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바람일까?
제주도 산방산 아래 작은 마을 사계리. 그곳에 동네책방 ‘어떤 바람’이 있다. 늦은 여름이라고 해야 하나, 이른 가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아직 무더운 계절에 찾은 어떤 바람은 짙은 녹색의 당쟁이 덩굴이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자체가 초록 덩어리였다.
낡은 새시문을 드르륵 열자 마치 자연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듯했다. 나는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였다. 문이 작은 편이기도 했고, 내 키가 큰 편이기도 했지만 꼭 그래서 만은 아니었다. 자연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건 절로 허리가 숙여지는 일이니까.
“많이 덥죠?”
중년의 남자 주인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 왔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비 오는 것보다 더운 편이 낫다고, 그래서 괜찮다고 나는 답했다. 주인은 더 이상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천천히 둘러보라는 무언의 배려가 느껴졌다
골든 레트리버 한 마리가 책방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대자로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게슴츠레 눈을 뜨는가 싶더니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잠을 청했다. 책방과 어울리는 나른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이었다.
나는 개의 달콤한 낮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심조심, 개 옆을 아슬아슬 지나쳐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방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넓었다. 창가를 따라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서고 너머로 피아노가 있고, 긴 테이블이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안쪽 커다란 창가에 다락방처럼 꾸며진 아늑한 곳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록 당쟁이를 품은 초록 햇빛이 창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이도우 작가의 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가 떠올랐다. 산골마을이 아니라 바닷가 마을로 각색된 여름 실사판 같단 생각을 했다.
해질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하나 둘 모여 함께 책도 읽고, 도란도란 사는 얘기도 나누고, 동네 얼마 없는 꼬마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뛰노는 상상을 했다. 소설 속 은섭이 나이가 든다면 이곳 주인과 같은 모습일까? 그것도 괜찮겠다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는 동안 사계리 주민들이 부러워졌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책방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내가 매일 출근 도장을 찍을 텐데...
여러 책 중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골랐다. 국내에 소개된 지 30주년을 기념하는 리뉴얼판으로 앞표지에 그려진 개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책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개 생각이 날 것 같았다. 덩달아 내 마음도 평화로워질 것 같아서 집에 문고판으로 있고, 이미 읽은 책을 또 샀다.
“도장 찍어 드릴까요?”
순간 카페의 포인트 쿠폰 같은 도장을 말하는 줄 알고 손사래를 치려는데 주인이 샘플로 찍어둔 도장을 보여줬다. 형제섬을 바라보는 가족의 뒷모습이 예쁘게 새겨진 도장이었다. 당연히 개도 빠지지 않았다. 주인의 가족이겠지, 어림짐작하면서 나는 얼른 고개를 주억였다. 앞표지 바로 다음장을 펼쳐 주인에게 내밀었다.
“네, 찍어주세요.”
주인은 책방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도장 속 풍경처럼 형제섬을 볼 수 있는 바닷가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니 꼭 한번 들렀다 가라 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이 싫어 도망치듯 온 여행지에서도 여행자인 나는 바빴다. 아쉽게도 책방을 나와 다음 일정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대신 언젠가는 온전히 책만 읽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바람… 어떤 바람…
그제야 왜 책방 이름이 어떤 바람인지, 어떤 바람은 어떤 뜻인지 궁금했다. 주인에게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할 수 없이 내 마음대로 추측할 수밖에.
마음에 부는 바람도 바람이고, 한낮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도 바람이다. 책방 어떤 바람의 바람은 wind의 바람일까? wish의 바람일까? 아니면 둘 다의 바람일까? 사실 어떤 바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바람이든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매한가지니까.
무심코 스마트폰으로 ‘어떤 바람‘을 검색해봤다. ‘어떤 바람’이라는 시가 달려 나왔다.
어떤 바람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불면 녹색 바람이 되고
꽃에 불면 꽃바람이 된다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됐을까
-호시노 도미히로
아...! 시를 읽고 이거구나 싶었다. 때마침 둘째가 내게 물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어떤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러게... 나는 어떤 바람일까? 나는 어떤 바람이길 바라는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바람이었다.
나는 그냥 가볍게 부는 시원한 산들바람이면 좋겠다.
다음엔 반나절 정도 시간을 비워 어떤 바람을 다시 찾으리라.. 그땐 염치 불고하고 우리 네 식구 각자 음료 하나씩 시켜놓고 늘어지게 책이나 실컷 읽다 가야지. 슬슬 걸어서 형제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시간도 보내야지. 그런 우리들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야지. 그냥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