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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Jun 20. 2023

수많은 영어 콘텐츠 중 애니메이션만 보여주는 이유

문해력 향상을 위해 서사 콘텐츠를 선택

아이는 5세부터 본격적으로 영상에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는 제가 6학년 담임을 할 때였는데요. 질풍노도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과 종일 힘겨루기를 하고 퇴근을 하면 완전 녹초가 되어 집에 왔습니다. 아이가 책장에서 빼 오는 책을 족족 읽어주고 싶고, 아이의 말에 “우와!”, “그랬구나”라고 신나게 맞장구치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에너지가 바닥나버려 도저히 할 수 없었어요.   

   

먼저 숨을 고르고 잠시 쉬고 싶었습니다. 그날의 육아를 해내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짜증 섞인 말과 인상 쓰는 얼굴뿐이겠더라고요. 아이가 영상으로 영어 노출을 하게 된 건 영어교육의 큰 그림 아래 계획적으로 시작했다기보다는 저의 쉬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어요.      


영상을 영어로만 보여줬지만 그렇다고 영어이기만 하면 어떤 콘텐츠든 다 괜찮다고 여기진 않았습니다. 아동용 영어 영상 콘텐츠는 노래, 율동, 파닉스, 해외 유튜버 교육 채널, 논픽션 다큐, 애니메이션 등 무척 다양해요. 요즘은 미술, 요리, 운동, 과학 등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의 영어 콘텐츠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언박싱 하는 콘텐츠도 많이 활용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주제의 영상을 보여주면 무슨 말인지 몰라도 주제에 대한 아이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해 곧잘 보게 되죠.

    

하지만 저는 아이에게 영어 애니메이션만 보여줬습니다. 제가 애니메이션으로 콘텐츠를 제한한 이유는 어린 나이에 여러 종류의 콘텐츠에 노출되다 보면 영상 자체에 대한 흥미가 지나치게 높아질 가능성이 많다고 봤어요. 영어교육의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으로서 영상을 보게 되어 영상에 과한 의존성을 갖게 될까 봐 우려스러웠습니다. 콘텐츠의 허용 범위가 넓어지면 콘텐츠의 질을 일일이 점검하거나 검열할 수 없으니 그것 또한 불안하기도 했어요. 무궁무진한 콘텐츠의 세계를 아이가 일찍부터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영상은 영어로만, 영상은 애니메이션으로만을 원칙으로 했어요.     


수많은 콘텐츠 중 애니메이션을 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영어 애니메이션은 모든 연령대가 시청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유해성이나 자극성 면에서 안심할 수 있습니다. 아동이 보기에 적합한 언어와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전문 기관의 검증을 받은 콘텐츠니까요. 또한 애니메이션은 대개 전문 성우가 녹음하기 때문에 원어민의 정확하고 또렷한 발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콘텐츠에 비해 문장이 훨씬 잘 들리고, 아이는 그것을 그대로 학습하게 되어 제법 명확하고 유창한 발음도 갖게 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아이와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이웃집 엄마를 만난 적이 있어요. 이웃집 엄마는 오랜만에 아이를 보고 반가워하며 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주말에 뭐 했냐는 질문에 아이는 ‘인크레더블 2’ 영화를 봤는데 진짜 웃기고 재밌었다면서 신이 나서 말했어요. 이웃집 엄마는 아이의 말을 다 듣고는 “근데 너 발음 되게 좋다!”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인크레더블’ 단어를 말할 때 아이 발음과 억양이 인상적으로 들렸던 모양이에요. 아이는 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 외국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니고, 심지어 파닉스를 따로 배운 적조차 없어요. 그저 5세 때부터 영어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봤을 뿐이죠. 지난 겨울 아이와 영국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요. 현지인이 제 발음을 못 알아들으면 아이가 옆에서 다시 말해주기도 했어요. 아이는 현지인이 듣기에 자연스러운 발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애니메이션만 보여줬습니다. 유치원 시절 아이는 칼데콧 수상자인 모리스 샌닥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Little bear>를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어요. <Little bear>는 숲을 배경으로 아기곰의 일상을 다루고 있는데 아이 또래의 정서나 행동을 잘 표현하고 있어 아이가 재밌게 봤어요. 그렇게 1년을 넘게 반복해서 보더니 일곱 살 때는 영상에서 본 문장을 생활 속의 유사한 상황에서 그대로 사용하더라고요. 단어나 표현을 개별적으로 익힌 게 아니라 스토리의 유의미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 습득하니 뜻과 용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자유자재로 활용하였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걸 지켜봤는데 아이가 친구에게 “Come on. Let’s go over there!”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친구가 또 뭐라고 말을 하니 “I think so.”라고 대답을 하고요.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영어였어요.      


무엇보다 제가 애니메이션을 보여준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책(문학 분야)과 가장 유사한 콘텐츠라고 봤기 때문이에요. 기승전결이 있고 서사와 주제를 담고 있는 콘텐츠를 봐야 ‘무슨 내용일까?’,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될까?’, ‘앞에서 이러이런한 것들이 나왔으니 지금 나오는 장면은 이런 뜻이 아닐까?’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보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흐름과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서사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 등 문해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보았습니다.     


신문에서 영어언어과학과 박사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박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벤허’, ‘십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고전 영화를 많이 봤다고 해요. 어릴 때는 내용도 어렵게 느껴지고 상영시간도 길어 영화 보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쌓이니 나중에 고전 도서, 장편 소설을 읽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내용 위주의 콘텐츠가 아니라 생각하며 봐야 하는 서사 콘텐츠를 꾸준히 접하면서 문해력을 키우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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