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조르주 노베르를 기억하며
◾ 들어가면서: 이것도 무용인가
2016년 개최된 제4 회 댄스엘라지 서울경연에서 정세영의 <Deus ex machina>가 우승을 차지했다. 뒤따라 ‘몸의 움직임보다는 무대를 주제로 실험을 전개하는 듯 보이는 정세영의 작품이 과연 무용의 범주에 포함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바로 다음 해 국립현대무용단은 픽업스테이지 <권령은과 정세영>을 기획한다. 앞선 물음에 대한 국립단체의 대답과도 같았던 공연 기획에도 불구, 공연 당일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은 <Deus ex machina>를 무용공연이라고 볼 수 있는지, 정세영 작가 본인은 어떻게 작품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예술의 장르를 명확히 구분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욕망일지 모르나, ‘어디까지 무용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한국 무용계에서 자주 회자된다.
‘춤’과 ‘무용’의 애매한 어감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무용계에서는 모든 춤이, 혹은 모든 움직임이 무용으로 대접받지는 못한다. 여기서 무용으로 대접받는다함은 특정한 움직임이나 춤이 무용예술의 이름으로 극장에서 거리낌 없이 공연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이 주도한 제국주의 근대화의 영향이겠지만, 한국의 전통무용은 현대무용으로 거듭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때문에 한국 대부분의 대학 무용학과들이 세부전공을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으로 나누듯 한국 무용계는 다소 기형적인 분류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는 춤에 있어서 Traditional에서 Contemporary로 이르는 하나의 맥을 흐리고 모든 세부 장르들이 파편적으로 존재하게끔 한다. (물론 현재 북미와 유럽의 경우 역시 Comtemporary가 재즈댄스와 스트릿댄스까지 완벽히 포섭하지는 못하는 실정이지만, 적어도 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연관성이 보장된다. Contemporary에서 재즈로, 재즈에서 힙합으로의 연관성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용이할 것이다.) 모든 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다보니 ‘무용’으로의 진입장벽은 더욱 견고해진다.
현재 무용은 단연 보수적인 예술장르로 인식된다. 실험적인 작품들이 등장했을 때 ‘이게 무용이야?’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제기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용예술이 언제나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용공연의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 기록된 무용역사 속 최초의 개혁을 살펴보고자 한다.
◾ 궁정발레와의 결별
1763년 노베르가 제작한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궁정발레 개혁의 신호탄을 던진다. 여전히 궁정발레의 전통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이제 발레는 더 이상 가벼운 오락거리가 아니었다. 비극적인 주제를 적극적으로 다뤘고 기존에 구사해오던 기술적 요소와 더불어 팬터마임을 통한 감정적 연극 연출이 가미되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다양한 춤과 움직임이 있어왔겠지만 기록상의 제한으로 궁정발레를 춤의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면, 춤의 첫 번째 개혁의 상징은 아마 18세기에 활동한 장 조르주 노베르(Jean George Noverre, 1727~1810)가 될 것이다. 노베르는 무용이 대사나 노래에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드라마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팬터마임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자 했고, 발레 닥시옹Ballet d’action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제시하면서 발레의 근대를 열게 된다.
무용은 때로 다른 예술 장르의 사조와는 독립적인 흐름을 보이지만, 르네상스 이후 16, 17세기에는 대체로 사회 분위기와 일치하는 형태의 발자취를 남겼다. 일반 민중을 암매장하며 쌓아올린 베르사유 궁전과 <밤의 발레>에 스스로 아폴로로 등장해 얻은 태양왕이라는 칭호에서 루이 14세가 얼마나 일관되게 끔찍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끔찍이도 일관되었던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또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루이 14세가 바로 궁정발레의 주요한 인물이었다는데서 우리는 궁정발레가 얼마나 호화롭고 귀족적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왕비의 희극발레>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18세기는 다수 유럽 국가들이 중세를 벗어나 근대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마지막 시기였다. 이 당시까지도 전제군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에 계몽주의가 등장해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를 강조했고, 이성을 통해 중세의 절대왕정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고자 했다. 프랑스에서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스, 디드로 등의 백과전서파들이 계몽사상을 주도한다.
