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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ganized Chaos Feb 13. 2020

*농, 농당스, 누벨 코레오그라피

Non, Non-danse, Nouvelle Chorégraphie

-안드레 레페키의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의 서론과 결론을 중심으로-


◾ 들어가면서: 부정의 부정이 아닌, 긍정


   2017학년도 2학기 발레사 수업에서 작성한 레포트 <La Première Révolution du Ballet>에서 “무용은 원래 보수적인 예술”이라는 관념은 일정한 의도를 통해 구성된 정치적 메시지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을 토대로 다양한 예술 장르의 개혁을 도모한 백과전서파의 영향으로, 장 조르주 노베르(Jean Georges Noverre, 1727-1810) 역시 1760년 『무용과 발레에 대한 서간집 (Lettres sur la danse, et sur les ballets)』을 집필하며 발레의 개혁을 주장한 바 있다. 이는 현재 발레, 넓게는 무용의 전통을 뒷받침하는 낭만발레와 고전발레 사조가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었으며, 궁정발레로의 회귀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용은 원래 보수적”이라는 주장은 무용계 내부의 다양한 실험을 배제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2016년 댄스 엘라지 서울 경연에서 우승을 차지한 <Deus ex machina>의 정세영, 화이트 큐브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정금형, 그리고 언어를 통해 실험을 전개하는 <어제보자>의 안무가 임지애 등. 한국 예술계에서는 이미 몸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들이 다양한 형태의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현대무용계는 위와 같이 신체를 이용한 실험적인 작품들에 대한 생산적 담론을 이끌어내 무용계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기보다는, 막연히 이론교육의 부재를 이야기하며, ‘한국에서는 좋은 안무가, 혹은 참신한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는 자가진단을 내리고 있다. 댄스포스트코리아의 편집장은 “컨템포러리의 말놀이에 춤계가 지쳐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해 동안 한국에서 기획되는 각각의 무용공연의 수만 비교하더라도, 유럽의 농당스, 혹은 개념무용을 표방하는 작품들이 무용계 내부로 적극적으로 포섭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몸을 이용한 다양한 실험을 기존의 ‘연속적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무용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공존의 가능성을 교묘히 가리면서, 대결구도로 논의를 이끌어가는’ 기득권의 전형적인 전략에 가깝다. (혹은 기존의 룰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시대에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불가능한 미션에 뿌리를 둔 강박이 피워낸 신경과민이거나.)


   국립현대무용단은 예술감독 안애순이 이끌던 당시, 그리고 현재 예술감독 안성수 역시도 실험적인 작품들을 기획공연으로 꾸준히 초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 감독의 주요 안무작보다는 프로젝트성 초청공연으로 기획되는 과정을 살펴볼 때, 아직은 개념무용에 대한 확신, 혹은 긍정이라기보다는 ‘굳이 부정하지 않는 태도’로 비추어진다. (특히 해당 작품들에 대한 비평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보았을 때.) 이 보고서는 주류의 무용예술이 다양한 실험을 배제할 때, 주류 무용예술의 목소리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양한 실험 작품들 그 자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과정이다.



◾ 근대의 기획, 무용과 움직임의 동맹


   예술에 대한 정의는 사후적이다. 특정 예술장르를 정의하는 방식은 필연적 근거를 동반하기보다는 일정한 의도나 필요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아닌 뤼미에르형제의 시네마토스코프가 영화사의 시작을 장식하게 된 것은 현재의 영화계가 극장 스크린의 중요성, 고화질 이미지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비로소 영화는 단순히 영상을 매체로 한 예술이 아닌 극장의 예술이 되었다. 


