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은 강북에서 좋은 동네 축에 속하지만 당시는 서울에서 제일 못 사는 동네 중 하나였던 옥수동에서 태어났다.
(“옥수동에서 보면 압구정동이 보인다”라는 연극이 있을 정도로 가난의 상징인 산동네였다.)
원체 가난했던 아버지는 좋은 머리 덕에 명문대 국문학과를 나왔고 가난한 학생에게 혜택이 많았던 학군단(ROTC)로 군 생활을 하고 운좋게 월남전 때 군사령관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어서 신체를 온전히 보전하셨다 (하지만 고엽제 피해는 피해 가지 못하시고 환갑 부근 이른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시게 된다.)
월남전 참전 중에 대규모로 부정 축재를 해야 진급이 가능한 현실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기독교인이자 원칙주의자였던 그는 본인의 성향과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군 생활을 끝내고 대위로 예편하는 것을 결정한다.
이후 아버지가 뜬금없이 옥수동 산동네에 복덕방을 내고 1인 사장이 되면서 동네는 못 사는 동네였지만 나름 부족할 것이 없게 자라나게 된다.
우리집도 어린시절 사진첩을 보면 집에 포니2사진이 있는데 면허도 없으신 아버지가 호기롭게 차를 사셨다가 동네에서 부동산을 하시던 별로 필요가 없고 부담스럽기만 한 차를 다시 팔아버리셨다고 들었다.(이후에도 아버지는 평생 운전면허를 따지 않으셨다.)
특별할 것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흔히들 말하는 인서울 끝자락에 있는 대학의 물리학과에 간신히 입학한 나는 학교에 정을 붙이고 다니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기 싫었던 나는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맞고 나서야 대충 다니는 시늉이라도 하게 되었는데 공부를 좀 해보니 여기 다니는 친구들이 나보다 똑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큰 불만 없이 남들이 다 하는 보통의 대학 생활을 지내게 된다.
당시 유행에 따라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고 면허를 취득했지만 90년대의 학창 시절에 마이카를 가지고 있는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뉴스에 압구정동의 오렌지족이 사회문제처럼 다루어지고 있었는데 이건 한강 이남의 남의 나라 이야기나 다름없었고 이 무렵에 창간한 자동차 생활 같은 잡지를 보면서 그림의떡 같은 스포츠카들을 스크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