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까뮈'하면 생각나는 작품은 단연 <이방인>이다. 그 다음은 코로나19 이후 판매량이 급증한 <페스트>이리라.
코로나19로 4개월간 연극을 쉬고 다시 공연을 시작한 극단 경험과 상상. 이번 작품은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각색한 <정의의 여인들>이다. 코로나19 이후 처음 올리는 작품인데 왜 <페스트>가 아닌지, 자영업자·소상공인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가 아닌지 궁금했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류성 씨는 “‘정의의 사람들’은 연극인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은 작품이에요. 그런데 읽는 내내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라고 대답했다.
극단 '경험과 상상'은 꾸준히 불편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다. 가장의 일가족 살해 사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주인공인 ‘두 아이’, 비정규직 마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투명인간’, <12명의 성난 노인들>을 각색한 ‘배심원들’, 부마항쟁을 배경으로 한 ‘진숙아 사랑한다’ 등.
▲연출·각색을 맡은 류성 씨 <사진=김혜민 기자>
“사실 <정의의 여인들>은 3월에 공연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로 부득이 일정을 미뤘어요. 알베르 카뮈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부분 누군가를 돕는 역할이거나 모성애만 드러나는 캐릭터들이에요. 너무 평면적이잖아요. 요즘이 그런 시대인가요? 그래서 꼭 여자 배우들에게 주연을 주고 싶었습니다.”
류성 씨는 중년 남성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연극의 연출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女담입니다만> 시리즈 등 여러차례 여성 인권을 조명하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어쩌면 본인과 전혀 상관없는 주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좀 부끄럽네요. 아무래도 저는 중년 남자니까 제 안에는 아직 가부장적인 모습이 더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극단에 여성 단원이 많고, 연극 내 미투(Me Too Movement) 사건을 보면서 젠더 감수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가장 큰 계기는 당연히 이윤택 사건입니다.”
류성 씨는 이윤택이 모든 연극 연출가의 롤모델이었다고 말했다.
“연희단거리패 소속이 아니면 더 선망하는 존재죠. 저도 그랬어요. 이윤택 미투 사건이 터지고 나서 글을 하나 썼습니다. ‘나도 이윤택을 동경했다’란 제목이었는데, 실제로도 그랬어요. 내가 더 잘해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단원들도 유명해지고 고생도 덜 할텐데 하는 욕심이 있었죠. ‘능력 있는 가부장’을 선망했는데 그 대표격인 이윤택이 한순간에 무너진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연극 연출가가 돼야 할지 찾고 있어요. 연극판에 습관처럼 뿌리내린 나쁜 관행을 없애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사람들>은 1905년 러시아가 배경이다. 모스크바에 사회주의 혁명당 소속 테러리스트들이 대공에게 폭탄을 던지는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스테판·야네크·도라·알렉시스 등이지만, <정의이 여인들>은 배경이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다. 등장인물은 핑크·레드·블랙·블루·화이트·그레이로 전부 색깔이다.
연극을 보면 금세 색이 뭘 나타내는지 알 수 있다. 류성 씨는 작정하고 붙인 이름은 아니고, 쓰다 보니 자연스레 떠오른 색이라고 했다. “시대와 장소가 모호하길 바랐어요. 그래서 마차도 등장하고, 소품으로 소주도 나오죠.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쥐고 하는 말은 모두 지금 이 시대에 던지는 말이고요.”
▲배우들이 단상에서 하는 말은 현 시대에 던지는 말이다. 대놓고 기업 이름을 거론하기도 한다. <사진=김혜민 기자>
<정의의 여인들> 혁명집단의 리더는 블루다. 자애롭고 인간미가 넘치며 때로는 감정에 휘둘리기도 한다. 테러로 감옥에 끌려간 뒤 출소하자마자 아지트를 찾은 레드는 극단적이고 냉정하다. 색도, 성정도 정반대지만 블루는 레드에게 “우리가 잘못되면 네가 집단을 이끌어야 해”라고 말한다.
이들의 목적은 늘 가면을 쓰고 다니는 대판사 블랙이다. 그리고 블랙의 마차에 폭탄을 던지기로 한 건 유흥업에 종사하는 핑크다.
레드는 핑크를 경멸한다. “저는 제 삶을 사랑해요. 그래서 여기에 들어온 거예요.”라고 말하는 핑크에게 레드는 “너는 삶을 사랑하니? 나는 삶을 증오해. 삶을 사랑하면 그런 사람처럼 살아. 쇼핑하고, 여행 다니고. 그렇게 삶을 사랑하란 말이야”라고 쏘아붙인다.
