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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 Mar 24. 2021

오랜만에 인화한 필름사진에 네가 있었다


가끔 센치해지면 쓰는 연애 에세이 #02

오랜만에 인화한 필름사진에 네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한달만에 바깥 데이트를 했습니다. 코트를 입어도 버틸만한 적당히 차가운 공기와 맑은 하늘에서 벌써 설렜어요. 사실 출근길과 별 다를 바 없는 공기와 풍경인데 왜 이리 다르게 느껴지는 지(웃음)

그리고 이 데이트에는 특별함이 한가지 더 있었습니다. 바로 선물받고 한동안 쓰지 못했던 흑백 필름카메라를 들고 나갔다는 점이었어요. 끼릭끼릭 돌린 후, 셔터를 누르면 틱-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히는 그 옛날 필름 카메라요.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과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력 때문에 필카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야 익히 들었지만 디지털의 편리성에 젖어서인지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진짜 손에 쥐어보니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찍은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너무 오랜만에 잡아보는데 제대로 찍힌 게 맞는지 정말 정말 궁금하고 설레더라구요.

카메라 앞에 서면 얼어버리는 남친도 폰카에 비해 부담이 덜한지 필카 앞에서는 피사체가 되어 주더라구요. 너무 신나서 하루만에 한통을 거의 다 써버렸어요! 지금 한 3장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어디에서 무엇을 찍을 지 고민 중이예요. 빨리 인화를 맡기고 싶어서 계속 설레고 있답니다�



올해 2월 1일에 적은 글이다. 지금 봐도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느껴지는 글이라 절로 미소지어진다. 하지만 실제로 인화를 한 건 필카를 다 쓴 지 한달도 넘게 지난 시점인 3월 중순 즈음이었다. 너무 설레서 빨리 인화를 맡기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주변에 필름카메라 인화를 해주는 곳이 없었고 이래저래 바빴고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어느 순간 잊고 말았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꼭 인화하겠다는 마음으로 필름카메라 인화를 해주는 곳을 검색해보며 몇 곳의 위치를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마침 그 지역에 갈 일이 생겨 다소 무리하게 시간을 빼서 인화를 했다. 인화한 사진을 들고 나오던 순간, 무척 설레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이상했다. 빨리 꺼내보고 싶으면서도 보기 싫었다. 지금은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의 사진이 가득 있을 것을 알기에.


그의 사진이 실체화되어 내 손에 쥐어진 것은 그와 이별하고 난 이후였다. 엄청 신나서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내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자 내 피사체가 되어준 사람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고, 주인을 잃은 사진 속의 주인공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그의 사진만 모아서 제일 뒤로 빼놓았다. 그대로 둬도 별 문제는 없지만 굳이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버린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찜찜했다. 폰에 저장된 사진을 삭제하는 것조차 어려운 내게 이렇게 손에 쥐어진 사진을 휴지통에 넣어버린다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저 사진을 버리는 것 뿐인데, 뭔가 더 큰 것을 버리는 기분에 휩싸인 나는 결국 사진을 그대로 다시 넣었다.   


꽤 잘 나온 사진인 것 같아서 전해주고 싶었다. 내심 답정너인 상태로 친한 친구들한테 의견을 물었다. 나를 잘 아는 현명한 친구들은 '너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우문현답해주었고, 그 대답이 고마웠다. 잘 도착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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