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와 여성인권 논의를 중심으로
일모불발(一毛不拔)은 매우 인색하고 이기적임을 이르는 성어이다. 이 성어는 “털 한 올을 뽑아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다”는 양주의 발언에서 기원한다. 공동체와 관계성에 집중했던 전국시대 사상들 가운데, 양가사상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 이례적인 경우로 꼽힌다. 양가사상은 낯선 것이었던 만큼 ‘위아(爲我)’, ‘경물중생(輕物重生)’ 등으로 불리며 비판의 대상이 된다. 「맹자」에는 “양주와 묵적의 도가 그치지 않는 한 공자의 도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양과 묵에서 떨어질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의 제자이다.”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실제 양가사상이 이기주의를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비교적 최근의 연구자료 가운데 양가사상이 막연한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주장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희성은 「양주는 극단적 이기주의자인가?」에서 양주철학은 이기주의보다는 생명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주장에 가깝다고 지적하며, 유명종 역시 「양주의 생명철학」에서 양주철학을 생명철학으로 설명한다. 그럼에도 일각에서 양가사상에 대한 논의가 ‘이기주의인가, 아닌가’로 여전히 반복되는 것은 기록의 한계 때문이다. 양주는 생몰에 관련된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사상이나 학설 또한 「맹자」, 「장자」, 「여씨춘추」 등에 파편적으로 남아있는 것들로 미루어 볼 수 있을 뿐이다.
남아있는 양가사상의 기록이 적다고 해서 양가사상이 당대에 가진 영향력이 작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맹자는 양주를 언급하며,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다. 천하의 말이 양에 귀결되지 않으면 묵에 귀결된다.”고 말했다. 양주에 대한 적극적인 추론을 주저하는 것은, 맹자의 말을 빌려, 당시 천하의 말 중 반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현대 사회문제 중 양가사상과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사례를 통해 양가사상의 빈 부분을 메워 볼 수 있을 것이다.
임신중지를 둘러싼 여성계의 구호 “나의 몸, 나의 선택(My body, My choice)”은 신체에 대한 개인의 선택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주의 일모불발과 닮아있다. 이 글은 1) 양가사상과 여성인권에 대한 논의가 각각 ‘한 올의 터럭과 온 세상’, ‘프로초이스와 프로라이프’라는 극단적인 가정과 선택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 2) 양자택일로 제시된 논쟁이 양주와 여성계의 의도를 가리고 있다는 점, 3) 그럼에도 양주와 여성계가 자극적인 구호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양가사상과 낙태죄를 둘러싼 여성인권 문제를 견주어본다. 동시대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양가사상의 빈 부분을 추론하는 동시에, 양가사상을 인권과 접목해 탐구하며 동아시아 사상계의 다양성과 ‘자유와 인권’에 대한 전통을 회복한다.
『열자列子』「양주楊朱」편에는 묵자의 제자 금골리와 양주의 대화가 등장한다. “한 올의 터럭을 뽑음으로 온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그리 하시겠습니까?”라는 금골리의 물음에 대한 양주의 대답은 알려진 바와 조금 다르다. 양주는 “세상을 구할 수 있대도 털 한 올을 뽑지 않겠다”고 답하는 대신, “세상은 본시부터 한 올의 터럭으로 도울 수 있는 게 아니지요.”라고 이야기한다. 양주의 대답이 짚고 있듯, 한 올 터럭으로 세상을 구하는 일은 사실 극단적인 가정이다. 그렇다면 이 무리한 가정이 의도한 바를 짚고서야 비로소 양가사상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 가능하다.
양주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국시대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가 등장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당시 묵가와 양가 각각이 옹호했던 바를 고려할 때, 금골리의 물음은 ‘중앙집권시스템이냐, 개개인의 자유냐’라는 물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은 ‘중앙집권시스템’은 ‘온 세상’에 비유되었고, ‘개개인의 자유’는 ‘털 한 올’에 비유되었다는 점과 이 논의가 양자택일의 문제로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 가정이 양가사상이 주장한 이상사회를 논하는데 적합한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털 하나와 온 세상’ 논쟁을 구체적인 사례로 이해해보기 위해 유사한 구도로 대립이 형성되는 낙태죄논쟁을 먼저 살핀다. 낙태하기 위해 임신하는 여성은 없다. 그럼에도 임신중지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생명권 대 자기결정권’으로 압축되며, 이는 곧 ‘낙태죄 찬반’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프로라이프와 프로초이스’라는 두 축은 양 축의 극단으로 수많은 현실의 임신중지 사례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존중’이라는 핵심을 비껴간다.