   2017년, 스트리밍 서비스사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인 감독 봉준호의 <옥자>와 감독 노아 바움백의 <메이러로위츠 스토리>가 칸 영화제 후보작에 선정되자, 심사위원장을 맡은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큰 스크린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에게 황금종려상뿐만 아니라 그 어떤 상도 수여하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칸 영화제 측은 올해부터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 내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은 영화는 경쟁부문에 출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아날로그 필름이야말로 유일하게 중요한 시각 매체라는 아집은 그 이데올로기적 굴곡에 아랑곳없이 영화 담론 전반에 걸쳐 울려 퍼져왔다. 영화 제작의 이 고급한 경제가 예나 지금이나 자국 문화, 자본주의적 스튜디오 제작, 대체로 남성인 천재적 인물의 숭배, 그리고 원본의 체계들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 진짜 구조는 종종 보수적이라는 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영상작가 히토 슈타이얼은 본인의 저서 『스크린의 추방자들』에서 영화예술의 남근에 해당하는 초고해상도 이미지(그리고 필름과 극장)가 어떻게 ‘불완전 영화’, ‘빈곤한 이미지’, 그리고 ‘초점이 맞지 않은 이미지’ 등 다양한 형태의 영상들을 스크린 밖으로 추방시켰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고해상도 이미지’를 이데아로 상정하고 빈곤한 이미지를 진짜/가짜의 틀로 검열하고 규정할 것이 아니라, ‘속도’와 ‘강도’, 그리고 ‘확산’ 등 새로운 관점들을 발견해내는 편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무용예술도 비슷한 현상을 겪는다. 서론에서 언급한 안무가 정세영의 <Deus ex machina>가 댄스 엘라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이듬해 국립현대무용단은 픽업스테이지 <권령은과 정세영>을 기획한다.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은 “과연 정세영씨의 작품을 무용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묻는다. 안드레 레페키의 저서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를 살피면 아일랜드 국제 무용 페스티벌 무대에 제롬 벨의 <제롬 벨>이라는 작품이 선보여진 후 페스티벌을 상대로 민사소송이 진행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소의 이유인 즉, 제롬 벨의 공연은 춤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20년 간 북미와 유럽에서는 기존의 춤이 가진 존재론을 해체하는 작업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가 다루고 있는 브루스 나우먼, 후안 도밍게스, 자비에르 르 루아, 제롬 벨, 트리샤 브라운, 라 리보, 윌리엄 포프엘, 베라 만테로 등의 개념무용가, 혹은 농 당스 안무가, 혹은 신체를 통해 작업을 전개하는 미술가 등이 그 예이다. (한국의 경우 서론에서 다루었던 정세영, 정금형, 그리고 임지애 등이 있겠다.) 위 사례들과 같이 직접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암묵적으로 이들의 작품을 무용예술의 주 무대인 극장 안으로 들여오기를 꺼려하면서 개념 무용을 ‘움직임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한다. 위에서 다루었던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후에 “유일한 해법은 새 플랫폼이 기존의 룰을 수용하고 준수하는 것밖에 없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무언가를 ‘배반’, 혹은 ‘위반’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언급했듯 ‘무엇이 기존의 룰’인가에 대한 확신을 전재로 한다. 현재 안무적 특성에 대한 존재적 확신은 바로 수직적 움직임과 환상적인 육체 강조하는 낭만주의 발레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시대 무용이라면 응당 연속적 움직임과 이동성, 그리고 흥분된 스펙터클을 선보여야 하는 것이며, 무용수라면 응당 트레이닝을 통한 하이퍼키네틱한 신체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1810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멈춤의 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꼭두각시 인형을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로 묘사했고, 바로크 춤은 트레이닝된 신체와 그것을 통해 구현되는 운동성을 강조하면서 테크노-신체를 만들고 즉흥적인 요소들을 춤에서 배제했다. 그러나『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의 저자 안드레 레페키는 춤과 연속적 움직임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사실 역사 속에서 전개되었던 수많은 흐름 중에 하나였음을 지적한다. ‘움직임’을 모토로 하는 근대에 무용 예술이 여타 고급 예술 장르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자리를 구축하기 위해 취한 전략이 바로 ‘춤과 움직임의 동일화 ’였다는 것이다. 안드레 레페키는 키네틱한 신체보다는 표현성, 내러티브, 인상적인 포즈, 음악 등 다양한 요소에 종속되었던, 움직임과의 연계성이 부수적이었던 무용의 역사를 언급한다. 결국 춤과 움직임이 강력하게 연결되는 일련의 과정은 자연발생적 현상이 아니라, ‘초기 자본주의에 따른 끊임없는 움직임과 끝없는 재생산(재현)’을 강조하는 근대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근대를 단순히 시간적인 개념이 아닌 특정한 형태를 재생산하는 주체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근대는 키네틱한 움직임을 통해 개개인을 사회화하기 원했고, 동시에 무용은 근대에 독립적인 예술로 자리 잡을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무용과 움직임은 강한 동맹을 맺었고, 근대에는 마침내 키네틱한 움직임이 개개인의 신체를 ‘사회’라는 무대로 입장하기를 허용하는 라이센스가 된다. 현대에 ‘움직이지 않는 춤’, ‘무용수가 없는 무용’ 등을 단호히 심판하고 있는 ‘춤=움직임’이라는 도식은 신성하게까지 여겨진다.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져 태초부터 그랬을 것이라 막연히 믿게 된다면, 적어도 위와 같은 근대의 ‘설화’가 그 배경에 있음은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 ‘안무’라는 기획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멜랑콜리아란 사랑하는 대상이 영원히 떠나버리는 것을 방지하는 매커니즘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에로스의 종말』1장 「멜랑콜리아」를 통해 아토포스적 타자와 마주하는 과정으로서의 ‘사랑’이 불가능해진 현대사회를 진단한다. 한병철은 현대사회를 ‘동일자의 지옥’으로 칭한다. 모든 무소無所의 존재가 소비가 가능한 ‘차이’로 전환되고,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모호해짐으로 많은 이들이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멜랑콜리아이다. 


