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의사는 만들어져 간다
팔이 잘리고, 머리가 터지고,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공포 영화나 재난 영화에서의 사고 장면을 볼 때 이런 장면들이 나오면 종종 나옵니다.
어릴 때, 중고 때, 대학생 때만 해도 이런 장면들을 보면 너무 잔인해서 끔찍함에 속이 울렁거렸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체 해부도 하고 실습도 돌고, 인턴, 전공의를 지나 전문의가 되어
살을 뚫고 나온 제 환자의 뼈를 고치고, 쏟아지는 피를 멈추는 일을 하는 정형외과 의사를 하면서
어느덧 이런 영화를 보면 달라진 자신의 반응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리고 의대생 꼬꼬마 시절만 해도 너무 끔찍해서 등골이 오싹했었는데
지금은 이런 장면들을 보면 바로 드는 생각이
'저 응급 상황에서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뭐부터 해야 할까?'
'지금 당장 해야 하는 프러시저(procedure: 술기)는?'
'현재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이라는 생각부터 먼저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저는 전공의 정형외과이기 때문에 정형외과에서 외상이 기본 중에 기본이기 때문에
제 환자들과 겹쳐 보여서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이것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과거의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 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보면 직업병일 텐데 한편으로 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생각까지 변화된 한 명의 의사가 만들어지는구나....'
단순히 공부하고 시험 치고 면허증을 따서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실제 환자들에게 적용되는 그 지식들이 온몸으로 습득되어
사고나 반응까지도 변화된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마이너한 또 다른 저의 한 가지 반응은 특수 분장 관련입니다.
실제 환자들을 보는 입장에서 영화에 나오는 여러 특수 분장들에 대한 평가도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 저 피는 정말 표현을 잘했군. 저 피는 너무 분홍빛이고 묽은데?
저러면 사람이 바로 쇼크사하는 데 말도 안 된다. 저게 산다고?
의학 드라마를 봐도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와 내용이 상당히 디테일 한데.', '저 술기는 저렇게 하는 게 아닌데..'
'와 저런 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냐?'.' 저럴 수도 있는데 너무 나쁘게 표현되었네...'
실제로 의사들도 의학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는데 머릿속에서 드라마와 함께
이런 평가나 사고를 같이 하기 때문에 피곤한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아름다운 상황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한다던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분개한다던지 하며 의학 드라마를 몇 배 감정이입을 해서 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의학 드라마 중 그나마 현실성이 있고 말도 안 되는 천재의사가 나와서
극적으로 진행하는 등의 무리가 없이 소소하게 현실적으로 진행되는 드라마인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재미있게 봅니다.
인기가 좋아 시즌2도 하던데, 딱 그 시기가 제 학번 앞뒤 1,2년 정도로 위치도 비슷하고
당시 노래나 정서도 비슷해서 좋아합니다.
직업병이지만 이렇게 직업에 최적합된 사고를 하는 자신이 싫지는 않습니다.
의사의 존재 이유는 환자를 위해서고 환자가 없으면 의사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환자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의사에게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게 영화를 예를 들었지만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의사들도 생활 전반에서 항상 환자를 머릿속에
두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코로나 시기에 모두들 건강 잘 챙기시면 좋겠습니다.
다들 파이팅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