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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Jun 14. 2023

영상을 보여줄 때는 영어로만 보여줘요

어릴 때부터 '영상=영어'라는 인식을 갖도록

저는 출산과 동시에 3년 육아휴직을 했습니다. 당장 경제적인 부분에서 손해가 컸지만 휴직에는 망설임이 없었어요, “그땐 아이가 너무 어려 기억도 못 하는데 굳이...”, “휴직을 할 거면 차라리 아이 1학년 때 하지.”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요. 제 의지는 확고했어요. 대학원에서 아동심리학을 공부하며 생후 3년이 아이 발달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시기이고, 영유아기 안정적 애착 형성은 아이의 건강한 성품과 자존감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5세 전에는 아이에게 영상 노출을 하지 말아야지 굳은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쉽던가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오로지 아이를 돌보는 일만이라면 좀 나을지 모르겠어요. 설거지, 청소, 빨래, 요리 등 집안일을 하면서 육아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기더라고요. 그나마 집에서는 아이가 좋아하는 놀잇감이나 간식 등이 있어 그것들로 어떻게 버틸 수도 있어요. 정 안 될 때는 개수대 가득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를 모른 척하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아이의 놀이 상대가 되어주는 걸 택하기도 하면서요.


그런데 아이와 외식을 할 때는 정말 난감하더라고요. 식당이나 카페에 갔는데 아이가 칭얼대거나 보채는 게 심해지면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되잖아요. 외출할 때는 항상 종이와 색연필, 클레이 등을 챙겨갖고 다니며 그리기나 만들기로 아이의 지루함을 달랬는데요. 물론 그게 통하지 않을 때도 많았죠. 그럴 땐 최후의 수단으로 핸드폰을 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아이가 잠시라도 얌전히 있어주길 바래 아이 앞에 핸드폰을 세워놓는 엄마였어요.     


최대한 영상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하되, 불가피하게 영상을 보여줘야 할 때는 영어로만 보여줬습니다. 아이에게 핸드폰을 임의로 맡겨 아이가 직접 조작하며 콘텐츠를 자유롭게 고르도록 하지 않았어요. 자극성이 적고 스토리가 있는 영어 애니메이션을 아이와 함께 고른 후 틀어줬습니다. 1회 시청 시간은 20분 내외로 했고요. 처음부터 영어 영상만 봐온 아이는 ‘영상=영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생기게 됐습니다.     


아이는 두 돌 무렵부터 버스를 유난히 좋아해 아침에 눈을 뜨면 어서 버스를 타러 가자고 신발장 앞에 서 있곤 했어요. 아이와 매일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게 하루의 일과였습니다. 아이는 버스를 번호별, 색깔별로 골고루 다 타보고 싶어해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를 갈아탔어요. 당연히 <꼬마버스 타요> 만화 캐릭터도 좋아해 식기구, 문구, 가방 등도 타요가 그려진 제품을 샀었죠.      


그런데 아이가 타요를 알게 된 건 만화 영상 때문이 아니라 <꼬마버스 타요> 시리즈 그림책을 봤기 때문이에요. 특히 <꼬마버스 타요의 신나는 하루> 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지요. 또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신비아파트>, <헬로카봇> 등의 우리말 만화 영상을 아이는 보지 않고 컸습니다. 영상을 본 건 어쩌다 가끔 본 <꼬마버스 타요> 영어 버전 영상이었죠.     

아이가 어린이집, 할머니 댁, 친구 집 등 외부에서 우리말 영상에 노출된 적은 있지만 제가 의도적으로 우리말 만화나 방송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어요. 그럼 아이가 집에서도 우리말 만화를 보여 달라고 떼쓰지 않을까 궁금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더라고요. 친구네 놀러 가서 여럿이 우리말 만화 영상을 보게 되면 친구들은 푹 빠져 보는데 아이는 별 관심 없어 하며 소파에서 뒹굴뒹굴 거리기만 해 지켜보던 다른 엄마들도 신기해 했어요.


평소 육아 환경이 영상에 노출되지 않은 환경이면 아이는 그에 맞게 자라나더라고요. 잠깐 영상 노출이 되었다고 금세 흠뻑 빠지지 않았어요. 그 시절 아이가 빠져있던 건 ‘버스’와 ‘놀이터’였습니다. 매달 교통비가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보다 많이 나왔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친구, 형, 누나 등을 모두 제치고 맨 마지막까지 남아 노는 1인이었으니까요.        

