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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Aug 31. 2023

상처 다시 보기

고통을 온전히 느끼기를 허용하면 상처는 꽃이 된다

1. "잊어라, 잊어. 생각하면 너만 괴롭지, 언제 적 일인데."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 사건을 잊으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잊지 못하면 옹졸하거나 나쁜 사람이 됩니다. 더구나 타인이 비난하기 이전에 잊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책하게 됩니다.

잊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상처를 망각한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는 말이 아니라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내용을 잊어도 느낌은 차곡차곡 몸과 무의식에 저장됩니다. 이 느낌에서 해방되어야 그 상처로부터의 자유가 옵니다. 내용은 사라지고 느낌만 남은 상처는 원인을 알 수 없거나 통제 불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2. 상처를 받으면 상처를 주고 싶어 집니다. 상처받은 경험은 반드시 상처를 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누구도 빠짐없이 모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처 주고 싶은 충동을 부인하고 억압합니다. 나는 상처를 받았고 상처를 주고 싶지만, 그 감정과 욕구를 인정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선한 사람이야,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야, 나는 인정 많은 사람이야, 나는 비폭력적인 사람이야,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야, 나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야 라는 자신의 이미지에 집착하거나 엄마(아버지)를 이해하는 착한 딸(아들), 의젓한 맏 딸, 너그러운 큰 형, 모성애 가득한 엄마,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빠, 학생들을 사랑하는 선생님, 성격 좋은 친구 같은 자신의 역할에 집착하면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할 수 없게 됩니다. 나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스스로 정직하지 않으면 당신의 상처는 더 깊어져서 결국 당신을 공격하고 망가뜨릴 것입니다.


3.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가 나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면 그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는 책임도 나의 것입니다. 

상처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나는 계속 피해자로 남게 됩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괜찮은 척 해도 

나의 내면에는 피해의식과 분노, 무력감과 억울함이 쌓여갑니다.

  

4. 우리는 상처에 반응하고 대처하는 방법을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배웁니다. 어린 시절 부모가 아이의 욕구를 비난하고 방치해서 성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도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부모를 이해하고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같은 방식으로 상처에 반응하고 대처합니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주로 두 가지의 방법을 취합니다. 

부모를 비난할 수 없었던 것처럼 타인을 비난할 수 없어서 자신을 비난하고 원망하고 혐오하거나, 나의 고통이 모두 내 밖에서 왔다는 신념(의식적&무의식적) 때문에 세상을 탓하고 세상과 싸우게 됩니다.

이 방법들은 모두 나의 상처를 덧나게 하고 나를 더 불행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5. 고통에 무력한 자신에 대한 비난이나 혐오도, 고통을 준 세상에 대한 일방적인 분노도 상처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상처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습득해서 오랫동안 써왔던 익숙한 대응 방법(자기 비난, 혹은 세상과의 전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을 포기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때로는 죽음처럼 어렵습니다. 나의 정체성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니 고통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상처에 대해 온전히 책임질 때 우리는 비로소 상처로부터 걸어 나오게 됩니다. 내가 온전히 책임진 상처는 나의 진정한 힘이 됩니다.  


6. 상처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진다는 것은 우선 스스로에게 상처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기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고통을 회피하고 표현하지 않도록 배우고 훈련받아왔습니다.  울면 재수 없다, 울면 약해진다, 울면 지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부정적 감정은 느끼지 마라, 모른척하고 아닌 척 해라, 슬픔이나 분노를 허용하면 그 감정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등 등. 

실제로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표현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거나 놀림받거나 체벌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모든 감정은 평등합니다. 즐거움이 슬픔보다 더 우월하지 않습니다. 분노가 기쁨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울지 마라, 고통을 느끼지 마라, 외로움도 느끼지 마라, 억울함도 느끼지 마라, 두려움도 느끼지 마라, 그리움도 느끼지 마라, 분노도 느끼지 마라...

어린 시절 당신이 살았던 집에서 금지되었고 지금도 스스로 묶어놓은 감정들을 해방시켜 주세요. 당신이 깊이 상처받았음을 인정해 주세요. 그리고 그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에게 허용해 주세요. 부모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을 나에게 허용해 주세요. 그래야 내 인생입니다. 부모가 묶어놓은 대로 산다면 내 인생이 아닙니다. 당신의 감정이 제 생긴 대로 물결치고 흐르도록 오래된 댐을 허물어주세요.


7. 상처의 고통을 온전히(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처 속으로 뛰어드세요) 느껴주면,  고통은 '나는 상처받은 사람','나는 피해자'라는 나의 이미지를 완전히 부수어 버립니다. 상처 속으로 고통속으로 뛰어들어 고통 그 자체가 되세요. 그 감정을 그 느낌을 남김없이 허용하세요. 내가 스스로 허용한 고통은 상처를 녹이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그 용광로 속에서 상처는 꽃이 됩니다. 가장 큰 상처는 용광로 속에서 가장 큰 꽃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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