화이트는 수녀였으나 지금은 혁명집단의 정신적 지주인 동시에 폭탄 제조 담당이다. 모두가 감정에 휩쓸릴 때 화이트만은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수녀님도 남자들에게 아양 떠는 일을 하는 제가 혁명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핑크를 안아주며 “넌 누구보다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어”라고 위로해주는 것 역시 화이트다.
▲임무에 실패한 핑크. <사진=김혜민 기자>
하지만 핑크는 폭탄을 던지는 데 실패한다. “블랙이 아이를 안고 있었어요. 그 애들은 너무 순수하고 예뻤어요. 그 아이들을 죽일 수가 없었어요.”
임무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패닉에 빠져 잘못했다고 비는 핑크에게 레드는 화를 낸다. 하지만 블루와 화이트는 죄 없는 아이들은 죽일 수 없다고 말한다. 블루는 대중이 우릴 비난했을 거라고, 핑크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한다.
레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무슨 연예인 놀이라도 해?”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쥔 레드는 “나도 아이들을 좋아했어. 빌어먹을 여자로 태어나서. 그런데 혁명에 뛰어든 그 순간부터 난 여자가 아니고, 임무가 끝난 뒤에 다시 여자로 돌아가자고 마음먹었어”라고 말한다.
여자라고 해서 반드시 모성애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단상에서 하는 말엔 레드가 핑크를 경멸하는 이유가 담겨있다. 핑크에게서 혁명에 참여하기 전 레드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레드는 무척 극단적이지만, 그럴만한 이유도 가지고 있다. <사진=김혜민 기자>
레드 역을 맡은 배우 성연화 씨는 “레드도 혁명에 참여하기 전엔 핑크처럼 삶을 사랑하고 그걸 타인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면 테러에 가담하고 수감 생활을 거치면서 사랑할 힘을 완전히 연소했죠. 증오할 힘만 겨우 남아있는 인물이에요”라고 설명했다.
사실 레드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혁명에는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다. 반면 대장인 블루는 구성원의 잘못을 감싸주는 등 인간애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우 김민지 씨에게 블루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물었다.
“블루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어요. 혁명도 그래서 하게 된 거죠.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어서요. 하지만 인간애가 있는 만큼 주변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감싸주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고요.”
▲화이트와 블루 <사진=김혜민 기자>
화이트는 블루와 비슷하지만 훨씬 단단한 사람이다. 배우 겸 기획자 김한봉희 씨는 “화이트는 정말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해석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른 배우가 해석한 화이트도 보고 연습을 거듭하면서 캐릭터를 잡아나갔어요. 화이트는 모두를 존중하고 아우르는 인물이에요. 그러려면 너무 감정적이지 않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죠”라고 설명했다.
핑크는 해석의 여지가 무척 방대한 캐릭터였다.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며 정이 많고 발랄한 핑크. 정말로 혁명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싶지만 핑크는 극에서 가장 주도적인 캐릭터다. 핑크 이야기를 하기 전 그레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그레이는 극 중 유일한 남성으로 정보를 빼내기 위해 경찰이 된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간단히 말하자면, 그레이는 이름처럼 회색분자다.
두 번째 테러에서 마차에 폭탄 대신 자기 몸을 내던진 핑크는 만신창이가 돼 블랙과 만날 기회를 얻는다. 그 전에 핑크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레이는 핑크와 잠깐 대화를 나눈다.
그레이는 핑크에게 “너희가 나 무시했잖아. 남자가 여자한테 무시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궂은일, 힘든 일은 다 나한테 시키고, 너희는 나 무시했지”라며 화를 낸다. 핑크는 그런 적이 없다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되묻는다. 그레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고. 근거가 필요해?”
▲핑크와 그레이의 담화 리허설. 두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장면이다. <사진=김혜민 기자>
하지만 그레이는 경찰에서 무능하단 평가를 받는 인물이고 스스로 그걸 인지하고 있다. 핑크는 묻는다. “남자 무리에서 무시당하는 건 괜찮고, 여자들한테 무시당하는 건 못 참을 일이야?” 그레이는 대답 대신 욕을 한다. 그리고 핑크에게 블랙 앞에서 여자답게, 순종적으로 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대판사 블랙은 여성이다. 가면을 벗은 블랙을 본 핑크는 “여자일 줄 알았어요. 왜 당연하게 다들 당신이 남자라고 생각했을까요?”라며 마차에 뛰어든 이유가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핑크는 여자이기 때문에 블랙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블랙은 “전 여자지만 대판사 자리에 올랐어요. 기회는 평등해요. 당신들은 게으른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핑크와 블랙이 나누는 말은 대화라기보단 블랙의 일방적인 충고지만 블랙은 내내 자애로운 목소리와 표정을 유지한다. 핑크는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자 좌절감에 휩싸인다.
