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연 Dec 18. 2023

향기로운 얼굴


1. 사탕


오랜만에 주문진 시장에 갔습니다. 초겨울 저녁 답인데도 여전히 왁자합니다.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덩달아 들떠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닙니다. 줄지어 늘어선 물통에서는 물고기들이 펄떡이고, 그 위로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혹은 높은 데시벨로 짜릿하게, 혹은 중저음으로 굵직하게 떠다닙니다. 한 바퀴 구경을 마치고 횟감을 조금 샀습니다.


시장에서는 활어 파는 사람 따로, 회 장만해주는 사람 따로입니다. 생선값을 치르자, 한 할머니가 나를 대신해 횟감을 받아 들고 앞장섭니다. 체구가 작은 할머니를 따라 시장 한켠에 자리 잡은 작업장으로 갑니다. 추운 날씨 탓에 손가락이 곱아서인지 칼끝에 속도가 붙지 않습니다. 커다란 고무장갑에 들어앉은 손이 유난히 작아 손과 장갑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어눌하고 굼뜬 손놀림을 보며 저러다 다치지나 않을까 공연히 마음을 졸입니다.


불안한 내 눈빛과는 상관없이 작업은 이어집니다. 몇십 년 됨직한 내공을 자신의 시간에 맞춰 차근차근 풀어냅니다. 느리지만 빈틈이 없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잘 다듬어진 생선살을 쓱쓱 힘들이지 않고 썰어내는 것으로 손질이 마무리됩니다. 포장용기에 담긴 회와 만 원 지폐를 교환합니다. 할머니는 예의 느린 손으로 돈을 받아 들고 돈통에서 어렵사리 오천 원짜리 하나를 찾아냅니다. 그러더니 작업대 옆 작은 종이 상자를 더듬어 사탕 두 개를 집어 함께 되돌려 줍니다. 사탕을 꺼내는 손도 조심스럽습니다.


사탕을 받아 들고 잠시 들여다봅니다. 이제껏 사탕은 밥집에서나 나눠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갑작스레 받고 보니 얼떨떨합니다. 몇 걸음 내딛다가 고개를 돌려 새삼스레 할머니를 다시 봅니다.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생선 손질에 여념이 없습니다.


주문진 시장에서는 손님 대부분이 뜨내기 관광객입니다. 활어 판매상조차 단골 장사가 아닙니다. 활어상과 연결되어 장사를 하는 생선 손질 가게는 더더구나 사탕을 나눠줘 가며 호의를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찬바람에 언 손가락을 움직여 가며 사탕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고객만족 어쩌구저쩌구 하는 상술이 아니라 그저 받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나눠 준 겁니다. 사탕 하나를 까 천천히 입에 넣자 시장 통 찬공기가 갑자기 훈훈해집니다.


주차장으로 가려고 되돌아서는데 작업장 위에 걸린 간판이 눈에 띕니다. 정찰제로 운영되는 작업비 안내문입니다. 간판에서는 할머니가 하는 일을 ‘할복’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세상에 할복(割腹?)이라니, 난감한 언어감각에 다시 한번 어리둥절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하고 서슬 퍼런 할복이라는 말 덕분에 입속을 구르는 사탕이 더 달달하게 느껴집니다.

주문진시장 할머니의 사탕


2. 얼굴


사탕 두 알이 특별했던 건 전날 경주 절집에서 본 글귀 때문입니다. 7번 국도를 따라 부산에서부터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문무대왕암을 끝으로 길은 바다를 버리고 내륙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이제껏 이어지던 바닷길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낯선 경치를 훑으며 느릿한 속도로 가는데 “골굴사”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언젠가 TV에서 본 기억이 떠올라 급하게 차를 돌려세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신라시대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오래된 사찰입니다. 바위 절벽에 바투 붙어 있는 대법당과 석굴사원, 마애여래좌상 그리고 선무도까지 볼거리가 널렸습니다. 하지만 잰걸음으로 눈도장만 찍고 내려옵니다. 초짜라고는 해도 북향을 한 산비탈의 겨울은 낮이 짧습니다. 오후로 접어들자 해가 서둘러 산마루를 넘어갑니다. 사위는 금세 어둑어둑해지고 칼바람은 사납습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볕 좋은 가을날 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바싹 마른 단풍잎으로 경내가 온통 뒤덮여 있을 정도로 골굴사는 단풍 맛집이기도 합니다. 그때 커다란 석상이 보입니다.