2010년 정진석 추기경은 “인간의 생명을 도외시한 인간 사회의 발전과 행복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인공낙태 실태를 비판했다. ‘인간 사회’라는 표현은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듯 중립적이다. 그러나 이때 언급되는 ‘생명’이라는 가치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고르게 분배되고 있지 않다. 성과재생산포럼이 기획한『배틀그라운드』에서 나영이 모은 사례들을 참고하면, 낙태죄는 여성들의 생명을 오히려 안전하지 않은 환경으로 내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술비가 급증하고, 낙태브로커가 등장하며, 낙태를 빌미로 성폭행이 이루어지고, 심지어는 19세 여성이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시술을 받다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배아의 인격성’ 혹은 ‘생명’이란 가치는 반대편에 놓인 ‘여성의 선택권’을 너무 쉽게 압도한다. 특히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이라고 할 때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국가’이다. 『배틀그라운드』에서 나영정은 이 점을 지적하며, 모든 사회구성원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수행하는 국가가 임신한 여성과 권리와 다투는 것은 불합리함을 주장한다. 반면, 반대편에 놓인 ‘여성의 선택권’은 마치 출산과 임신중지의 결정이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선택인 것처럼 보이게끔 한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결정은 인생 전반을 관통해 영향을 끼치며, 임신중지 또한 여성 신체에 큰 영향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프로라이프와 프로초이스라는 양분된 찬반논쟁은 생명이라는 가치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만든다. 인구정책을 통한 사회 공리란 것이 여성의 선택권을 희생시켜야만 성립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2016년 WHO는 임신중단율은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나라보다 허용하는 나라에서 오히려 낮음을 보고했다. 성과 재생산에 관련된 여성의 결정권을 보장하고, 동시에 출산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사회구성원이 함께 나누는 나라일수록 여성의 임신과 관련된 더 나은 사회 조건을 마련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저출산 문제는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생명과 선택권’이라는 찬반논쟁이며, 이는 곧 사회 기득권의 의도이다.
그렇다면, ‘온 세상과 털 하나’로 제시된 양가사상에 대한 논의는 어떠한가. 먼저, ‘온 세상’은 ‘털 하나’를 포함한다. 때문에, ‘털 하나’를 희생해서 ‘온 세상’을 구하는 일은 결국 ‘털 하나’마저 구하는 일이 되며, ‘털 하나’를 희생하지 않아 ‘온 세상’을 잃는 것은 ‘털 하나’마저 잃는 선택이 된다. 전국시대 관료국가가 등장함에 따라 신민으로 재편된 개개인들에게는 전투와 부역, 납세의 의무가 강제되기 시작했다. 신민들의 충성을 기틀로 ‘국가’는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국가시스템을 통해 때때로 평민들의 안전은 보장되었겠지만,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었을 거라 상상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평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음에 따른 형벌이었다. 또, 삼엄한 계급사회에서 ‘국가의 이익’이 군주와 귀족 그리고 평민들에게 고르게 분배되었을 리 만무하다. 이때, 중앙집권체제를 ‘온 세상’이란 중립적인 언어로 묘사하는 일은 계급사회의 불평등을 교묘히 가리는 결과를 낳는다.
양가사상이 가진 생의 관념을 참고하면, ‘개개인의 자유’는 결코 몸에 있어도 없어도 무리가 없는 ‘털 한 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여씨춘추』「귀생」에서 양주는 생을 총 네 가지 상태로 분류한다. 욕망이 온전히 실현되는 삶과 부분적으로 실현되는 삶, 욕망이 부재한 죽음 상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인의 욕망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다. 양주는 타인을 위한 삶을 ‘박생迫生’으로 표현하며, 죽음보다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털 한 올’을 ‘온 세상’과 견줄 때 그 사이의 간극은 선뜻 ‘털 한 올’을 선택할 수 없게끔 만든다.
