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현 Feb 16. 2021

변화하는 시대에서 변화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우리는 변화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정체되어 있다. 우리는 꾸준히 변화하고 있지만 꾸준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정체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나'가 있어야 하기도 하니까.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는 것


 2021년이 되고 나서야 새해 목표 몇 가지를 정해보았다. 그중 하나가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필요에 따라서 감성적 사고보다는 이성적 사고에 초점을 맞추는 것,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기보다는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것 등으로 변화하고자 하지만, 어쩌면 나의 본질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에 솔직한 것, 그 감정을 충분히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 등은 놓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10년이 지나 다시 펼친 책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과거의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사람은 변화해야 하는가?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이야기 속에는 스니프, 스커리, 헴, 허가 등장한다. 이 책은 다시 만난 동창생들이 함께 치즈 이야기를 듣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마리의 생쥐 스니프, 스커리와 두 명의 꼬마 인간 헴, 허는 맛있는 치즈를 찾기 위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미로 속을 뛰어다닌다.



잔물결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으리, 헨리 데이비드 소로


 스니프와 스커리는 치즈 창고를 찾은 기쁨에도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미로를 통과한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매일 하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변화를 인지하고자 했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자 했다. 헴과 허는 마음 놓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했다고 여기는 행복과 성공을 즐겼다. 안정적 생활에 너무 녹아든 것이었다. 그러한 이들에게 변화는 각각 '서서히' 나타났고, '한순간'에 들이닥쳤다. 이러한 '변화'에 맞서는 그들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속에 존재하는 스니프, 스커리, 헴, 허의 모습들로 복잡했다. 변화는 우리의 삶과 함께한다.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우리는 어쩔 땐 스니프, 어쩔 땐 스커리, 어쩔 땐 헴, 어쩔 땐 허의 모습으로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가 어떤 모습으로 지금의 상황을 대처하느냐 일 것이다. 이 작품의 작가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는 두 마리 생쥐들의 모습을 변화에 대처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삼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사람은 변화해야 하는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나'가 있어야 한다.


 지금 나의 모습이 스니프와 스커리처럼 변화에 민첩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런 유의 사람이거나, 헴처럼 새로운 변화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 멈춰있는 사람이거나, 허처럼 새로운 변화가 두려워 잠시 멈추었지만 그 두려움을 없애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똑같은 '나'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만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모든 걸 말하는 투 머치 토커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가만히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굳 리스너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선택은 본질적인 '나'에서부터 파생된 나의 일부 모습들이며, '나'라는 존재를 어느 한 모습으로 단정 짓기에는 섣부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에 등장하는 네 가지의 인물들이 본질적인 자신의 일부 모습들이라는 거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해결책이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에게 처한 상황에 따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질 수 있으며, 어떤 다른 말들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만의 '본질적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여러 번 이 글을 읽은 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데미안으로부터의 회답이었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소담출판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간의 갈등 속, 현재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세계를 깨뜨려야 함을 깨닫는다. 헤르만 헤세는 이를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로 묘사한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그 행위는 바로 자신에게 처한 '변화'라는 상황을 인지하고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변화라는 상황에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인지하고 대응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누구에게나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있어 실수를 하기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알의 한 겹을 깨고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더 나은 선택은 '나만의 무언가', 즉 나에게 '본질적인 무엇'이 존재할 때에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미 알을 깨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그 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세계 속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신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는 시도이며 좁은 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그 자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으로는 그 자신이 되어 보기 위해 어떤 사람은 다소 우둔하게, 또 어떤 사람은 보다 명석하게, 자기의 힘이 닿는 만큼 노력한다. ...<중략>... 우리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밖에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소담출판사


 헤르만 헤세는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신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렇게 우리는 다시 그 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필요충분조건인 '알에 들어가는 행위'를 지각해야 함을 의미하게 된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알 속으로 들어가야 함이다.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