계몽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모토가 되었던 것은 바로 세속화된 전통과의 단절이었다. 미술계에서는 18세기 영국의 미술이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한 미술을 그만두고 보통 사람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했다. 연극계에서도 디드로가 연극의 디베르티스망에 해당하는 브라부라를 적극적으로 비판했고, 의상 역시 등장인물의 현실에 맞게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베르도 세속화된 전통, 즉 장식으로 점철되어 그저 화려한 볼거리로 전락한 궁정발레와의 결별을 시도한다. (궁정발레와의 결별을 ‘시도’했다고 한 것은 그가 궁정발레와의 완벽한 결별을 주장하거나 실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백과전서파에 의해 지적된 발레의 문제들을 살펴보자. 디드로는 미뉴에트, 파스피에, 리고동 같은 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며, 무용수들이 무엇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인지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루소 역시도 발레와 오페라를 귀족들의 그럴싸한 예의범절과 인위적인 규범의 전형으로 보았다. 그는 심지어 당시의 상연되던 발레를 시골에서나 먹힐 마르셀의 협잡질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노베르는 본인을 무용가이자 철학가로 생각했고, 볼테르와의 연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만큼 1760년 백과전서파의 지적의 연장선에서 『무용과 발레에 대한 서간집』(이하 『서간집』)을 집필한다. 노베르는 더 이상 발레가 신화에 등장하는 요정과 여왕, 신, 님프 등 초자연적인 것들을 다룰 것이 아니라, 배신, 살인, 근친상간 등의 금기를 통해서 인간 내면의 문제, 도덕적 딜레마를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대의 다른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환상적이고 사치스러운 무대연출도 배격했다. (이는 예술이 정치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전의 궁정발레는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프랑스 내부의 혼란을 가리기 위한 대외적 홍보의 수단 등의 다양한 정치적 의도로 이용되었다.) 마지막으로, 루이스 드 쿠작이 먼저 발레의 아카데믹한 요소에 대하여 의미 없는 디베르티스망일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듯, 노베르 역시 『서간집』을 통해 표현을 구속하는 형식은 과감히 포기하기를 촉구했다.
◾ 팬터마임을 통한 자연으로의 복귀
지금까지 노베르가 새로운 발레의 출발을 위해 부정했던 요소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발레 닥시옹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 중요한 지점은 노베르가 적극적으로 긍정한 팬터마임의 개념이다. 지금은 당연하게도 팬터마임이 춤의 한 요소로 인식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논의를 전개할 때만 해도 발레와 팬터마임은 서로 상이한 것이었다. 루소의 경우 발레는 허위와 가식이라고 보았지만 팬터마임, 즉 기교를 벗겨낸 몸짓 자체는 오히려 세속화되지 않은 인류의 순수하고 고결한 표현양식으로 보았다. 이것이 바로 노베르가 이야기한 자연의 개념이다.
노베르가 주장한 자연의 개념을 두 세기 후에 등장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이 이야기했던 상징계와 실재계, 그리고 예술의 역할과 함께 살펴보면 그 의미를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라캉은 언어와 문화란 것이 사회화의 도구로 작용할 때 이는 실재계의 개별 존재감들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언어는 늘 보편적인 형상을 추출해 형성된다는 점을 보았을 때 개별 존재감이 소외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여기서 예술의 역할이 요청된다. 라캉은 예술이란 것이 바로 상징계라는 소외된 차원을 이미지로 복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노베르는 라캉이 예술을 통해 복구하고자했던 실재계의 개념을 자연으로 비유했던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노베르가 왜 그토록 자연을 강조했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팬터마임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언급되었던, 다소 뜬금없는 자연과 개성 사이의 연관성도 명쾌해진다. 노베르가 언어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던 것과도 일치한다. (물론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비판했던 언어란 중세 귀족들에 의해 구축된 인위성, 혹은 과도한 궁정예법과 겉치레, 정교한 거짓말 등이었고, 라캉이 겨냥한 언어는 오히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대안으로 내세웠던 이성적 판단과 맥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라캉의 철학이 노베르가 주장한 바의 형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 내용과 맥락에는 차이가 있다.)