마지막으로 금골리는 “세상과 털 한 올을 바꾸겠느냐”고 묻지 않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해도 털을 뽑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는 양가사상의 반쪽만을 조명하는 질문이다. “세상을 준다고 해도 털을 뽑지 않겠느냐”에 대한 답변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골리의 물음에 앞서 양주는 이미 “옛날 사람들은 자기 몸에서 한 개의 터럭을 뽑음으로써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해도 뽑아주지 않았고, 천하를 다 들어 자기 한 사람에게 바친다 하더라도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더 나아가 금골리는 ‘털 한 올’과 ‘온 세상’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제시한다. 금골리의 질문에서는 국가시스템과 개인의 자유는 서로 충돌하는 가치로 설계되어있다. 양가사상이 옹호한 개인의 자유가 국가시스템과 조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선택지로 마련되어있지 않다.
맹자는 양주의 ‘위아’란 군주를 부정하는 것이라 비판하였고, 한비자는 양가에 대해 “길들일 수 없고, 군주에 쓰일 수 없는 존재”라며 죽여 마땅하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주권력과 국가정치를 옹호한 입장에서 양가 사상은 국가에 봉사해야 할 신민들을 시스템 밖으로 일탈하게끔 하는 사상적 토대로 여겨졌을 것이다. 양가사상이 외쳤던 개개인의 권리와 독립성은 강한 중앙집권국가의 핵심인 군주의 절대권력과 갈등하기 때문이다. 양가사상이 유행했을 당시 양가사상은 등급제와 신체의 예속관계에 항거했던 강력한 사상적 무기였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바에 따르면 양주사상은 국가자체보다 특정 계층이 물질을 점유하는 불공평한 세태를 비판한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주류 사상계는 중앙집권체제가 가진 불평등의 문제를 가리고 그 자리에 ‘온 세상’이라는 중립적이고 평등한 언어를 바꿔치기 해놓았다. 양가사상이 ‘이기주의’가 된 것은 군주권력을 옹호한 주류 사상계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에 가깝다.
사회적 공리의 관점에서 인구정책은 필요하며,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바람이자 책임이다. ‘생명’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내 몸의 선택권만을 존중하겠다는 것은 ‘생명권 대 선택권’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왜곡된 주장에 가깝다. ‘국가 대 여성’이라는 틀을 거두고 본 여성들이 주장한 바는 ‘여성이 도구화되지 않는 사회’라 요약할 수 있다.
이성애와 정상가족 규범 밖에서 임신중지가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여성의 신체가 재생산의 도구로 여겨진다는 점을 반증한다. 또한 낙태죄가 발효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낙태죄의 주요 명분이었던 ‘생명존중’이나 ‘공공복리’와 동떨어진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낙태죄에 대한 고발은 파혼, 이혼, 전 남자친구와의 소송에서 남성 측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악용된 경우들이 많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판결을 내면서 꼽은 주된 사유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했다. 직접적 악용뿐 아니라, 함께 관계한 남성을 제외하고 여성만을 처벌하면서도, 모자보건법에서는 ‘배우자 동의 조항’을 통해 남성을 결정주체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낙태죄가 여성이슈를 도구 삼아 성차별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재점화된 낙태죄 논쟁에서 정부는 모자보건법 상 낙태 허용의 경우를 확대하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모자보건법이야말로 국가가 낙태와 관련한 이슈를 동원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을 강화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모자보건법을 토대로 출산해도 되는 태아와 여성을 선별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이다. 모자보건법의 우생학적 사유는 ‘정상신체’를 기준삼아 장애와 질병 등의 ‘비정상성’을 동반한 신체들에게서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박탈하며 이들에 대한 차별을 용인한다.
낙태죄를 중심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강화되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낙태죄 이슈는 가부장제에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미국에서 기독교 세력을 연합해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고, 한국에서도 낙태이슈는 박정희 정권이 기독교와 결탁해 가족계획을 추진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여성을 비롯한 사회 약자들은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보장받는 대신, 낙태죄를 이유로 범죄자가 되었다. 이때, 낙태죄 반대는 도구화된 여성 신체와, 여성 이슈, 그리고 약자들의 성과 재생산권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는 것이며, 평등한 사회를 주장하는 의사표현에 다름이 아니다.