   춤이 근대에 독립된 예술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움직임’이라는 전략을 선택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춤은 여기서 ‘멜랑콜리아’라는 큰 산을 마주치게 된다. 안드레 레페키가 저서에서 멜랑콜리아를 ‘현재를 영원히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을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해질 것이다. 마샤 시겔의 말을 빌리면 ‘춤만큼 붙잡아두기 힘든 예술은 없다.’ 움직임과 동일시 된 춤은 눈앞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순간 이미 달아나고 없다. 무용이 정지를 불허하고 순간적인 움직임에 방점을 찍으면서 춤의 멜랑콜리아는 더욱 가속화된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서양 무용이 발전해감에 따라 스스로를 점점 더 추상적 공간에 가둔 것 역시 멜랑콜리아의 영향임을 지적한다. 댄스 시어터 역시 그 결과물.)


   나아가 키네틱한 신체는 막힘없는 흐르는 상태를 이상향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신체 내에 존재하는 타자적 상태를 과감하게 삭제한다. 모든 차이는 불쾌를 유발하지 않을 수준으로 다듬어진다. 이는 결국 철학자 한병철이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나르시시즘적 신체를 구축하게 되며 멜랑콜리아에 더 깊에 침잠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춤은 글쓰기와의 결합을 시도하며 ‘안무’, 코레오그래피라는 장치를 고안해낸다. choreography라는 단어는 ‘춤choros’와 ‘글쓰기graphein’의 합성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글쓰기를 통해 대상화하는 것이다. 코레오그래피와 비슷한 오케소그래피라는 ‘춤-글쓰기’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예수회 신부와 변호사의 공동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무라는 것이 애도(유령적인 것)와 사회화(법적 주체화)를 동시에 수행하는 기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결국 글쓰기와 춤이 결탁하는 과정에서 저자(마스터)와 무용가 사이에는 강한 연관이 생긴다. 근대의 신체는 마스터에게 신체를 양도하면서 주체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혹은 국가의 사회화가 갖추고 있는 재생산과 재현, 그리고 주체적인 복종과 유사하다. 안드레 레페키는 오케소그래피는 항상 현재에 현전하기를 원하는 남성주체를 재생산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마샤 시겔과 페기 펠런은 무용의 휘발성이라는 특징, ‘사라짐을 통해 구축된 존재론’은 경제구조의 규제와 통제를 빗나간다고 주장한다. 완벽한 복구와 기록이 불가능한 예술이므로 경제구조의 재생산이라는 명령을 근본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샤 시겔의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지금’에 존재하는 춤을 소실점에 비유하며, 페기 펠런은 라이브 퍼포먼스는 인식하는 순간 무의식으로 숨어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안드레 레페키는 이에 대해 반론을 펼친다. 무용은 근대의 시간성의 저주에 걸려, 도리어 마스터의 목소리, 심지어는 죽은 마스터의 목소리의 위상을 더욱 견고히 했고, 때로는 인종차별적 배제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하였으며, 발레학교와 국립무용단은 근대국가의 상징이 되었음을 환기시킨다. 또한 페기 펠런의 대해서는 무의식을 ‘기억의 비시간적 현재시제에 의해 작동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무의식은 현재에 머무는 개념이 아니며, 나아가 프로이트 스스로 역시 무의식을 ‘부모의 금지’와 연결 지었음을 짚는다. 


