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그 어디로도 여름 휴가를 떠나지 않으려 했다. 여행조차도 번잡스럽고 피곤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한수희의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교토. 그곳이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깊게 고민하지 않고 항공권을 결재해버렸다. ‘발권완료’라는 글자가 화면에 뜨자 푹푹 찌던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항공권만 샀을 뿐인데 순식간에 마음의 날씨가 달라졌다.
남들이 가는 유명 관광지를 찍고 오는 여행은 싫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싶었다. 서점에 가고, 미술관에 가고, 음악회에 가고. 특히 음악회에 꼭 가보고 싶었다. 다른 나라의 클래식 공연 문화는 어떤지, 여행 중에 듣게 되는 음악은 얼마나 좋을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니 교토 근처 오사카에 예술의전당같은 곳이 있었다. 더심포니홀. 몇 년 전 조성진이 피아노 리사이틀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더심포니홀 홈페이지에 들어가 일정을 살펴봤다. 내가 일본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무카와 게이고의 멘델스존 피아노협주곡 연주회가 있었다. 무카와 게이고는 202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수상자로 금호아트홀에서도 내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홈페이지에서 티켓을 구매하려 했더니 현지 주소를 반드시 입력하게 되어 있었다. 숙소 주소를 쓸까 하다 안심이 되지 않아 현장 구매를 하기로 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잔여석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 매진될까 걱정돼 공연 당일 3시간 전쯤 공연장을 찾았다. 그러나 입구는 막혀있었고, 다행히 관계자가 나와 공연 1시간 전부터 표를 판다고 안내해주었다. 마침 공연장 가까이에 ‘우메다 공중정원’ 전망대가 있어 거기서 시간을 보내다 왔다.
티켓을 살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직원이 내게 화면 모니터가 아닌 잔여석이 색칠된 종이를 내밀었던 것이다. 내가 좌석를 고르자 직원은 그 자리에 볼펜으로 엑스 표시를 했다. 일본은 곳곳에서 아날로그적인 게 많았다.
더심포니홀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으나 안정감있고 기품있는 분위기가 흘렀다. 좌석이 무대를 감싸고 있는 구조로 무대와 좌석 간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무대 좌측 2층 자리에 앉았는데 지휘자의 숨소리도 들리고 연주자들 표정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공연은 ‘멘델스존으로의 여행’이라는 주제로 멘델스존 교향곡 5번과 4번, 피아노협주곡 1번으로 구성되었다. 타다아키 오타카가 지휘하는 오사카 필하모닉의 연주는 내가 듣기엔 둥글고 부드러운 음색을 갖고 있었고 곡 서사의 흐름이 잘 드러나되 담백하게 연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인터미션이 있었다. 체력적으로 힘이 덜 들고, 연주곡마다 더 집중할 수 있어 이런 진행이 마음에 들었다. 연주에 방해되는 소음은 일체 들리지 않았다. 박수도 얌전하고 공손하게 치는 일본 관객들. 관객의 연령대가 높았는데 무대 앞 중앙 쪽에는 무카와 게이고를 보러 온 젊은 여성 관객들이 일부 모여 앉아 있었다.
무카와 게이고가 연주를 시작하자 내 앞 좌석에 퇴근하고 바로 온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 남성 관객이 오페라글라스를 꺼내 들었다. 무카와 게이고의 연주는 한 음 한 음 모두 다 다른 색깔을 갖고 있는 듯했다. 가슴이 아릴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현실 세계를 잊게 하고 오로지 음악에 빠져들게 만드는 연주. 그를 일본의 조성진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공연 전 이미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과 시립 과학관을 다녀온 터라 많이 피곤했다. 남편과 아이는 무조건 자겠다 싶었는데 둘 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끝까지 봤다. 남편은 공연이 끝나고 피아니스트 이름을 다시 물으며 그의 연주가 정말 놀랍다고 했다.
일본 여행을 하는 내내 저녁 때 숙소에 오면 유튜브에서 무카와 게이고 연주를 찾아 틀어 놓았다. 일본 여행 중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음악회에 갔던 것이라고 답했다. 앞으로 여행을 가면 음악이 빠져서는 안 될 것 같다.
아이는 여행에서 오릭스와 지바롯데 야구경기를 직관한 게 제일 재밌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 방 책상 앞에는 그날의 공연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