낙태죄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주장이 ‘생명권에 우선하는 선택권’보다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차별을 넘어선 평등한 사회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같은 방식으로 양가사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세상은 본시부터 한 개의 터럭으로 도울 수 있는 게 아니지요.”라는 대답에 마땅한 재질문을 궁리한다면 그것은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돕는 것인가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양주 역시 춘추전국의 여느 제자백가와 같이 이상적인 정치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설원 說苑』「정리政理」편을 살펴보면, 양주가 이상적인 정치의 형태를 제안하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양주는 양나라 왕을 배알하며 대화한다. 양주는 나라를 통치하는 일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통치자의 움직임은 있는 듯 없는 듯 하며 인민들이 유유자적하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본 것이다. 이때 통치자의 소극적인 간섭은 개개인의 생명을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주나라 선조 중 하나인 단부는 양가의 자연주의 성향 정치를 보여주는 대표사례이다. 그는 적과 싸워 백성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느니 빈을 포기하는 왕이다. 단부는 “나는 보양에 사용되는 것을 가지고 보양하는 것을 해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한다. 이 말은 ‘국가’라는 것이 본래 백성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성을 희생시켜서는 본말이 전도된다는 것이다. 양주의 시선에서는 이러한 국가야말로 정말 개개인의 행복이 합쳐져 만인의 행복이 되는 사회였을 것이다.
양가의 핵심 사상은 ‘귀기’로 요약된다. 『회남자』「범론훈」에 따르면 양자가 주장한 귀기란 “본성을 온전케 하고 참됨을 지키며 외부물질에 형체가 연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체는 추상으로 모든 사람을 포괄하고, 외부물질은 자연물질 뿐 아니라, 군주, 이익, 관록, 명예와 같은 사회적 물질까지 포함한다. 양주가 적극적 통치, 혹은 관직을 경계한 것 역시 국가나 제국을 소유하는 것이 외물과 관계해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털을 뽑아 세상을 얻든 잃든 양주가 집중했던 것은 털을 뽑는 일이 본성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양가는 수단과 목적에 대해 세심하게 저울질하기를 바랐다. 양가사상에서 모든 사물은 하늘이 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양자에게 있어서는 ‘의례’와 ‘올바름’을 위해 행동하는 유자도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세속인도 모두 행동의 목적을 망각하고 신체를 도구화하는 경우였다. 양주는 타인을 넘어 자연계에 이르기까지 소유와 점유에 부정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모든 사람이 자연의 독립된 존재이며 서로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의 평등이다. 양주는 불평등한 교환에 대해서는 받지도 주지도 않았으며, 추호도 타인을 이롭게 하지도 않지만, 추호도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양주가 개개인을 독립적인 존재이자, 교환불가능한 존재로 상정했다는 점은 세계인권선언문을 떠올린다. “인류가족 모두의 존엄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인권선언문 역시 권리의 ‘양도불가능함’이 강조되고 있다. 낙태죄를 둘러싸고 약자인 여성들이 비판한 것 역시 ‘여성의 성과 재생산권이 도구화되는 현실’이었다. 양주가 단순히 개인의 이익을 지키려 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권리와 존엄을 주장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양주가 금골리의 재질문에 대해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금골리와 맹손양이 대화를 이어간다. 양주의 제자 맹손양은 한 올의 터럭을 살갗, 살갗을 다시 몸 한 마디로 치환해가며 거꾸로 질문한다. 몸 한 마디를 잘라 세상을 돕겠냐는 맹손양의 질문에 금골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맹손양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털 한 올, 혹은 살갗이 아무리 작아도 그것들이 모여 몸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몸을 공동체에 비유한다면, 털 한 올은 일반백성에 해당할 것이다. 금골리의 비유를 전제로 해석하면, 나라 전체를 생각했을 때 백성 하나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털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양주는 이 하나하나의 백성이 결국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이며, 이들의 존재가 타인에 의해 점유당해서는 안 됨을 환기시킨다.
