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 박재정을 좋아한다. 박재정 인스타를 팔로우하고 있으며,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는 박재정 공식 팬카페 회원이기도 하다. 지난번에는 혼자 박재정 콘서트 <Alone>도 보고 왔다. 그가 곧 군대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콘서트는 절대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람까지 맞춰놓고 티켓 오픈 첫날 예매했다. 20대 때 성시경 콘서트를 다녀온 이후 한 가수의 단독 콘서트를 간 건 처음이다.
공연 일주일 전 집으로 배송된 실물티켓을 들고 광역버스, 시내버스를 골고루 타며 회기동 경희대까지 갔다. 캠퍼스 내 언덕 꼭대기에 있는 공연장을 걸어 올라가는데 힘들어서 숨이 차올랐다. 순간 청춘으로 가득 찬 캠퍼스에 40대인 내 모습이 물에 뜬 기름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옆으로는 다리가 길고 아슬아슬한 크롭티를 입은 MZ 무리들이 지나갔다.
박재정은 10년 전 <슈퍼스타 K>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데뷔했다. 얼마 후 윤종신 소속사로 들어가 제2의 성시경, 김동률로 불리며 여러 곡을 발표하였으나 기대만큼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 항상 마이마이에 윤종신, 015B, 이승환 테이프를 넣고 다녔던 나는 박재정의 발라드가 좋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사랑, 연애, 이별 이런 것들을 내가 언제 겪었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이제 나에게 사랑의 대상은 이성이 아닌 오직 아이뿐이라 어떤 발라드를 들어도 그냥 그저 그런 가요로만 들린다. 그런데 박재정이 부르는 노래는 달랐다. 마음을 툭 건드렸다. 특히 윤종신이 작사하고, 015B가 작곡한 <시력>이라는 노래. 헤어지기 아쉬워 강남역에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굳이 양재역까지 함께 걸어가고 말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박재정은 노래는 잘하지만 엉뚱하고 어리바리한 이미지만 가진 채 좀처럼 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SNS에 이제 윤종신 소속사를 떠나게 됐고, 가수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는 글을 올렸다. 그가 노래를 계속 불러주지 않으면 내 추억들도 금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극적으로 <놀면뭐하니>에 나오게 됐고, 얼굴을 숨기고 오직 노래로만 겨루는 오디션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결국 MSG 워너비 최종멤버에 뽑혀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대중들은 그를 점점 알아봐 주기 시작했다. 뛰어난 가창력, 매력적인 음색, 풍부한 감성, 바르고 성실한 인성까지도.
나는 박재정이 <놀면뭐하니>에서 부른 <슬픔활용법>,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부른 <두 남자>, <사랑한만큼> 영상 등을 무한 반복하며 하루 종일 본 적도 있다. 아이돌 덕질 하는 것처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봤다. 영상 속에서 그는 대학생처럼 수수하게 회색 레터링 반팔 티셔츠를 입고 관객과 거리가 가까운 야외무대에서 의자에 걸터앉아 밴드 합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그의 모습은 쏟아지는 햇살에 나뭇잎이 반짝거리듯 싱그럽다. 사람들 호응에 기분이 좋아 앵콜곡을 연이어 부르고,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수줍게 멘트를 하고 배시시 웃는 그를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한창 빠져있을 땐 동학년 선생님들에게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도 영상을 보여주며 박재정의 노래 실력과 감성에 대해 호들갑을 떨며 말하곤 했다.
그는 오랜 준비 끝에 작년 4월 정규 1집을 발표했고,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타이틀곡 <헤어지자 말해요>는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대단한 건 음반 발매 이후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음원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 유튜브에는 많은 가수와 일반인들이 그의 곡을 커버한 영상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그는 1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후 데뷔 무대였던 평화의전당에서 마침내 단독 콘서트를 하게 됐다. 콘서트에서 그는 몇 번이나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감사하다고 말한 후 아무 말 없이 관객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동안의 시간이 얼마나 지난하고 힘들었을지 알 것 같았다. 결국은 해낸 그가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그가 콘서트에서 전한 마지막 인사는 “저는 이제 연습실로 향하겠습니다.”였다. 그의 한결같은 겸손함과 진정성에 그가 좋은 가수이면서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느꼈다.
박재정 노래는 하루하루 사는 것에 바빠 잊고 살았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서툴고, 어설프고, 찌질했던 그렇지만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주었던 대학 때 남자친구가 생각나곤 한다. <놀면뭐하니>에서 그의 닉네임이 이제훈이었는데 내가 보기엔 박재정과 너무 어울린다. 닮았다기보다 <건축학개론>에서 이제훈이 맡았던 역할이 박재정의 감성과 딱 맞아서.
내가 사랑하는 로맹가리의 <마법사들>이라는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추억은 우리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자신에게 불러주는 노래 같은 거야.” 그가 계속 사람들 곁에서 오래오래 노래해주길 바란다. 그래야 나도 내 자신에게 불러줄 노래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