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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Feb 17. 2021

시어머니에게 할 말 하고 살자

워킹맘

시어머니는 어렵다. 엄마한테는 편하게 하는 말도 시어머니한테는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답답하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신다. 출근 전에 시어머니가 집에 오셔서 아이를 봐주신다. 시어머니가 집으로 와서 아이를 봐주시니 아이 물건을 집에 그대로 두고 활용할 수 있어 장점이 많다. 이걸 다시 생각해보면 시어머니가 내 살림을 매일 모니터링하고 있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아들(며느리) 집에 숟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를 다 알고 있다. 냄비는 몇 개인지, 냉장고에 식재료가 어찌 관리하고 있는지 다 감시당하고 있다. 시어머니가 가져다 주신 반찬과 식재료가 소진되지 않으면 언제 먹을 거냐고 물어보신다. 원래 밑반찬을 안 먹는 성향이라 시어머니의 콩자반이 냉장고에 보일 때마다 괴로웠다. 본인 엄마 반찬이니 남편이라도 팍팍 먹어줬으면 좋겠는데, 남편은 반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차려주는 밥을 그대로  먹을 뿐인 사람이라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냉장고의 콩자반은 나만의 걱정거리였다.






산후조리 때부터 시어머니가 집으로 와주셨다. 너무도 감사하지만 불편함도 있었다. 시어머니가 본인 살림 스타일대로 본인 아들 집을 가꾸기 시작하셨다. 살림에는 원체 관심이 없어 시어머니가 부엌을 들어 엎던 냉장고를 털어내던 마음 쓰지 않았다. 닦고 청소해주시니 좋게 생각하자 싶어 그냥 두었다. '너는 가만히 있어지냐'라는 말을 친정엄마와 지인들이 했을 때는 본인이 좋아서 하시는 일이라며 무심히 넘겼다. 그러다 시어머니까지 그 말을 했을 때는 아차 싶었다.



며느리는 내 아들 덕에 사는 사람이다.

출산 전까지 맞벌이를 하고 있어 몰랐다. 출산을 앞두고 퇴사했으니 산후조리기간백수였다. 이제부터는 며느리는 본인 아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좋은 분이었지만, 내 엄마는 아니었다. 언제까지 산후조리하며 아이를 키울 것인지 묻는 시어머니에게 다른 의도가 없을지라도 며느리는 그냥 들을 수 없었다.


시어머니작스러운 퇴직 자연스럽게 며느리 산후조리로 이어졌다. 퇴사 후 최소 1년간은 직접 아이를 키우려던 내 계획에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첫 아이라  아는 것도 없었고, 주변에 육아하는 친구도 많지 않아 막막했던 차에 시어머니의 퇴직은 든든하면서도 새로운 변수가 되다.


60대의 시어머니는 코로나 덕분에 자연스럽게 퇴직했다. 시어머니가 다니던 회사의 폐업으로 갑작스러운 퇴사였지만, 사실 더 다녔더라도 고작 2-3년 정도였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다시 취업을 한다 해도 식당 설거지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터였다. 딱히 전문직도 아니었고, 자격증이 있으신 것도 아니니 이제부터는 노후자금으로 사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시아버지가 기술이 있으셔서 60대에도 수입이 있었다. 그래도 70에는 진짜 은퇴를 해야 할 테니 시부모님의 노후가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두분이서 살고 있는 집 한 채가지고 있는 재산의 전부였다. 시아버지가 아직도 일하고 있으니 당장의 생활비는 문제가 없지만, 그 이후로는 시아버지 이름으로 나오는 백만 원 정도의 연금이 전부였다.


