피자를 시켜 먹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동생도.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행복할 줄 알았다..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3 끝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