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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란 Oct 23. 2020

이야기로 로컬에 불러들이기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본 그레잇테이블

밭에서 뭐? 뭐하고 논다고?


내가 그레잇테이블에 간다고 했을 때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도통 뭘 한다는 것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더 설명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었다. 그냥 밭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노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 밖에. 그런데도 내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 같은 그런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그레잇테이블은 내 상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레잇테이블은 하루 동안 양평에 있는 밭에서 열린 페스티벌이다. 정확히는 다양한 장르와 영역의 플레이어들이 각자의 놀잇거리를 나누는 놀이 퍼포먼스다. 이 설명을 보곤 버닝맨(사막에서 일주일간 펼쳐지는 거대 축제) 과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딸기밭에서 펼쳐지는 음악 축제)의 매력이 잘 섞인 축제라 생각했다. 안 갈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하루동안 밭을 배경으로 플레이어가 되는 경험을 하며, 지속가능성의 구체적인 풍경을 발견했다.


표식을 보고 플레이그라운드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았다 (출처ㅣ그레잇테이블 인스타그램)




30명의 플레이어가

캔버스 위에서 노는 경험


참여자에게 틈을 내어 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기획

행사장에 도착하자 프로그램을 기획한 10명의 플레이어가 각자의 특기를 살린 놀잇감으로 밭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었다. 밭에서 난 재료로 바로 채소 바베큐를 만드는 마하키친, 밭을 생각하며 만든 커피를 내려 주는 동양가배관, 해가 지는 시간을 기다리게 하던 불놀이 퍼포먼서까지. 그레잇테이블은 이 밭을 하나의 캔버스라고 정의했는데, 밭을 맴도는 어색한 공기부터 우왕좌왕하는 나의 모습까지도 꼭 존재해야 하는, 캔퍼스를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로 느껴졌다.

캔퍼스에 "그냥" 그려놓는 그림은 없으니까. 작은 요소 하나까지도 모두 예술로 느껴지는 법이니까. 그렇게 나는 플레이어로서 이 모호한 예술 퍼포먼스에 깊이 빠져 들었다. 그리고 주최자의 의도와 내용으로만 꽉 채워진 프로그램보다 일부러 만든 틈에 참여자가 이야기를 채워 나가도록 하는 기획에 관심 갖게 되었다.


하루동안 우리의 플레이그라운드가 되었던 무, 들깨, 생각 밭. (출처ㅣ그레잇테이블 인스타그램)


이름을 붙이고 정의하는 일은

참여자를 적극적으로 불러들인다

특히 '밭=놀이의 장'이라는 정의, 그리고 '참여자=플레이어'라고 이름 붙여줌으로써 모두가 이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모두가 플레이어인 곳에서 관람객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도 분주하게 놀거리를 준비했다. 나는 봉숭아 물을, 다른 플레이어는 카세트테이프, 필름 카메라 등을 준비했다. 기억에 남는 한 플레이어는 해금을 연주했는데, 참가자로 불리는 일반 행사였다면 선뜻 나서지 못했으리라 짐작한다. 덕분에 나는 땅 속에 파 묻힌 무들 사이에 누워 해금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몸이 살짝 기울었다. 정말이지 우리는 모두 플레이어였다.


어느 쪽을 보든 땅에 깊이 박힌 무를 볼 수 있던 날. (출처ㅣ그레잇테이블 인스타그램)


자연을 먹고 느끼며

마음에 씨앗을 품는 경험


쓰레기 없는 플레이그라운드를 지향하는 곳

그레잇테이블은 밭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참여자에게 다회용 식기와 바구니, 쓰레기봉투를 가져오라고 안내했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만난다면, 또 자연에서 농사 짓는 농부의 환한 얼굴을 마주한다면 쓰레기를 만들고 버리는 데 주저하게 될 테니까.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마음에 생태 씨앗을 품을 계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구체적인 행동은 그 다음에 가능한 일일테니.


웰컴 구황작물! 일회용 그릇 아니고 연잎이라 또 한 번 감동했다


건강한 대지에 입맞춤을

그레잇테이블에 가기 전, 넷플릭스에서 땅을 주제로 한 영화 <대지에 입맞춤을>을 봤다. 영화는 화학비료로 땅이 얼마나 사막화되고 있는지, 또 경운(땅을 갉아 엎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공기 상에 노출되는지 보여준다. 지구에 영향을 덜 준다고 믿었던 채소마저 기후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해졌다. 영화에서는 대안으로 재생 농법을 소개하는데, 이는 땅이 자정 작용할 수 있도록 화학비료는 물론 경운 하지 않는 농사 방식이다. 그레잇테이블이 열린 봉금의 뜰에서도 농약은 물론 트랙터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풍성하게 작물을 얻을 수 있다니! 관행농업에서 벗어나도 괜찮은 거였네! 감탄해버렸다. 그리고 진짜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다.


우리가 재배한 생강. 잎줄기가 이렇게 아름다운 작물인지 처음 알았다. (출처ㅣ그레잇테이블 인스타그램)


제철 음식으로 감각 깨우기

이 날 신소영 쉐프(마하키친)는 한 명의 플레이어로서 채소 바베큐를 선보였다. 밭에서 딴 채소로 풍성하게 담은 플레이트가 탄생했고 나는 끔찍이도 싫어하는 당근도 두 번이나 추가해 먹었다. 도시에 사는 우리가 집 앞 마트에서 채소를 쉽게 구매하기까지 아주 긴 유통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건강한 토양에서 갓 재배된 채소와는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바쁘디 바쁜 현대인으로 살아가면서 다양한 감각을 잊고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제철 채소의 진짜 맛을 느끼며 살 것을 다짐했다.


마하키친이 준비한 요리. 플레이어 각자가 준비해온 그릇에 담아 먹었다. 나는 본죽통을 가져갔다!


식탁에 놓인 음식이 온 곳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힘

식사가 더 맛있게 느껴졌던 이유는 내가 먹는 이 채소가 난 땅을 알고 이를 키워낸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선물로 밭에서 자란 채소 꾸러미를 받아 왔는데 피클을 만들면서 한번, 먹으면서 한번 생생한 밭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리곤 조금도 낭비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꺼내 먹고 있다. 식탁 위에서 마주한 음식이 재배된 땅, 그리고 만든 사람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알고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세상은 조금 더 지속가능해지지 않을까? 안다는 건 결국 연결될 수 있다는 거니까.


선물 받은 무(무청 포함)와 모닝글로리로 피클을 담갔다.




그레잇테이블에서의 경험으로, 나는 사람들을 로컬로 불러 모으기 위해선 '이야기'가 필요하단 걸 확신하게 되었다. 지방도시의 청년 이주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같다. 경제적 지원만이 아니라 '지역이 가진 고유성  어떤 이야기로 사람을 불러들인 것인가', 그리고 ' 곳을 찾아온 사람을 무어라 이름 붙일 것인가' 조금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살이에 지쳐서 도망친 사람들이 아니라 '자연과 가까이서 관계 맺으며 자신의 플레이를 쌓아가는 사람들'이라 정의한다면 우리 모두 조금씩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한 공간에 모인 플레이어들이 쌓아 올리는 이야기는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그들은 또다시 스스로 로컬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을테니까.


앞으로도 우리에겐 각자의 마음 한켠에 씨앗을 자리 잡게 할,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지속가능한 삶을 제안하는 커뮤니케이터로서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 그레잇테이블이 그랬던 것 처럼.




그레잇테이블이 궁금하다면 >> 클릭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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