   안드레 레페키는 근대의 신체에 녹아든 멜랑콜리아를 안무라는 기획 역시 극복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안무는 멜랑콜리아를 증폭시켰다. 그는 마샤 시겔의 ‘소실점’의 개념을 역이용하여 소실점이란 것은 구체적인 대상, 재현의 상태가 아닌 추상적 상태임을 염두에 두고, 소실점에 존재하는 춤이란 절대 형상화되지 못하는 운명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재정의한다. 결국 춤은 안무와 결합되면서 일종의 초월적 교정기가 되었다.



◾ 정지행위를 통해 발견하는 지속되는 현재


   구조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쉽게 잊는 것은 비판하는 개인도 구조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구조를 논할 때만큼은 모두가 당사자이다. 구조에 비판을 가할 때는 구조가 작동하는 특정한 방식이 문제화되어야 한다. 혹은 특정한 주체가 어떻게 구조를 남용하는가에 대하여. 안무가 소실점에 박제되기를 거부하는 일, 근대성을 소진시키는 일이 마냥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은 멜랑콜리아는 우울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망각에 저항하는 소수자성과도 연관이 있다. 결국 끊임없는 움직임의 환상을 소진시키는 일은 정치적인 문제이며 윤리적인 선택이다. 망각 혹은 기억, 이라는 양자택일로 문제를 접근할 때 덫에 걸리게 된다. 안드레 레페키는 ‘돌이킬 수 없는 지금’의 대신 ‘지속되는 현재’라는 대안적인 시간성을 제시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안드레 레페키는 베르그손의 새로운 시간개념을 소개한다. 베르그손은 “특정한 행동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면, 영향을 끼치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마주한다.”고 하였다. 또,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상태라고 규정한다. 베르그손은 현재를 정관사를 통한 the present가 아닌 presents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시간 개념을 바탕으로 이해한다면 춤의 ‘동작’이라는 것 역시 순식간에 눈앞에서 펼쳐지고 사라지는 스펙터클이 아니다. 어떤 행위가 정동을 계속해서 유발해낸다면 그것은 언제나 신체의 현전을 가능케 한다. 몸의 경계라는 것 역시 더 이상 피부에 제한되거나 ‘지금’ 혹은 ‘여기’에 종속되지 않는다. 몸이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기준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베르그손의 새로운 시간성이 어떻게 ‘느린 존재론’ 혹은, 정지행위로 확장되어 나가는 것일까. 새로운 시간성은 어떻게 안무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들이 사태 그 자체의 압도적 터무니없음 앞에서 자신의 상징적 결손, 결여, 격차를 드러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말을 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뻔뻔하거나 부도덕한 행위로 여겨졌다. 2014년 가을, 세월호를 주제로 글을 쓴 다수 저자들에게서 이 감각은 공통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다. (……)

안산에서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 4월 16일 이후 어떤 이에게는 ‘바다’와 ‘여행’이, ‘나라’와 ‘의무’가 전혀 다른 뜻으로 변할 것이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

(……) 처절하고도 처참한 슬픔의 느낌을 왜 ‘가슴이 찢어진다’고 표현하는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심장이 가슴 속에서 터지고 갈래갈래 찢기는 듯한 육체적 고통이 실제로 느껴졌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묘사였다.


   김홍준의 『사회학적 파상력』과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 가해자 에릭 클리볼드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어머니입니다』에서는 거대한 참사 앞에서 어떻게 언어가 교란되고, 또 어떻게 은유와 비유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해체되어 가는지 이야기한다. 근대는 잘 짜인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의 절대적인 주체의 이름을 재생산, 재현하면서 주체화의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언어가 모든 존재를 명확히 포착해낼 수 없듯이, 때로 우리는 압도적인 참사, 혹은 충격 앞에서 재생산과 재현의 불가능함을 마주하게 된다. 동일자의 세계 내로 포섭할 수 없는, 나르시시즘을 가동시킬 수 없는 상황을 결국 마주하게 된다.



   안드레 레페키의 저서에서는 포르투갈 안무가 베라 만테로와 스페인 안무가 산티아고 셈페레가 보스니아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폭력적인 사건들 앞에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다”고 선언한 사례를 소개한다. 매순간 휘발되어버리는 춤의 비극성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함에도 어느 순간 ‘순수한 움직임’이라는 환상은 모두 소진되어버린다. 