여전히 국민정서상 합의를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수자의 삶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몸의 사소하고 작은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한다는 양가사상의 관념에서라면, 소수자를 제외한 국민정서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나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통해, 사회가 여성의 성과 재생산에 대한 자유와 권리를 희생시켜 생명의 가치를 지킨다 한들, 그 가치를 위해 희생된 여성의 삶이 있는 한 그 이익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 칭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양가 사상은 국가권력이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란 대의를 앞세워 불공평한 점유를 시도할 때, ‘이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모두의 기준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생명권과 선택권’이란 프레임이 임신중지 논의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가운데에도, ‘내 몸, 내 선택(My body, My, Choice)’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하고 여성들은 낙태 경험을 드러낸다. 낙태죄 옹호 진영에서는 이를 근거로, 낙태가 당사자만의 일이라면 임신중지는 국가의 지원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여성들의 수많은 낙태경험을 ‘생명경시풍조’로 곧장 연결 짓기도 한다. 그러나 소수자집단의 발언을 분석할 때는 해당 주장을 둘러싼 맥락을 고려해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왜 국가의 공중보건에 대한 책임을 약화시키고, ‘생명경시’로 쉽게 오해받을 수 있음에도, ‘선택’을 강조하며 낙태경험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2020년 10월 여성들은 트위터에서 ‘#나는 낙태했다’라는 해쉬태그를 달아 낙태경험을 공유했고, 2017년 9월 28일에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기념해 광화문광장에서 스스로의 임신 중단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의료사고나 성폭행, 혹은 보복사건 등을 제외하더라도, 낙태죄로 인한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에게 주어지는 낙인 자체가 여성들이 겪는 피해이다. 임신 중단 결정이 범죄화되면서 낙태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다. 여성들의 섹슈얼리티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낙태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임신중단을 드러낼 수 없기에, 낙태죄 논의는 더욱 현실에서 멀어진다. 2019년에는 임신을 경험한 여성 중 약 20%가 임신중단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럼에도 언제나 존재하는 낙태는 범죄라는 이유로 구체적인 경험을 공유하려는 시도 자체가 적다. 『배틀그라운드』에서 이유림은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발화가 제한되는 가운데 사회가 재구성한 낙태의 양상을 ‘문란한 낙태’와 ‘슬픈 낙태’로 분류한다. 핵심은 여성이 스스로 피해자의 위치에서 임신중단을 요구할 때, 즉 ‘슬픈 낙태’는 용인되지만, 여성이 능동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실천한 ‘문란한 낙태’는 응징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성애중심주의 혹은 가부장제가 승인하지 않은 임신중지는 자유로운 발언조차 제한되어 있다.
임신중지에 대한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낙인에 대한 저항으로 독해해야 한다. ‘나의 선택’을 강조하는 것 역시, 피해자의 위치에서 이해를 호소하거나 처벌받아 마땅한 가해자가 되어야만 하는 사회가 마련한 선택지를 거부하는 스스로의 결정권 주장이다. 자신의 몸과 가족구성원, 다양한 삶의 조건을 고려해 재생산을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며, 이미 사회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여성들이 ‘정치적 실천’으로 낙태를 드러내고 개인의 선택을 중시할 때 비로소 현실과 맞닿은 임신중지에 대한 논의 조건이 마련된다.
앞서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 평등을 주장한 인권옹호 사례로 양주를 살펴보았다. 그런 양주는 군주전제주의를 옹호했던 유가, 법가, 묵가 등 사상계의 공격으로 ‘세상을 구한다 해도 털 한 올 뽑지 않는 이기주의자’가 되었다. 양주의 ‘순수한 의도’만을 가려내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양주는 왜 좀 더 명쾌하게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전달하지 않았는지, 혹은 왜 굳이 ‘털 한 올’과 ‘이익’에 대해 언급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양주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을까. “남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 “털 한 올을 뽑아 세상을 이롭게 한데도 하지 않겠다.”는 말을 선언이자 정치적 실천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맹자는 양주의 사상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했지만, 이는 양주의 사상이 정치적인 권력을 가졌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양주의 사상은 전국시대에 정치를 통해 실현된 역사는 없는 것으로 추정되며, 선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은자들의 사상 정도로 취급받았다. 특히 양주의 사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사상가의 서적에 조금씩 서술되어있는 것이 전부이며,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양주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양가사상은 특히 맥락과 입장을 고려해 이해해야 한다.
현대사회와 같이 개개인의 사유재산권이 인정되는 조건에서라면 ‘결코 남에게 이익이 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이기주의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평민들에게 세상을 돕느냐, 아니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백성들은 삶의 이유와 존재의 목적 자체를 군주와 귀족에게 위탁한 채,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형에 처해졌다. 심지어 평민들의 희생을 극소수의 개인을 만족시키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양주가 지적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내 한 몸을 받든다.’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을 가리킨다. 양가사상에서 국가와 명예 등의 대의란 것은 지배계급의 권력 점유를 위한 명분에 가까웠다.