파안(破顔)에 배불뚝이 모양을 한 포대화상(布袋和尙)입니다. 개구지고 환한 얼굴은 언제 보아도 유쾌합니다. 좌상을 하고 있어도 불룩한 배는 역시나 어쩌지 못합니다. 배시시 웃으며 얼굴과 똥배를 오르내리던 눈길이 석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로 내려갑니다. 포대화상 품만큼이나 넉넉한 받침대에는 문수보살 게송으로 알려진 글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관심을 끈 건 앞 두 줄입니다. 오래전부터 내 낯빛은 “왜 이렇게 딱딱할까?” 생각하던 차입니다. 사는 게 팍팍하다고, 신나는 일이 없다고 혹은 세상사 복장 터지는 일이 널렸다고 해서 늘 오만상을 쓰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기쁜 일은 물론이거니와 근심거리도 화날 일도 없는, 그러니까 감정적으로 아무런 동요가 없을 때조차 미간은 좁고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습니다. 찡그린 표정은 오랜 습관이 되어버렸고 눈두덩 살은 근육질로 발달했습니다. 나만 그런 건 아닙니다. 지하철에서 부딪히는 표정 열에 아홉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입니다.


얼굴 따로 목소리 따로 일 리 없습니다. 인상 따라 말투 역시 날카롭습니다. 일로 만난 사람들에게 작정하고 덤빌 때야 아니라지만 가면을 벗어도 되는 편한 자리에서는 성정이 어디 가지 않습니다. 까칠한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곤 합니다. 몇십 년 된 오랜 친구가 내게 평생 들어온 까끌까끌한 말을 쌓아 올리면 높이가 어느 정도나 될는지 짐작되지 않습니다. 나 또한 때로 다른 사람이 이유 없이 찔러대는 말에 상처받습니다.


포대화상 옆에서 동아보살상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이윽고 차에 탑니다. 숙소를 향해 다시 출발합니다. 가는 내내 곱씹어 봅니다. ‘환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 이 두가지는 무재칠시(無財七施)와도 닿아 있습니다. 무재칠시 중 첫째와 둘째가 바로 화안시(和顔施)와 언시(言施)입니다. 가진 게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하는 건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칩니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됩니다.

골굴사 포대화상과 문수보살 게송


3. 향기


사탕 두 알은 보잘것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문진 시장 할머니의 사탕 두 알은 멀리 떨어진 경주 어느 절집 돌벼락 글귀와 하나가 되어 나에게 특별한 사탕이 되었습니다. 사탕은 환한 얼굴이고 부드러운 말입니다. 나아가 장삿속 없이 진실한 마음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할머니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굳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빈 사탕 껍질을 갖고 다녔습니다. 불현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비닐이 만져지면 내 표정을 살핍니다. 대부분 예의 그 화나고 무뚝뚝한 얼굴입니다. 매일 아침 양손으로 얼굴을 비벼 열을 내고 갖가지 기괴한 표정을 지어가며 안면근육을 풀어 줍니다. 그런 다음 미소를 지어보지만 거울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건 억지웃음으로 구겨진 얼굴입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온 일그러진 거죽이 호락호락 벗겨질 리 없습니다. 사탕 껍질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겠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신논현역에서 강남역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거리 가득 꽃향기가 흐릅니다. 옷가게며 화장품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입니다. 한겨울 콘크리트 도시 한복판에서 한여름 꽃밭 한가운데를 걷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가공의 향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기분 좋게 속아 넘어갑니다. 추위는 한 발짝 물러가고 발걸음은 가벼워집니다. 고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 역시 누군가에게 미묘한 향기가 됩니다.


* 문수보살 게송

面上無瞋供養具[면상무진공양구]

口裏無瞋吐妙香[구리무진토묘향]

心裏無瞋是眞寶[심리무진시진보]

無染無著是眞如[무염무착시진여]


#포대화상 #문수보살게송 #무재칠시 #화안시 #언시 #골굴사

작가의 이전글 봄맞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