   마스터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근대적 움직임은 외부와의 실질적인 충돌이 아닌 ‘춤-글쓰기’라는 안무를 통해 주체화를 요구한다. 때문에 근대의 주체, 안무적 주체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부에 의존하여 경험을 재생산해내야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자족적인 시스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근대성은 식민지적 약탈과 본인이 의존한 다양한 형태의 삶을 무시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함몰되기를 선택한다. 특권을 지닌 주체를 선두로, ‘진취적인 이상’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해서, 바닥에 대한 인식을 교묘히 지워버리는 것이다. 근대의 표상인 움직임을 위해서 여타 존재는 과감히 삭제된다.


   하지만 바닥을 딛지 않는 도약이란 없다. 끊임없는 움직임은 결국엔 정지성을 드러내며, 끊임없는 움직임 사이에는 이미 미세한 정지들이 존재해왔다. 이러한 정지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더 이상 ‘결여’나 ‘공허’, ‘불완전함’이 아니다. 정지된 신체, 느린 움직임은 춤이 어떻게 현전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해 근대의 운동성이 아닌 또 다른 대답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막연히 이데올로기적 구성체, 혹은 국가와 같은 집단을 지지하고 재생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바닥을 명확히 인식하도록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부당하게 ‘춤이 아니’라고 규정되어 왔던 움직임, 존재를 수면 위로 다시 드러낸다. 


   베르그손은 현재의 지속성을 이야기하면서 현재가 얼마나 지속되는가는 얼마나 사색하는가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사색을 위해서 ‘피로’는 필수적이다. 현재는 정지된 행위를 자양분으로 확장을 시도한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사색할 때 신체를 통해 유발된 정동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으로 사라지지 않고 ‘현재’라는 이름으로 확장된다. 베르그손은 ‘지속’이라는 개념이 물리적 이어짐이 아니라 공존하는 상태임을 강조한다. 새로운 안무의 가능성을 통해 망각에 저항하는 동시에 멜랑콜리아의 덫에서 해방된다.



◾ 마치면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구조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개인 역시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강제로 바닥에 묻혀왔던 다양한 움직임의 가치를 알지만 실제로 낯선 움직임을 감상하는 일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지루하기도 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고, 충격적이고 불쾌하기도 하다. 그럴 때 근대성과의 동맹을 통해 구현되는 키네틱한 움직임은 일종의 청량감을 선사하기까지 한다. 서론에서 느린 움직임과 정지성의 춤을 기존의 ‘키네틱한 움직임’을 중심으로 한 무용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종의 전략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지만, 사실상 그 긍정적인 전망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토양에서 새로운 움직임에 위협과 일종의 배반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멜랑콜라이는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흉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와 각성의 효과를 낳는 부정성이기도 하다. 멜랑콜리아는 그것이 멜랑콜리의 특수한 형태인 우울증을 치유하는 행성이라는 점에서 역설적 이름이다. 그것은 저스틴을 나르시시즘의 늪에서 건져내는 아토포스적 타자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스틴은 죽음을 가져오는 행성 앞에서 말 그대로 활짝 피어난다.


   한병철은 모든 것이 동일화된 현대 사회, 멜랑콜리아의 사회에서 묵시록적 위협이 개개인을 다시금 아토포스적 세계로 해방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주류의 기호에 맞게 모든 것이 편집되는 사회에서 상상력은 부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없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농당스’와 ‘개념무용’, 그리고 ‘신체를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실험 작품들’은 기존의 무용계에 다소 위협적이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무용의 영역을 확장해 다양한 작품을 무용계 내부에서 그 가능성을 상상하고 또 비평을 통해 검토할 수 있다면, 무용계는 더 이상 ‘교육’ 혹은 ‘창의력’ 등의 막연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참고문헌


안드레 레페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2006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프레스, 2016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5.

김홍준,『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반비, 2016

(※ 본 보고서의 본론 부분은 인용부분을 제외하고 안드레 레페키의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의 서론과 본론 부분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을 밝힙니다.)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2018학년도 1학기 무용문헌연구 수업의 기말고사 과제로 작성된 보고서입니다. 발표자료로 작성한 피피티 파일이 이미지로 첨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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