위와 같은 배경에서 일반 백성을 대변하고자 했던 양가사상이 타인에게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지 않겠다는 것은 군주제를 옹호한 타 사상가, 혹은 현대사회가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이는 ‘모두의 이익’을 빌미로 백성들의 삶을 착취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시 백성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도 보장되지 않았다.
나아가 금골리와 양주의 대화의 장 자체를 이들의 삶의 현장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당시 일반 백성들이 정치적인 실천을 이룰 수 있는 여지는 금골리와 양주의 것과 같은 대화 정도가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 대화에서 백성들의 희생을 털 한 올에 비유하고, 군주와 귀족의 이기적인 행위가 대공무사로 포장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털 한 올’ 대신 ‘온 세상’을 선택하는 일은 일반 백성에겐 그야말로 ‘온 세상’을 잃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양가사상은 극단적인 예시임에도 ‘털 한 올’을 선택해 개인의 자유를 실천한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인권과 평등에 취약하다는 점이 동아시아 고대철학이 근현대사회와 불화하는 주된 요인으로 꼽히는 가운데, ‘독립된 개개인의 자유와 신체보전’을 주장한 양가사상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인권을 주창한 사례로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 특히 양주의 ‘일모불발’이 다뤄지는 방식은 동시대의 낙태죄이슈가 다뤄지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 글을 통해 양가사상과 임신중지와 관련한 여성인권이 논의되는 방식을 함께 살펴보았다.
첫 째로, 양가사상과 임신중지 논의는 모두 극단적인 대립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양가사상과 여성들의 의도가 쉽게 왜곡되고 있다. 양가사상이 주장한 개개인의 자유는 ‘털 한 올’에 비유되어 ‘온 세상’과 대립되었으며, 여성들이 주장한 ‘여성인권’은 ‘선택권’으로 압축되어 ‘생명권’과 경쟁한다. ‘온 세상’과 ‘생명권’은 중립적인 서술로 ‘세상’과 ‘생명’ 내의 불평등함을 가린다. 또한 ‘세상’과 ‘생명’은 지나치게 강력한 가치로 반대편에 놓인 ‘털 한 올’과 ‘여성의 선택권’을 압도한다. 결국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양주가 ‘털 한 올’을, 여성이 ‘선택권’을 선택할 때 이들은 이기주의자, 혹은 범죄자가 되며, 각각이 의도했던 바는 논의의 기회를 놓친다.
둘째로, 이기주의자 혹은 공동체에 대한 위협으로 치부되었던 양가사상와 낙태죄 반대 주장 역시, 앞서 언급한 대결구도의 프레임 밖에서 보면,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한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이 약자들이 도구화되지 않는 사회를 주장했다면, 양주는 독립된 존재로 서로를 침해하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주장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특히 양주와 여성들 모두 백성과 여성의 몫이 대의를 위해 교환되거나 이용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는 점은 양가사상을 인권에 대한 옹호로 해석해볼 중요한 근거가 된다.
셋째로, 양주와 여성들은 불공평하게 주어진 극단적인 선택을 수용해 그들의 주장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공통점을 살펴보았다. 여성들이 ‘자극적인’ 발언과 이미지를 통해, 금기를 깨고 발언권을 회복한 모습에 착안해, 양주의 일모불발 역시 하나의 선언이자 정치적 실천으로 의미를 해석해보았다.
맥락과 논의의 균형을 고려해 소수자 이슈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양가사상을 검토하였다. 양주의 일모불발은 공동체와 개인을 경쟁 관계에 놓으면서 양가사상이 공동체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놓은 듯 보이게 하였지만, 양주는 사실 개개인을 독립되고 평등한 존재로 존중하면서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한 것이었다. 시대적 한계로 인해 양주 당대의 사상가들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는 알 수 있다. 소수자 이슈로 갈등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인권 옹호로 해석된 양기사상 안에 그 답이 있다.
『孟子』
『說苑』
『列子』
『莊子』
『淮南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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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과 학사 졸업논문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주석이 생략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