핑크는 마냥 철부지 같다. 하지만 내면이 꽉 차 있어서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구보다 주관이 뚜렷한 캐릭터다. 배우 이세희 씨에게 핑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물었다.
“처음 폭탄을 던지는 데 실패하고 핑크는 완전 패닉에 빠져요. 그건 작전에 실패했다는 죄책감,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과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일을 한 직후란 부담감도 있지만 가장 두려운 건 그 집단이 ‘역시 너는 이런 일을 할 애가 아니야’라고 핑크를 내치는 일이죠. 핑크는 레드에게 잘 보이려고 애써요. 어떻게든 인정받으려 하고요. 그런데 작전에 실패했으니까, 레드가 자기를 어떻게 볼지 너무 두려운 거죠. 핑크는 혁명에 뛰어들면서 사람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요. 핑크가 목숨을 걸고 마차에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이 혁명을 도모한 사람들이 핑크를 믿어줬기 때문입니다. 항상 비난받는 삶을 살다가 지지와 애정을 받으니 확신을 갖고 자기 주관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이가 있어서 폭탄을 던질 수 없었다’는 것도 핑크의 주관이다. 성연화 배우는 죄 없는 존재와 삶을 사랑해서 대의를 행하지 못한 핑크를 힐난하면서 레드는 자기 혐오를 느꼈을 거라고 덧붙였다. 이세희 배우 역시 홀로일 때 핑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레드 역 배우 성연화·블랙 역 배우 이영매·화이트역 배우 겸 기획 김한봉희·블루 역 배우 김민지 <사진=김혜민 기자>
대판사 블랙 역의 배우 이영매 씨는 ‘자애롭지만 다른 계층을 받아들이지 않는’ 캐릭터에 꼭 맞는 이미지였다. 류성 씨는 블랙을 ‘여성의 편을 들지 않는 여성이면서 지배계층에 속해 소외계층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득권’이라고 표현했다. 악역이라서 더 여자 배우에게 블랙 역할을 맡기고 싶다고 했는데, 이영매 배우의 블랙은 어떤지 물었다.
“개인적으로 제 가치관과 블랙은 맞지 않는 인물이어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제 안의 선입견과 편견을 끊임없이 들여다봤어요. 이전에 갖고 있던 것들까지요. 블랙은 대판사고 나이도 많죠. 핑크는 유흥업 종사자에 어리고요. 결혼과 출산을 했다면 대판사가 되지 못 했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핑크를 다그치는 권위의식, 하지만 블랙은 자신이 특권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로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있다고 믿죠. 핑크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여도 이해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여겨요. 자상하고 부드러운 말투 속에 그런 느낌을 녹여내려고 신경을 많이 썼어요.”
'폭력이 투쟁에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연극인데다, 원작이 원작인 만큼 배우들도 캐릭터를 해석하고 연기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게 느껴졌다. 류성 씨는 "호불호가 갈릴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다"고 했지만 내게는 무척 좋았다. 불편함을 마주하는 건 그게 왜 불편한 일인지 고민하는 시발점이 된다.
▲좌석은 무대 양 쪽에 마련돼 있는데, 어느 쪽에서 관람하냐에 따라 느낌이 무척 다르다. <사진=김혜민 기자>
입장 전 연락처와 이름을 적고, 체온을 재고 손소독까지 마친 뒤 마스크를 쓴 채로 연극을 관람했다. 번거롭고 답답하지만, 배우들이 눈 앞에서 캐릭터에 몰입하고 연기를 펼치며 관객과 호흡을 같이하는 경험은 특별하다. 모든 회차가 다르고 때를 놓치면 다신 볼 수 없다.
'시간을 내고 찾아가서' 즐겨야 하는 문화생활, <정의의 여인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뜬금없이 당산에, 그것도 상가 지하에 위치한 극장이 신기했지만 연극을 보고난 뒤에는 연간 회원권을 끊고 싶었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코로나19로 문화예술계 전체가 위축돼 있으나 언제나 보석같은 작품과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