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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Feb 07. 2022

거꾸로 흐르는 시간과 느린 별의 편지

1.비행기를 타면 언제나 진공 상태에 갇힌 기분을 느낀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 흐르지 않는 진공에 속한 기분.  한없이 높은 허공 위에서 거스르는 구름과 사막, 설산들을 보며 내가 시간을 거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속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다. 나아갈수록 더, 더. 해가 밝은 곳으로 향한다. 누워서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고. 또 다시 책을 읽고, 잠들고. 텅빈 비행기 속 고요한 비행기 소리만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아주 잠이 잘 오는 asmr이었지.



몇 십번을 넘게 탄 비행기이지만 언제나 창문을 바라볼 때는 비행기를 처음타는 사람의 마음이 된다. 아무리 타도 타도 매일의 풍경이 다르고 예쁘다.  검은 흙으로 둘러 싸인 사막과 흰 눈으로 덮인 사막.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풍경을 고공에서 보는 것은 참으로 황홀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저 곳에 내릴 일은 없겠지. 듄을 촬영했다면 저런 곳에서 촬영했을 거야.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며 풍경을 구경했다. 평생 가보지도 못할 대륙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가지고 온 책을 거의 다 읽었다. 헤밍웨이가 파리에 머물며 썼던 일기와 한국 사회 학자가 파리를 12년 동안 산책하며 쓴 책. 헤밍웨이 참 대단해. 파리 시절의 그는 참 가난했는데 어떻게든 글을 쓰기위해 참 애썼다. 열심히 쓴 글을 잃어버려 울기도 하고 돈이 없어 점심을 굶고 룩상부르를 산책한 뒤 아내에게 “나 점심 먹고 왔어” 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 시절 문인들과 이리저리 이야기를 나누며 배회하기도 하고.  그는 참 짠했지.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 그를 초라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았다. 돈은 없지만 바로 자기 자신이 재산이라는 것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글쓰는 것에 집중한 그가 참 존경스러웠다.  헤밍웨이의 일기를 읽은 뒤 한국 소설을 챙겼는데 파리를 앞둔 내 마음과는 어울리지 않아 다시 집어넣었다. 비릿한 한국 소설과 파리는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 이번 여행에서는 고전을 실컷 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조르주 상드 책을 하나씩 읽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내가 읽을 수 있을까? 설레서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걸..



잠들다가, 일어나고. 기내식을 먹고. 읽고. 자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을 했다. 나는 분명 13시간을 날았거늘 파리에 도착하니 아직도 같은 날 초저녁이었다. 비행기가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시간이 좋았어. 아무도 신경쓰이지 않고 단절된 기분. 아래를 내려다보면 때로는 대륙이, 때로는 구름이, 때로는 바다가 있고 다시금 책을 읽고 영화를 보기를 반복하는 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지상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더욱 초라하고 외로워질 때가 있다. 분명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언제든 마음을 표현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걸 굳이 하지는 않지. 연결되어 있음에도 단절된 우리들.  비행기 안에서는 단절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져 아무렇지 않다면, 오히려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지상이 더더욱 외롭게 만든다. 언제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니까.​​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일일지도 몰라. 내 속의 몰랐던 모습을 찾는 일, 나를 들여다보는 일. 여행을 하면 내 삶을 사랑하게 된다. 여행하기 전의 내 하루가 무기력하게 책을 읽다 잠에 들고 글을 쓰는 하루의 반복이었다면 여행을 오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무조건 집 밖을 나서게 된다. 그렇게 하루를 의미있게 채우는 하루하루로 마음은 건강해진다. 온전한 내 삶을 살아내는 것. 그 순간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나만의 것이라는 생각에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아진다. 이 감정, 이 느낌, 이 생각. 오직 생생히 아는 나만의 것.  무언가에 몰두할 기회가 생기고, 세상이 전하는 복잡한 소식으로부터 멀어지는 시간. 단절된 채로 나 자신을 아끼고 보살피는 시간. 텅 빈 시간을 밀도 있게 채울 수 있운다.  일단 집을 떠나왔으니 새로이 보는 세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바빠 기존의 근심과 고독들은 잠시 사라져 버린다. 오직 나와 오늘 하루의 추억만이 남아 진공상태에 머무른다. 최근들어 마음을 정리할 시간들이 필요했고 , 나 스스로도 어딘가로 떠나 차근차근 이성적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 부터 떠나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싶었다.그런데 너무 현실에 속해있는 건 지독하게 비린내가 나고 거추장 스러워. 그래서 무작정 온 파리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걸을 때마다 두근거린다.



파리에서는 자주 걸어야지. 시몬 드 보부아르가 걸었던 길. 김환기와 김향안이 걸었던 길,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걸었던 길을 원없이 걸어야겠다.


2.문득 비행기에서 책을 읽던 중  H에 대한 생각. 그녀는 현대적인 인물이 아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느리고 낡은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파리와 닮았다. 항상 만날 때마다 꼭 자신이 손으로 쓴 편지를 주고,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게 신기한 포장지와 스티커로 꼭꼭 포장한 과자를 주기도 한다. 어느날은 자신이 직접 찍고 인쇄한 필름 사진을, 어느날은 지우개 도장을. 하여튼 그녀는 참 독특하지. 필사하기, 손편지 쓰기, 스티커가 덕지 덕지 붙은 다이어리 쓰기, 쿠키 만들기, 엄청나게 두껍고 오래된 책 읽기.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



그녀는 그렇게 시간이 오래들어가는 것들을 사랑한다. 그녀의 프로필 뮤직을 오래도록 차지 하고 있는 것이 여행 스케치의 별이 진다네였듯이, 그녀는 그렇게 오래된 라디오에서 튀어나온 사람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들고 다니는 책들은 항상 고전이다. 밀란 쿤데라와 이탈로 칼비노, 알베르 카뮈와 알프레트 되블린. 지루하다면서 열심히 읽는다. 횡단 보도를 걷는 것마저 느린 그녀의 독서 취향은 그녀처럼 느리게 읽어야 더 좋은 책들이아.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앞둔 만남에서 우리가 언제 만났지? 하고 리마인드를 해보니 그녀가 독일을 가고 싶다고 한 카톡이 있었다.우리가 벌써 만난지 6개월이 지났어? 그때의 너는 독일로 떠날 거라 했는데. 정작 떠나는 사람은 자꾸만 내가 되는 것 같네.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돌연 하와이에 가서 3년동안 돌아오지 않아도 이해해. 기다릴거야. 그냥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 어디서든. 그녀는 웃으며 진짜 어딘가로 떠나서 3년 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렴.나는 말했다.


​​​​

+ 작년 겨울 밤. 제주도의 lp바에서 마티니를 마시며 노래를 듣던 중 이 노래가 흘러 나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힘든 시간 속에서 동굴로 들어가 연락이 잘 되지 않았기에 항상 걱정하던 마음이 흘러나왔나 보다. 그녀가 그리웠고 걱정됐고 슬펐다. 이 노래 를 들으면 아직도 그날 밤이 생각난다. 여름 밤에 들으면 좋은 노래인데 문득 생각나서 겨울 밤에 듣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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