시어머니는 계속 일을 했지만 연금이 없었다. 국민연금으로 월급에서 공제하는 게 아깝다고 생각해 가입을 미루다가 4년 전부터야 겨우 4대 보험을 납부하고 있었다 했다. 그래도 그나마라도 있는 덕분에 퇴직 이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연금 납부기간 10년이 되지 않아 연금개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남편과 상의해서 시어머니의 국민연금 추가납부를 대신해 드렸다. 약 1000만 원이었다. 이제 시어머니는 65세부터 매달 30만 원 정도의 연금을 받게 될 것이었다. 어차피 평생 시어머니에게 매달 30만 원씩 용돈을 드려야 할 테니, 연금 추납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었다. 큰돈이 드는 결정이라 고민했지만, 남편에게는 쿨한척했다. 시어머니에게는 내가 산후조리의 감사함으로 해드린다고 했. 그저 아들 돈이라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집에서 아이 하나를 시어머니와 며느리 동시에 돌보는 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며느리라 괜히 눈치가 보였다. 결국 내가 재취업을 빨리 하게 되었다. 백일 간의 산후조리를 끝나자마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산후탈모로 휑한 몰골로는 면접 탈락뿐이라 미용실에 가서 스타일링을 하고 열심히 단장하여 면접에 임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마스크 쓰고 면접을 봤기에 망정이지 퍼석퍼석한 맨얼굴로는 취업이 어려웠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가장 좋은 조건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아이가 5개월 되는 날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시어머니가 덜 부담스러워 질거라 기대했었다. 같은 공간에 계속 붙어있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남편은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왜 간절하게 취업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툼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아이와 시어머니와 있다가 남편 퇴근하고 말을 좀 하고 싶은데, 남편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은 생후 3년이라는 가장 소중한 시간에 애엄마가 애를 안 볼 생각을 한다며 화냈다. 애를 안 보고 일하러 나가는 애엄마가 가장 속상할 거라는 것은 왜 모르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남편과 말 한마디 안 하고 계속 지냈다. 결국 집 근처로 취업에 기어코 성공하자 남편이 내 일을 '허락'해 주었다.



남편은 살가운 사람이 아니다. 친정부모님께 전화 한 통 먼저 하는 법이 없다. 시가와 가까이 사는 덕에 그렇게 자주 시부모님께 방문하고 있음에도, 남편이 처가에 가자는 소리는 먼저 하는 법이 없다. 친정부모님이 뭐라 하지도 않는데도 벌써부터 가기 싫다는 기색을 해대는 터라, 친정에 남편은 아예 데려갈 생각도 안 했다. 이런 서운한 마음을 시어머니에게 무심코 토로했다가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내 아들에게 어디 여자가 이래라저래라 하냐며 다그치셔서 정신이 혼미했다. 며느리 도리는 끝이 없는데, 사위 도리는 왜 없는 걸까. 말도 안 되게 기우는 결혼을 해서 내가 팔려온 것도 아닌데 왜 며느리는 이런 대접을 받는가 모르겠다.


시어머니는 아들 눈치는 보는데 며느리 눈치는 안 봤다. 아들이 하기로 하면 하고, 며느리가 주장하면 못 들은 척하시는 아주 보통의 분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아들에게 며느리가 '애교'있게 잘 꼬셔서 하게 하라 하셨다. 이건 아니다. 진지하게 말씀드렸다. 어머니 아들이 고작 애교 따위에 말을 들을 사람이냐 반문했다. 본인 아들의 성격은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시냐 담백하게 말씀드렸다. 시어머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시어머니와 관계가 좀 달라졌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시는 대가로 매달 150만 원을 지불한다. 내 월급날 그대로 시어머니 통장으로 입금한다. 풀타임 시터를 고용하는 금액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감사를 전하고 금액을 지불하고 있다. 공짜가 아니다. 고작 월급받아서 시어머니께 150만 원을, 은행 대출로 70만 원이 빠지면 내 통장에는 남는 것이 없다. 개인 돈을 쓸래야 쓸 수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다. 이것저것 공과금과 카드대금으로 얼마간 남은 금액마저 다 빠져나가면 0원이다. 직장인에게 월급이 없으면 무슨 낙이 있을까. 현생을 갈아 넣어 0원을 만들고 보니 공허하다. 제로베이스를 만들기 위해 뼈를 갈고 살을 발라내는 것에 지친다.


시어머니 눈치 보는 며느리가 아니다. 할 말은 다 한다. 마음에 쌓아두지 않으려 한다. 시어머니가 본인 아들이 최근 살이 쪘다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새댁이 아니라 애엄마가 되어버린 며느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요새 계속 혼자 야식을 먹는다고 오히려 일렀다. '저녁을 정성껏 해주면 야식을 안 먹을게 아니냐'는 다정한 타박에 긴장하지 않고 무던하게 대답한다.


어머니 아들은 원래 그런대요.


어머니가 키우던 시절에도 늘 그래 왔던 사람이다. 며느리가 생활양식을 바꿔놓은 게 아니다. 30년 넘도록 본인이 직접 키운 아들을 고작 2-3년 같이 살고 있는 며느리가 무슨 수로 바꿀 수 있을까.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며 남편을 살살 꼬셔서 달래 보라는 말씀에는 더 편하게 대답한다.


어머니 아들이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만능 대답이다. 종종거리며 눈치보는 며느리는 없다. 이제는 시어머니가 두려운 초보 며느리가 아니다. 똑같이 새끼 낳은 여자로서 할 말은 하고 살겠다. 아직 30년의 내공까지는 부족해서 가끔 당황하기도 하지만 2021년의 며느리는 달라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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