우리말 영상을 보지 않으면 또래들과 공통 관심사가 없어 소외되거나 관계 맺기가 어렵지 않을까 염려하시는 분들도 있던데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면 아이들의 관심 주제는 굉장히 다양해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획일화되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과 취향을 잘 찾아간다는 긍정적인 면이 눈에 띄죠.     

     

우리말 영상은 모국어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콘텐츠도 다양하고 재미있으니 자꾸 찾게 될 수밖에 없고요. 우리말 영상에 재미를 붙이고 가까이하는 습관을 갖게 되면 책을 좋아하기란 참 어려워요. 저는 애초에 아이의 영어교육을 목적으로 우리말이 아닌 영어 영상을 보여준 건 아니에요. 제가 아이 교육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한 건 문해력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말 영상 시청은 문해력의 바탕이 되는 아이의 독서습관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 판단한 거죠.     


그런데 영어 영상은 좀 다르다고 봤어요. 낯선 언어가 사용되니 그저 보기만 해서는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무슨 뜻일까 추측하고 추론하며 보게 되니 아무래도 우리말 영상을 볼 때보다 영어 영상을 볼 때 두뇌를 많이 사용할 거라 생각했어요. 실제로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은 적당한 스트레스는 기억력을 담당하는 뇌 해마 부위의 세포를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영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애니메이션 영어 영상을 보는 것은 뇌 신경세포를 발달시키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봤어요. 아이는 이제껏 더빙판 영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하루는 묻더라고요.

“친구들은 우리말 영상을 보는데 왜 저는 영어로만 봐야 하는 거예요?”

“우리말 영상을 보기 시작하면 영어 영상을 멀리하게 될 가능성이 커. 그렇게 되면 영상을 보면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어려워지니 학원에 다니거나 훈련식으로 배워야 할 거야.”

“저는 학원은 안 다니고 싶어요. 이게 훨씬 나아요.”

그러면서 아이는 자신이 친구들과 다른 이유가 진짜 궁금했을 뿐 불편하거나 힘든 건 아니라고 했어요.

     

보통 영상으로 영어 노출을 할 때 아이가 영어 영상을 잘 보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례가 많거든요. 영어 영상 시청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말 영상입니다. 우리말 영상에 많이 노출되면 영어 영상을 보기가 힘들어져요.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영상을 볼 때는 좀 더 귀 기울이고 집중해야 하니 인지적으로 피로감을 느끼게 되죠. 머리 쓰지 않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우리말 영상과는 달라 점점 보기 싫어집니다. 영어 영상을 잘 보기 위해서는 대체할 수 있는 영상이 있으면 안 돼요. 그래서 가능한 우리말 영상을 차단하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영상 보는 것이 아쉬워서라도 영어 영상을 찾게 될 거예요.     


어릴 때 그토록 버스에 빠져있던 꼬마는 어느덧 열 살이 되었고, 지금은 온통 축구 생각뿐인 어린이인데요. 아이는 축구 중계방송, 스포츠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 ‘뭉쳐야 찬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꼬박꼬박 챙겨보지만 그 외에 우리말 영상은 잘 보지 않습니다. 제가 일부러 제한을 두지 않아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계속 영상은 영어로만 봐와서 그것이 더 자연스럽고 익숙한 듯해요.     


이미 우리말 영상을 즐겨보고 있어 영어 영상을 잘 안 보는 아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규칙을 만들어 영상 시청의 방향을 영어 쪽으로 옮겨보세요. 예를 들어 우리말 영상을 보고 싶으면 반드시 영어 영상을 먼저 보게 하기, 우리말 영상 보는 시간 순차적으로 줄여 나가기,  좋아하는 특정 프로그램만 우리말 영상으로 보기 등으로요. 규칙은 아이와 의논하여 정하고, 규칙을 지켰을 때는 그에 따른 보상도 해주시는 게 좋아요. 우리말 영상을 끊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 어려운 걸 아이가 도전하고 있는 거죠. 아이가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적절한 보상을 통해 아이가 기분좋게 이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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