영국의 명예혁명을 시작으로 18세기의 민중들은 꾸준히 평등과 자유를 외쳤다. 루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계급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 존재들이 평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보다 원초적인 언어를 재발견하고자 했다. 몸짓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팬터마임과 발레 닥시옹은 정치·사회적 논의에서 종종 언급되었다. 물론 모두가 팬터마임을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디드로의 경우 동물적 열정의 외침을 인정했지만 그 이면에 숨은 사회적 관행에 대한 절망과 우울함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볼테르의 한 제자는 팬터마임이 문명을 파괴하는 비이성적인 형식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발레 닥시옹은 단지 새로운 종류의 발레 중 하나였던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발레 닥시옹이 프랑스 계몽사상과 맞물려 논의되면서 발레의 근대를 열어갔고, 이는 결국 춤이 어떻게 창작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 노베르의 한계
발레 닥시옹이 노베르의 독자적인 성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순수한 팬터마임 발레는 밀라노의 글루크, 찰차비지, 안지올리니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때문에 노베르가 『서간집』을 발간했을 때 안지올리니는 노베르가 팬터마임이 자라난 기반이 된 이탈리아 전통을 무시하고 오로지 혼자서 팬터마임을 창작한 것처럼 서술했다고 격렬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안지올리니는 스스로 비판한 것과 같이, 이탈리아의 문화적 유산으로서 팬터마임을 주장했고, 노베르는 예술을 통한 자연의 회복, 그리고 인간성 실현의 도구로 팬터마임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노베르는 평생을 자신 안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소 분열적인 모습을 보였다. 노베르는 발레라는 형식을 벗어나 자신의 예술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혁신하고자하는 욕심이 있었지만, 그가 자라온 환경 자체가 발레와 오페라의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노베르는 어린 시절 파리 오페라의 존경받는 당쇠르 노블인 루이 ‘르 그랑’ 뒤프레와 공부하도록 주선되었으며, 그의 첫 무용경력 역시 오페라-코미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이유로 노베르는 스스로의 경력 마지막까지 파리 오페라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하기도 한다. 추가적으로 노베르의 『서간집』이 유명세를 떨치고 널리 읽히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노베르가 외국의 궁정에 발레마스터로 종종 섭외되었고, 그는 궁정발레의 정통을 재생산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조화를 꾀했던 팬터마임과 궁정예술의 정수였던 발레는 완전히 판이한 양식을 갖고 있었다. 결국 노베르는 발레의 공허한 연출을 비판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발레의 전통 스텝과 포즈들을 포기하지 못했고, 심지어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로코코풍의 의상을 무대에 도입한다. 게다가 슈투트가르트에 7년간 머물 때는 별 다른 의미가 없는 화려한 궁정 오락물을 다수 창작하기도 했다.
◾ 맺으면서
지금까지 서술한 노베르로 대표되는 발레의 개혁과 실험은 현대에 발레의 정통을 주장하는 낭만발레와 고전발레의 많은 레퍼토리들보다 더 오래된 역사이다. 현재 정통을 강조하며 실험정신을 배격하는 모든 발레는 결국 궁정발레에 대한 과감한 실험정신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기억할 때 오늘날 무용계가 새로운 시도와 과감한 실험을 거부하고 무용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가 종교개혁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고 이단을 규탄하는 행태, 그리고 대한민국이 한민족 신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들과 비견된다.
물론 노베르라는 개인은 분명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다. ‘노베르의 한계’ 부분에서 살펴보았듯, 그는 자신의 저서 『서간집』에서 주장했던 바와 실제로 실천했던 바에 대한 역사 속 서술들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물론 노베르의 레퍼토리가 단 한 작품도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 검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노베르의 개인적 결함과는 무관하게 18세기에 궁정무용을 상대로 무용계가 성취한 개혁이 그 자체로 무용을 창작하고 또 공연하는 방식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점은 분명하다. (아쉽게도 당대에 즉각적인 환영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디까지가 무용인가’하는 질문만큼이나 한국 무용계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것은 ‘무용의 대중화’이다. 그러나 무용의 진입장벽은 견고히 유지하면서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고자 하는 것은 ‘현재 무용계 내부 사람들의 더 나은 작업환경을 위한 더 많은 자본 요구’ 이상의 의미로 해석하기 힘들다. 궁정발레로의 회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춤에 있어서 다양한 실험들을 거부하고 정통성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춤의 역사와 전통을 도외시하는 태도이다. ‘이건 춤이 아니라 행위예술/공연예술/퍼포먼스예술이지’, ‘이건 실용무용이지’ 할 것이 아니라 미술관이나 거리로 추방된 다양한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그 작품들 속에서 무용의 요소들을 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베르를 기억한다면, 무작정 대중화를 외칠 일이 아니다.
▸ 참고문헌 및 사이트
제니퍼 호먼스, 『아폴로의 천사들: 발레의 역사』, 까치글방, 2010
제환정, 『불멸의 춤, 불멸의 사랑』, 김영사, 2002
E.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예경, 1997
위키피디아, 계몽주의, https://ko.wikipedia.org/wiki/계몽주의
(※ 본 보고서의 본론 부는 제니퍼 호먼스 『아폴로의 천사들: 발레의 역사』중 「계몽주의와 스토리발레」부분의 흐름에 따라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2017학년도 2학기 발레사 수업의 기말고사 레포트로 작성된 글입니다. 발표자료로 제작된 피피티가 이미지파일로 첨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