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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무 Nov 30. 2020

트라우마는 생명력이 강하다

(학대받은 아이의 트라우마)

맑고 화창한 여름날, 날씨보다 더 맑고 환한 그녀를 만난 것은 2년쯤 전이다.

딸아이의 대학 1년 후배이면서 절친인 그녀와의 만남이 내겐 참 신선했다.

30년의 세대차이를 넘어서 오래전 알고 지내던 친구의 이미지를 생각했었나? 아니면 학창 시절 동경하던 국어 선생님의 이미지를 느꼈나? 암튼 잘 생각이 나진 않지만, 그녀는 내게 친근한... 요즘 말하는 사람 친구가 되었다.

말씨가 고급스럽고, 인상이 차분하며, 책임감이 강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그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너무나 맘에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사업장에서 오래오래 있길 바랬다.

그건 물론 나의 욕심이다. 최저시급에 안정되지 않은 직장을 오래 있길 바라는 것은 나의 지나친 이기심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준비하는 임용고시에 꼭 합격하길 기원했다. 누구보다 선생님이 그녀에게 잘 어울렸고, 그녀는 반드시 좋은 선생님이 될 거라는 믿음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졸업하기 전이기도 했고, 준비기간이 워낙 짧은 탓도 있고, 그녀의 전공과목을 뽑지 않는 시, 도가 많아 임용고시에 성공하지 못했다. 경험 삼아 본 것이라 말했지만 많이 실망하는 그녀를 보며, 내 자식일인 양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녀가 그만두었다.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서 내년에는 꼭 합격하고자 한다 했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이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끝났다.

난 그녀와의 대화가 유쾌하고 즐거웠다. 그녀가 유머감각이 있거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툭툭 내뱉는 짧은 문장들의 대화가 참 좋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녀의 이야기보다 그녀가 좋아서 대화가 즐거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유 없이 사람이 좋다는 게, 매력을 느낀다는 게 이성 간에만 있는 게 아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냥 좋은 사람... 이유 없이 나의 기분을 유쾌하게 해주는 사람, 참... 따뜻한 사람...

그녀가 떠나고 몇 개월 지나 문득 궁금해져서 카톡을 남겼다. 그녀는 카톡도 메시지도 잘 보지 않는 스타일 이어선지 며칠 만에 연락이 왔고 점심 약속을 했다.

그리고 나타난 그녀는 몸무게는 10킬로쯤 늘었고, 얼굴은 푸석푸석 해졌다.

절친한 어린 시절 친구가 구급대원이었는데 터널에서의 교통사고로 죽어서, 충격이 컸다고...

그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집안에 꽁꽁 숨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일상이 무너졌을까? 마음이 아팠다.

사실 그녀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상담치료를 받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절대 안쓰러워하거나, 아는 척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딸아이의 말을 명심하고 있던 차이기도 했지만,  요즘 상담치료 누구나 받을 수 있다고 편히 생각한 탓도 있어서인지 무심히 잊고 있었다.

그녀의 어떤 심약한 근간이 흔들렸길래 일상이 흐트러져 저 정도일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라고, 밥 먹고 싶으면 또 오라고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몇 개월 나도 좀 쉬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좀 하겠냐고...

흔쾌히 그러마 하고 나타난 그녀를 보고 또다시 놀랐다.

살은 더욱 찌고, 얼굴은 더 푸석하고 일그러졌으며, 눈빛이 힘이 없었다.

살짝 걱정은 됐지만, 워낙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기 때문에 믿음을 가졌다.

그런데 코로나가 문제였다.

늘 불안증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코로나가 난리인데 마스크를 쓰지 않고 오는 손님에게 대응을 했는데 난동을 피우면 어쩌나, 테이블에서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나...

그녀의 걱정거리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치고 들어와 그녀를 괴롭힌 것이다.

난, 궁금했다. 심리치료를 해도 좋아지지 않아 새로운 의사를 찾아 멀리 서울까지 심리치료를 다닌다고 했다.

지금 옮긴 의사 선생님이 그녀와 잘 맞는다고 했다. 참 다행이다. 그리고, 당분간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고...

너무 힘든 이유가 본인 때문에 우리 가게에 피해가 있을까 봐 걱정이라는 거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으니 머리가 맑지 못할 때가 많고 저녁이 되면 지나치게 피곤을 느끼니 준비하는 공부 하는데도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가 심리치료를 받게 된 계기를 들었다.

어릴 때의 학대 때문이라는 거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고 가족을 이끌고 무일푼이다시피 본가로 들어가 합가를 했는데 그곳에는 결혼하지 않은 고모가 있었는데, 사업에 실패하고 들어온 오빠네 식구를 군식구로 여겨 심통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언니는 학교에 가고 엄마 아빠가 일터에 가면, 여섯 살 꼬맹이인 그녀가 남아있었는데...

크레파스를 뿌러뜨렸다고, 한 가지 색깔만 많이 썼다고, 지우개 가루가 떨어졌다고...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때리고 겁주고, 학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만 둘씩 낳은 작은집은 잘 사는데, 다 망해서 집으로 들어온 딸만 낳은 엄마에게 온갖 시집살이를 시키는 할머니의 구박을 그 작은 아이가 같이 받았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딸년이 태어나고 아들이 망한 상황을 할머니 스스로 만들어 벌인 거지 싶다.

아무튼 여섯 살의 작은 아이는 그 시절의 학대 때문에 불안증을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긴장이 되는 일을 맞닥뜨리거나, 예상이 될 때 일상적이지 못한 상태가 되곤 하는 것이다.

수능을 며칠 앞두고도 밀려오는 불안감과 강박 때문에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어 망치고, 제 때 학교에 가지 못했다.

결국 재수를 했고, 자신의 실력보다 낮은 학교에 들어왔다.

대학을 다니면서 이전의 미성년 시절과 다르게 맞닥뜨리는 많은 일들 앞에서 불안증이 나아지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던 중 소중한 친구를 잃는 경험을 했고, 임용고시라는 큰 시험도 치렀다.

당연히 그녀의 트라우마는 최고조를 향할 수밖에...

상담치료는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엄마 카드를 들고 다니며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스물여섯 살의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엄마카드로 돈을 쓰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그녀를 힘들게 하던 차에,

상담하는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보호자가 필요할 시기에 너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너한테 미안해야 하는 거지, 너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너는 당당하게 부모님 카드를 쓸 자격이 있어... 낳았으면 책임지고 양육하고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건데, 상황이 어찌 되었던 너에 대한 의무를 다 하지 못하셨으니 지금 그 정도 하셔도 되는 거야'

그녀는 그 말이 너무나도 많이 위안이 되어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동안, 늘 못난 딸이어서 미안했던 마음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아 좋았다고...

난 그녀의 위안이 된다는 말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그 시간들을 견디는 게 외로웠을까?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닐까 봐 걱정이다.

트리우마는 생명력이 지랄 맞게 강해서, 그녀의 주변에서 살아 기생하고 있을까 무섭다.

지금껏 그녀가 약해질 때마다... 긴장할 때마다... 힘들 때마다... 나타나서 어린 시절 잊고 싶은 두려운 학대의 순간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그놈이 어딘가에 붙어서 생명을 유지할 까 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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