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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un 07. 2023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감정 이야기

가득한 공허, 텅 빈 충만





가득 찬 공허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나 자신이 불편했다. 몸은 잔병치레가 끊이지 않았고 잘못 끼워진 퍼즐처럼 '나는 뭔가 잘못되었고 이상하고 위선적인 아이'라는 느낌이 늘 따라다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한 순간도 자유롭거나 가벼웠던 기억이 없었다. 

 

'느끼지 마라' '표현하지 마라'는 아이들의 욕구를 외면하고 억압하는 문제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강요하는 규칙들이다. 나는 감정 표현이 금지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신의 내면에 미해결 된 감정 문제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은 아이의 감정을 수용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묵은 상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감정을 숨기고 살았다. 

그립지만 그립지 않은 척, 무섭지만 무섭지 않은 척, 슬프지 마 슬프지 않은 척, 도망치고 싶지만 당당한 척, 분노했지만 안 그런 척, 겁쟁이 이면서 용감한 척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는 내 진짜 감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느라 더 고통받게 된다.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해 주면 사라질 감정들을 억압하고 회피하면서, 나는 상시적으로 고통에 찌든 상태가 되었다. 오만가지 망상에 붙어오는 오만가지 불안이 24시간 내 머릿속을 헤집으며 돌아다녔고 아랫배에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언제나 슬픔이 고여 있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수치심과 두려움이 온몸을 피처럼 흘러 다녔다.


내가 내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고 억압했던 그 감정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게서 생겨났지만 내 것이 되지 않은 그 감정들-그립고 두렵고 불안하고 슬프고 초라하고 화나는-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무리 거부하고 억압하고 내버려도 나를 찾아온 감정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들은 나를 위해 나에게 오기 때문이다. 감정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나만의 좌표이며 나침반이다. 억압되고 버려진 감정들은 나의 몸과 무의식에 고스란히 저장된다. 


내 몸은 허용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표현되지 못한 내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포화 상태였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기도 하고, 물이 넘쳐 무너지기 직전의 댐 같기도 하고, 한 발 삐끗하면 추락하는 줄 위를 건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름표도 없이 무의식 속에 버려지고 방치된 내 감정들은 오랜 세월 뒤섞이고 엉켜 나의 의식으로는 정체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찬 내 몸은 동화 '빨간 모자'에 나오는 뱃속이 돌멩이로 가득 채워진 늑대 같았다. 천진하고 가벼운 유년 시절을 꿀꺽 삼키고 몸과 마음이 무거워져서 결국 죽음에 이른 거짓말쟁이 늑대.


                                 <그리움>                                             painted by Haewon



진짜 내 것이 아닌 것은 가득 채워도 공허하다. 무거워도 무력하다. 공허하고 무력하다면 진짜가 아니다.









텅 빈 충만



아버지는 나의 엄격한 규율이고 초자아인 동시에 나를 버리면서 돌보아야 할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의 몸과 무의식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숨죽이고 있던 오래된 감정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감정은 절대 그저 사라지거나 죽지 않는다. 감정은 감정만의 임무가 있다. 온몸으로 여한 없이 느끼고 표현하며 삶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감정의 임무이다. 제 임무를 다하면 감정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같은 것을 바라보고도 각기 다른 감정을 느끼며 고유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아버지의 욕구와 감정을 중심으로 수십 년을 살아오느라 먼지와 이끼가 쌓인 채 화석이 되어가던 나의 감정들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면의 목소리들>                             painted by Haewon


나는 무서웠다. 내가 꽁꽁 숨겨두었던 감정들이 뛰쳐나올까 봐 두려웠다. 켜켜이 쌓인 슬픔과 분노가 터져 나오면 내 삶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 감정들이 내 일상을 거대한 파도처럼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그들의 손과 발을 묶어버리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감정을 틀어막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었다. 감정을 막아내느라 오랫동안 높이 두껍게 쌓아 올렸던 견고한 댐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나의 본성은 답을 알고 있었다.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진짜 나를 되찾기 위해, 나의 고유함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지를.


이제는 '나'로 살아가고 싶다는 '나'의 뜨거운 갈망과 절규가 꺼져가던 나의 생명력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뱉어내고 싶다. 풀어내고 싶다. 살고 싶다. 자유롭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


수십 년간 깊숙이 쌓아놓았던 감정을 온몸으로 토해 낼 것이다. 텅 빌 때까지 토해 낼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비워낼 때까지 뱉어 낼 것이다. 옛 것을 다 불태워버릴 것이다. 다 태워 버리고 텅 빈 채 충만해질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다 태워버린 잿더미 속에서 새싹을 틔울 것이다.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의 세상을 가득 채우는 푸르른 시작.

<잿더미 속에서 태어나다>   Painted by Hae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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