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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Jan 29. 2024

#1. 다른 게 틀린 거야?

1. 달라와 틀려


어느 날 저녁 둘째에게 물었습니다. “플립하고 폴더가 어떻게 틀려?” IT 기기를 좋아하는 아들은 제품이 새로 나오면 개인방송, 블로그, 인터넷 카페 등 온갖 데를 돌아다니며 사양을 챙겨 봅니다. 사거나 사지 않거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마냥 신나고 재밌어합니다. IT에는 젬병인데다 슬로 어답터인 나는 반대입니다. 플립과 폴더블 폰이 나온 지 한참 됐지만 계속 헷갈립니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인데,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에서는 답답하고 한심해하는 속내도 읽힙니다. 속으로 ‘뭔 표정이 저래. 모를 수도 있지? 심한 거 아니야?’하는데, “플립하고 폴더가 어떻게 ‘달라?’라고 해야지. 자, 다시 해봐.”라는 말이 느릿느릿 건너옵니다. 뜻밖의 일격에 잠시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가 시키는 대로 “‘플립하고’ ~ ‘폴더가’ ~ ‘어떻게’ ~ ‘달라’?”라고 또박또박 따라 말합니다. 


그제야 플립이 어쩌고 폴더가 저쩌고 중얼댑니다. 하지만 질문은 이미 시효가 지났습니다. 플립과 폴더 두 단어는 고막에서 되 튕겨 나와 허공을 떠돕니다. 대신 ‘달라’와 ‘틀려’가 머릿속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며 생채기를 냅니다. “왜 ‘다른’ 걸 ‘틀린’ 거라고 한거야? 모르는 말도 아닌데.” 무심한 바꿔치기에는 오랜 무의식이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대로 한 방 먹었습니다.


‘다르다’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표준국어대사전).”입니다. ‘1과2’,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은 같지 않습니다. 이렇게 두 개가 같지 않을 때 ‘다르다’고 합니다. 반면 ‘틀리다’는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의 반대는 ‘같은 거’고, 틀리다의 맞은편에는 ‘맞다’가 있습니다. 


엄연히 다른데도 두 말을 섞어 씁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닙니다. 친구들과 잡담하거나 일로 여럿이 모여 회의할 때 ‘틀려’는 수시로 ‘달라’ 자리를 치고 들어옵니다. 일상생활에서처럼 출연자들의 정제되지 않은 대화로 채워지는 TV 예능 프로그램 역시 ‘달라’가 제 몫을 챙기지 못하는 현장입니다. 방송관계자들은 잘못 쓰인 ‘틀려’를 맞는 ‘달라’로 바로잡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자막을 편집해야 합니다. 사전에서조차 ‘틀리다’의 뜻풀이 중 하나로 ‘다르다의 비표준어’를 들고 있을 정도로 많이들 씁니다. 


말 배우는 아기들이 쓰는 유아어나 별 뜻 없는 일상어 혹은 방언 정도로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봅니다. 단지 부정확한 언어습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사고방식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치부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두 말을 섞어 쓴다지만 방향은 일방적이라는 데서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다른 걸 틀렸다고는 해도 틀린 걸 다르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에 둘을 더하면 다섯이야’라고 할 때 이걸 ‘달라’라고 하면 십중팔구 뭔 엉뚱한 소리냐며 이상한 눈초리를 받습니다.      


2. 존재하는 건 오직 차이뿐

은행나무 한 그루에는 수많은 은행잎이 매달려 있지만, 모두 다릅니다(사진 : Pixabay.com)

다른 걸 틀렸다고 하는 데서는 자칫 같은 것만 긍정되고 다른 건 거부됩니다. 비교되는 게 플립과 폴더 같은 사물이라면 별일 아니지만 사람 혹은 사람 집단 간의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같이 똑같아 보이는 은행잎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게 없습니다. ‘은행잎’은 비슷한 나뭇잎을 비슷하지 않은 나뭇잎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놓은 ‘이름’일 뿐 애초에 같은 나뭇잎은 없습니다. 한 나무 한 가지에서 바로 옆자리에 붙어 있는 나뭇잎이라 해도 크기, 색깔, 모양이 다릅니다. 


같은 명사로 불린다고 해서 같다고 생각하는 건 언어가 불가피하게 불러온 착각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뿐1)’입니다. 흔히들 ‘같다와 다르다’, ‘동일성과 차이’를 한데 묶어서 생각합니다. 같은 것이 있으면 다른 게 있고, ‘차이’라는 것은 ‘동일’한 것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다른 것만 있다면 ‘동일성’이라는 말은 ‘차이’라는 말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차이의 존재론적 일차성1)’입니다. 나뭇잎이 이런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개성’이라는 말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각자로 존재한다’는 것2)”입니다. 


이런 마당에 차이를 부정한다는 건 나 아닌 너를 부정하고, 우리 아닌 그들을 부정하는 겁니다. 부정의 정도가 약할 땐 상대를 백안시하거나 멀리하는 것으로 끝날 테지만, 정도가 심하면 상대방의 모습 중에서 나와 다른 부분을 깎아 내게 맞추려 합니다. 갈등이 생기는 원인입니다. 술자리에서는 생각과 판단의 차이를 용납하지 못한 군상들이 고래고래 말싸움을 벌이곤 합니다. 


차이를 뭉그러뜨리고 둘을 같게 만드는 데는 힘과 권력이 동원됩니다. 어쩌면 힘과 권력을 이용해 획일성을 강제하는 것, 즉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걸 ‘틀렸다’라고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틀린 걸 바로잡는다’라고 하면 폭력은 명분을 얻게 됩니다. 한발 더 나아가 ‘틀리다’를 ‘그르다’로 바꿔 쓸 수 있다는데 착안하면 차이를 제거하기 위해 동원되는 폭력은 도덕성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르다’는 “어떤 일이 사리에 맞지 아니한 면이 있다.”인데, 합리적이지 않거나 윤리적이지 않을 때 씁니다. 그르다의 반대말은 ‘옳다’이고, 사전에서는 ‘틀리다’와 ‘그르다’를 서로 비슷한 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일그러진 언어생활에서는 결국 ‘다른 것’은 바로잡아야 할 ‘틀린 것’이 되고, 틀린 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옳지 못한 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건 다른 것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잡아야 할 그 무엇도, 비난받아야 할 일도 아닙니다. 생각이나 생긴 모양, 사는 방식, 기호 그 어느 것도 다르다고 해서 틀린 건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른 건 다른 거라고 정확하게 말해야겠습니다. 아니 그에 앞서 다른 걸 틀렸다고, 혹은 글렀다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와 전철역으로 가는데, 바로 앞에서 어떤 여성이 걷고 있습니다. 걸음걸이가 자꾸 눈길을 잡아챕니다. 보폭이 크고 팔을 앞뒤로 크게 흔들며 걷습니다. 휘적휘적 팔동작이 워낙에 커서 주유소 바람인형이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전한 팔자걸음입니다. 보는 순간 ‘팔자걸음 걷는 사람은 어쩌고저쩌고’하는 속설이 스쳐 갑니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바로잡습니다. 나와 다른 건 그저 내 눈을 스쳐 지나가게 내버려 두고 아예 머릿속에 들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1) 「불교를 철학하다」(이진경)

2) 하이데거(「불교란 무엇인가」에서 인용, 이중표)


#차이 #동일성 #같다 #다르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이진경 #하이데거 #차이의존재론적일차성 #세상에똑같은나뭇잎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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